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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92화) 열네 번째 작은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2. 4. 30. 08:05

 

 

(92화) 열네 번째 작은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현재 어려운 처지 곤경에 처해 보니 더욱더 친정어머니를 생각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친정어머니 마음은 딸을 보는 심정이 오죽이나 미어질까?
친정어머니는 산골 매우 가난한 집에서 딸 네 분과 귀한 아들 한 분 사이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셋째 딸로 태어나 배고픔과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하시다가, 울 아버지에게 시집왔어도 건강하지 못한 아버지로 평생을 남편 병 뒷바라지와 우리 다섯 명 형제를 키우시고 교육 시키느라 엄청나게 고생한 분이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내 위로 오빠 세 분을 낳고 내가 태어났을 때, 어린 시절부터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맏딸이 당신이 못 해 본 한을 대신 살아주길 바랐고, 맏사위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아버지처럼 건강을 잃어버렸으니 그 좌절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친정어머니께서 나보다 몇 배 더한 슬퍼하시어 어머니께는 걱정을 조금이라도 감추고 싶었다.
 
 
시가에서는 시숙님은 부모님과 동생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챙기시는 분이며 나의 위 동서 형님도 차분한 성격에 매우 좋으신 분이다.
하지만, 두 분은 평생 남에게 빌리지도 않고 또한 남에게 빌려주지 않은 분들이라 아무리 부모, 형제 사이라도 사랑하는 마음과 금전 문제는 절대로 별개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며, 늘 안정적인 경제권에 사셨다. 
하지만, 너무 지나쳐 시어머니의 암 투병으로 병원에 계실 적에, 시어머니 혈액 수혈비는 선불해야 맞을 수가 있었지만, 시숙님께서 시어머니 곁에 계시면서도 내가 와서 지불하기까지 수혈도 연기하셨고, 시어머니의 오랜 병원 기간으로 보험 혜택이 없는 비싼 입원비, 퇴원 수속비가 나왔는데도 한 푼도 보태주지 않아 시어머니께서 며느리 보기 민망해 당신의 반지를 나에게 빼주시면서 병원비에 조금이라도 보태라고 하셨다.


그래도 그때는 남편이 건강할 적이지만, 이번 경우는 달리 동생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우리 집 경제 사정도 가장 밑바닥에서 보험 혜택이 하나 없는 비싼 병원 퇴원 수속 계산서를 받고 보니 도저히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라 허청허청 등이 휠 것 같았는데도 역시나 한 푼도 도와주시지 않았다.
남편이 퇴원한 후에 위 동서 형님께서 우리 집 오시면서 생물도 아닌 냉동 전복 6개가 든 까만 비닐봉지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남편 몸보신을 하라고 하셨다.
혹시나 까만 봉지 안에 약간의 돈이 든 봉투가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매우 섭섭했던 기억은 예전 남편 증권 회사 일에 문제가 생겨 남편이 집을 나간 후에 단칸방 월세살이 무척 힘든 사항에서 셋째 딸 대학교 등록비가 없어 큰 집에 찾아가 정말로 내가 어렵게 머리를 조아리고 얼마라도 입학금을 부탁했을 때도 역시나 가차 없이 거절해 섭섭했던 기억마저도 떠오르게 하였다. 
 
그 후로 남편은 매일 재활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을 당시 어느 날, 내가 대학교 강의 시간으로 잠시 시숙님에게 남편을 부탁해 수업을 끝내고 숨이 가쁘게 병원에 돌아와 고맙다며 인사하였다.
< 오늘은 재활 병원에 온 김에 저도 몸이 안 좋은 곳이 있어서 동생과 함께 치료받아 덜 심심했어요> 
<잘하셨어요>
그리고 함께 병원 문을 나섰는데 접수부 간호사가 나에게 남편의 치료비를 지불하고 가란다.
시숙님께서 본인의 재활 치료비만 지불하시고 남편 비용은 내가 오면 받으라고 했단다.
설마 그렇게 까지나 했을까? 접수부 간호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 아녜요. 오늘 치료비는 함께 할 것인가? 제가 물었는데 본인 것만 지불할 테니 동생 것은 제수씨가 오면 받으라고 그랬어요>
그 말은 정말 사실이었고, 너무 기가 막히게 섭섭해 지난 일까지 모두 떠올라 내 마음에 비수 같은 날카로운 어떤 것이 박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오늘만이라도 제발 함께 지불해 주셨다며 지금까지 쌓인 모든 섭섭함이 이토록 원망스럽지 않을 텐데...)
 
