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열세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중이라는 통보에 난 혼비백산해서 어떻게 병원에 도착했는지 모를 지경으로 야간 응급실에 도착하였다.
의식 없는 상태에서 의사들이 소생시키고자 분주한 모습이고 이어서 MIA, CT 촬영실로 이동하는 찰나에서 난 순간적으로 손가락에다 먼저 피를 조금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응급실 보호자 중에서는 당연히 바늘을 가진 사람은 없겠지만 "누가 바늘을 가진 분이 없나요?" 무언의 표현으로 긴박하게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 보호자 할머니께서 내 뜻을 바로 알아채셨는지 삼지 주머니에 꽂힌 옷핀을 얼른 빼서 의사 몰래 나에게 주셨다.
그를 MIA, CT 촬영실로 급하게 이동하는 복도를 난 따라가면서 맥없이 축 늘어진 남편 팔의 손가락에다 옷핀을 찔러 보았으나 한 방울 피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른 방향 쪽으로 급히 돌아가 다른 손가락을 찔렸는데 이번에는 약간의 피가 나오더니 남편이 무의식중에서도 아픈지 움찔 팔을 뿌리쳤다.
곧이어 MIA 촬영실에 들어가 더는 그곳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지만, 남편의 반응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으며 만약 의사들이 내 이런 행동을 보았다면 파상풍 위험이라며 절대 못 하게 했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우리 외할머니께서도 내가 급체가 생길 때마다 내 엄지손가락에 실을 돌돌 감아서 바늘을 찔러 피를 조금 내고 배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나았던 기억이 있었다.
예전에도 울 아들 아기 시절에 엄청난 경기 고열로 죽을 뻔했을 때, 나이 많으신 소아과 의사께서 주삿바늘로 손가락을 먼저 따 피를 조금 낸 후에 의학 방식 치료를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그 당시 대구 최고의 소아과 의사님인데도 매우 심한 고열로 경기 하는 아기들에게는 한방과 현대 의학의 장점을 인정하시는지 그렇게 하셨다.
한 번씩 헬스클럽에서도 어느 회원이 운동 중에 생리통이 너무 심해 숨을 못 쉴 만큼 고통스러울 할 적에 소독된 바늘로 우리 외할머니 방식처럼 했는데 거짓말처럼 좋아진 상태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날 응급실은 금요일 저녁 시간이라 모든 전문의 의사들은 조금 전에 퇴근한 것 같았고 야간 응급실 담당 의사와 인턴 의사, 간호사들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찌른 옷핀으로 피를 조금 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남편 의식이 조금씩 온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요즘 야간 응급실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때만 하여도 야간 응급실에는 아주 급한 환자가 아니면 조금 전에 퇴근한 높으신? 신경외과 전문 의사를 제 호출을 하는 것을 매우 난처한 듯이 인턴 의사들은 남편 상태만 살폈다.
금요일 야간 응급실은 일요일 밤까지 더는 급한 응급 환자가 들어오지 않았고, 월요일 아침 정상 근무 시작이 되면서 응급실은 여러 명 의사을 대동한 담당 신경외과 전문의 교수가 남편 침대 주변을 둘러싸 촬영된 MIA, CT 차드를 살피면 남편의 상태를 파악하느라 여러 가지를 물었다.
본인의 이름, 주소, 여기가 어디인지 여러 가지를 물었으나 뇌 손상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남편 곁에서 초조하게 서 있는 친형님조차도 못 알아보고는 "누구냐" 의사 물음에 "외삼촌"이라며 어둔한 말투로 말을 하니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래도 급히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의사가 나를 가르치면서 "이 사람은 누구인지 아세요?" 물었는데 여태 아무것도 기억 못 하고 본인의 이름 조차도 몰랐던 남편이 나를 보고는 본인의 아내이며 내 이름도 또박또박 말을 해 의사는 눈을 번득이며 아직은 희망이 있으니 당장 수술하기보다는 조금 더 경과를 두고 보자며 수술보다 가능한 자연 치유를 더 권장하면서 중환자실로 옮기도록 하였다.
중환자실은 정해진 면회 시간만 허용되기에 대기실 앞 의자에 앉으려니 응급실에서 나에게 옷핀을 주신 할머니가 계시어 나를 반겼다.
<남편은 어째되슈?>
할머니는 몹시 궁금한 듯이 물었고 난 지금까지 있었던 경과를 말씀드렸다.
<아주 잘 되었구먼! 무우도 바람들어가면 안 좋은데 하물며 사람 머리 바람 들어가서 뭔가 좋겠슈~ 그날 밤에 당신 남편이 들어왔을 때는 내가 보아도 아주 심각해 보이더구먼, 낮에 들어왔으면 당장 수술했을거여