내가 아픈 것도 아니고 하나뿐인 동생이 뇌출혈에다 현재 사는 집도 비워줘야 할 딱한 시점에 놓여 있는데 현재 고생하는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준다면, 오늘만큼이라도 경제 능력이 훨씬 좋은 형님께서 본인 것만 지불하셨다니, 돈 앞에서는 지나치게 각박해 남보다 더 낯설게 느껴져 두 번 다시는 큰집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지만, 큰집에서는 내가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하는지조차도 모를 일을 나 혼자 가슴앓이하였다.
시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는 단둘밖에 없는 형제인데 어떻게 남처럼 안 보고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날이 갈수록 암울한 돌덩어리로 쌓이고 억눌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큰집과 영원히 멀어질 것 같은 불안 심리까지 겹쳐 큰 고통이 되었다. 
 
내 단순한 성격에 속에다 답답한 시커먼 덩어리를 안고 살자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평생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산다는 것이 나를 더욱더 힘들어, 사실 쉽게 마음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몇 번이나 나 자신을 달래고 다 독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어, 용기 내 큰집 시숙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늘따라 애들 아빠가 아주버님과 형님하고 함께 저녁 외식하고 싶다고 하네요. 오늘은 아주버님께서 맛있는 저녁을 사 주실래요...? >
여태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기에 내 제안에 잠시 당황하시다가 흔쾌히 승낙하시어 저녁 식사 약속을 정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아주 깊이 박힌 무거운 돌덩이가 밖으로 던져 나간 듯이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벼웠다.
어쨌든, 그때 내 생각은 평생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안고 산다는 것은 나 자신도 독이 되어 불행한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때 하마터면 갈아질 뻔한 형제 우애는 그날 이후로 현재까지 매우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 그분들도 나이가 들수록 돈에 대한 의식이 많이 달라졌고 식사도 잘 사주신다 )
 
 
 
 
현재 사는 아파트를 비워줄 날짜가 다가와 헬스클럽과 가까운 곳은 비싼 동네라 월세방을 구하기가 막연했다.
이 주변을 포기하고 변두리에서 싼 곳으로 찾아다녔으나,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낯선 동네는 도저히 정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예전 전원주택에서 살았던 동네로 가 보았으나, 가격이 싼 대신 교통편이 안 좋아 좀 더 교통이 나은 부동산에 들렀으나 우리 조건과 맞지 않았다.
여러 군데 부동산을 종일 맥 빠진 게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들린 부동산에서 20평대 낡은 빌라가 있지만, 빚에 몹시 쪼들려 곧 경매로 넘어갈 처해 있어 집주인이 경매로 넘어가기 전에 차라리 단 한 푼이라도 건져 고자 조금 전에 빌라를 내놓고 갔단다.
가장 큰 문제는 등기부등본의 을구 등기 사항에서 은행 채무 가등기, 개인 근저당 설정 등... 여러 가지 채무가 매우 복잡하게 얽힌 상태에서 곧, 경매로 넘어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서 이런 집을 구매할 사람들은 대다수가 돈이 없는 사람들이라 혹시나 잘못 사 되려 화근이 될까 봐, 쉽게 구매자를 찾기 힘들다며 그 대신 가격은 싸게 내놓은 집이니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그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하였으나, 비싼 월세를 비교해서 복잡한 등기부등본의 을구 단점만 잘만 해결한다며 가격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아무리 싼 빌라라도 당장 지불할 능력이 없다면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찰나에 A 선생으로부터 헬스클럽 인수할 보증금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이 왔었다.
그 말에 우선 내가 가진 돈으로 빌라를 계약하고 그 후 중도금은 약간만 지불하고 등기부 을구에 기재된 모든 것은 법무사와 부동산 사무실, 남편도 공인 중개사 자격증이 있으니 남보다 쉽게 빠르게 해결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여기 먼 거리에 두고서 세 끼 식사와 곁에서 항상 보살펴야 하는 실정인데 아직은 에어로빅 교육생 교육도 마친 상태도 아니고 A 선생과 완전하게 마무리 단계도 확실하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먼 거리를 하루에 몇 번씩 왕래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런 곤란한 문제를 부동산 사장님에게 의논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었다.
빌라 등기부기재가 모두 깨끗해지면 빌라 1층에서 슈퍼를 경영하시는 분이 전세로 들어오고 싶어 하니 잔금 걱정은 전세금으로 마무리하도록 하면 어떻겠느냐 하셨다.
그렇게 전세 계약을 마쳤지만, 우리에게 집 문제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직은 헬스클럽과 가까운 곳에다 월세방을 구해야 내 일하면서 수시로 들락거리며 남편을 돌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현재 사는 아파트에서 당장 이사해야 할 날짜도 긴박해 지니 마음이 더욱 조급해져 다시 이 부근 부동산 여러 군데 다니다가 아주 오래된 20평대 아파트 매매가 현시가 보다 싸게 나왔고 이사 날짜 조건도 우리에게 맞출 수 있으니 한 번 가보지 않겠냐고 건의하였다.
다급해진 이사 날짜에서 현시가보다 싸고 이사 날짜 조건도 맞추어 준다는 좋은 제안에 호기심과 맞물러 일단 한번 가보자는 마음이 들어 그 아파트에 가 보았다.
TV에서 한 번씩 소개한 쓰레기로 가득 찬 집처럼 이 집은 여기 이사와 단 한 번도 도배한 적이 없는지? 천장 벽지도 낡아 곧 떨어질 정도로 늘어져 있고, 너무 지저분해 벌레도 보였고, 온 벽지가 연년생 개구쟁이 어린 두 아들이 새까맣게 낙서로 어느 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함께 간 부동산 사장님도 내 눈치를 볼 정도로 형편없는 상태이니 가격이 남보다 싸게 나온 이유를 금방 알 것 같았다.
남들 같으며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바로 돌아설 단점을 가진 아파트이지만, 난 신발을 벗고 들어가 관심을 가지고 훑어보니 부동산 사장님과 집주인도 의아한 듯이 반기는 눈빛이다.


예전에도 서울에서 처음으로 구매한 집도 이랬고, 대구에서도 몇 번 이런 집을 사서 내 힘들게 함께한 품앗이로 '러브 하우스'로 변신한 경험이 있었으니, 가격만 싸다면 나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 은행 담보 대출을 알아보니 가능해, 비싼 월세보다는 은행 대출 이자가 훨씬 싸게 계산되었다.
때마침 생각보다 빨리 A 선생이 헬스클럽 인수인계비와 임대 보증금을 받고는 중도금까지 처리한 후에 잔금은 은행 담보 대출로 마무리하면서 집이 쉽게 해결되었다. 
리모델링비는 아파트 이사 나올 적에 받은 약간의 임대 보증금으로 난 모든 자재를 직접 구하러 다니면 인부와 함께 일을 시작하니 남에게 맡기기보다는 훨씬 저렴한 가격에다 지난날 여러 번 해 본 내 경험으로 결과는 완전 다른 분위기의 깨끗한 아파트로 변신하였다. 
 
 
인생은 참으로 앞날 한치를 모르는 미로 같아, 얼마 전에 남편이 뇌출혈로 쓰려질 때만 하여도 앞날이 매우 캄캄해 어두운 절망 속에서 단칸 월세방을 구하러 다녔다.
변두리에서 싼 월세방을 구하러 다니다가 경매로 넘어갈 상황에 놓인 빌라를 싸게 매입하게 되었다.

이번은 아픈 남편을 먼 곳에 홀로 둘 수 없어 다시 헬스클럽과 거리와 가까운 곳으로 다시 월세방을 구하러 다니다가 아주 허름한 아파트를 또다시 싸게 구매하고 아주 깨끗하게 리모델링해서 여기로 이사 오게 된 것이다.

( 그 당시에는 대구의 고급 새 아파트는 비쌌으나 허름한 빌라, 낡고 오래된 아파트는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짧은 기간에 전연 생각지도 못한 20평대 빌라와 아파트가 갑자기 생기니 도저히 믿기지 않은 너무 터무니없는 조화 속에서 어안이 벙벙해 어떤 마법 주문에 걸려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무리 험악한 밑바닥까지 내려가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잘 견디다 보면 앞날이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아서 어둡고 힘들었던 인생의 밤이 지나면 내일의 밝은 해는 또다시 뜰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니까"
 
 

 

하필이면 여기로 이사와 몇 년 전 우리가 살았던 최고급 아파트가 여기서 창문만 열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때 우리가 몇 년 후에 여기에서 살 것이라고는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 봤을까?
씁쓸한 마음이 이따금 느껴지면서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안다고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은 흘러 대학교 학기 말이 되었다.
학교에서 내 짐을 챙겨 나오면서 학과장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였는데 아쉬워하는 학과장님께서 혹시나 돌아올지 모르니 내 결재 도장과 내 이력서는 항상 보관하고 있겠다고 하셨다.
방학 기간이라 정든 제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 한 체 그동안 부지런히 들락거린 대학교 정문 앞에서 그간 학생들과 함께 즐겁게 보낸 생각이 스치면서 잠시 마음이 먹먹해져 한참 동안 교문 앞에서 서 있다가 나왔다.
 
 
헬스클럽 마지막 인수인계하는 날, 긴 세월 동안 수집한 많은 LP판, 음악 테이프, CD 등을 보니 한 달에 한 번씩 서울 청계천 낙원 상가 등을 구석구석 뒤집고 다녀 남들보다 먼저 LP판을 구하러 다녔던 기억들, 대회 출전용 음악 녹음하느라 늦은 밤까지 음악 편집실에서 고생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또 스쳤다.
내가 무척 아끼고 애착심이 많았던 음악 몇 장을 집어다가 갈등으로 다시 놓았다. 
단 한 장이라도 가지면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할 것 같아 단호하게 버리고 빈손으로 나왔다. 

(그날 이후로 모든 음악을 오랫동안 완전히 귀를 닫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복지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자서전 배경 음악으로 처음 한둘 올리다가 현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사람의 심리가 이런 것인지? 아니면 내 심리만 이런 것인지? 어렵고 몹시 힘든 고비를 잘 버티어 한시름을 내리고 긴장의 끈을 푸니 이제는 정신적 문제가 생겼다. 
처음 남편 생명이 위급했을 때는 남편만 살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는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었다. 
또한, 병원 퇴원 후에는 당장 집만 해결된다며 바랄 것이 없다고 그랬다.
그리고 또다른 소원은 1인 몇 역활 하느라 하루 24시간에서 주중에는 4시간 이상 제대로 자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아 온 것 같아서 이제는 한 번 제대로 푹 자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잠은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몇 날 며칠을 잠에 취해 일어날 수가 없을 만큼 정신이 몽롱해져 잠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랬는데, 첫 우울증 징조가 시작되었다.

잠에 빠져 지내다가 어느 날 아침, 문뜩 시계를 보다가 덜컥 깜짝 놀라며 늦어서 아주 큰 일 났다며 빨리 헬스클럽에 가서 회원들 운동도 가르쳐야 하고, 에어로빅 교육생 지도도 해야 하는데 지각이라 어떡하느냐며 운동복을 황급히 챙겨 현관 앞에서 허둥지둥 신발을 끄집어내는 내 모습에 남편이 놀라 당황하며 나를 막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현재 헬스클럽은 내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A 선생에게 인수한 상태이며, 이제는 에어로빅 교육생 교육도 없으며, 대학교 강의도 없다는 현실을 새삼 깨닫고 가방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 힘없이 푹석 주저앉았다.
몇십 년을 한결같이 아침마다 전쟁을 치르듯이 바쁘게 지속된 생활에서 갑자기 소속감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니 풀 죽은 얼굴로 하염없이 돌아가는 벽시계의 초 바늘을 멍하니 넋이 나간 듯이 쳐다보는 습관이 아침마다 생겼다.

어떤 날에는,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에어로빅댄스 음악을 들으니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아오르고 숨이 가빠지고 답답해지는 가슴 통증과 어지러움에 더불어 맥박 증가로 순간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 나는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끊임없이 정진하고 그동안 열정을 쏟고 살아왔는가?"

 
처음 에어로빅 경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역경 속에서도 탑을 하나씩 쌓아 올리듯이 끈기와 노력으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왔는데, 어느 날,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일어난 갑자기 남편이 쓰러지면서 줄줄이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허공 속으로 사라진 내 모든 것이 허탈하고 공허해 어떤 것도 난 즐겁지 않았다.
또한, 나를 더 심하게 자책하게 만드는 것은 난 남에게는 건강 강조하고 운동을 가르쳐 온 선생이 진작 본인 남편 건강은 제대로 못 챙겼다는 내 자신을 매우 책망하며 처음 남편 증세가 나타날 때 그때 병원에 진작 가지 못한 숱한 후회감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남편과 마주 앉아 식사하면서 음식이 흘러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내가 그랬다.
< 그렇게나 유별히 깔끔 떠는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드나 봐요. 음식을 다 흘리고 먹네요>
그 후에도 남편이 요즘 내 머릿속에 뭔 벌레 같은 것이 기어 올라가는 것처럼 증상이 가끔 생긴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빨리 병원 갔어도 혹시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내가 소홀한 탓이라는 자책감마저 휘말리면서 나를 괴롭혔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복합된 내 우울증 증세가 시작되면서 아무런 맛과 상관없이 폭식만이 내 스트레스를 풀었으니, 계속 살은 불어나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웬 낯선 사람 같았고, 그럴수록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대인 기피증에 계속된 칩거 생활만 이어졌다.
이미 내면에 심각한 고립감과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내 성격상 우울증 따위는 내 인생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만 하니 남들 앞에서는 심지어 내 형제, 우리 가족, 앞에서도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까지 하면서 애써 감춰야만 했었다.
 
어느 날 내 친한 친구 전화 왔었다.  
< 너 요즘 괜찮아?>
< 그럼!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어>
<그럴거야! 넌 천성적으로 밝고 쾌활한 성격에 긍정적 에너지가 있어 사회적인 활동도 매우 잘하니까, 물론 너에게 우울증 따위는 절대로 안 어울리지! >

< 그래 맞아!>
 
하지만, 나만이 아는 비밀의 우울증은 괴롭게 지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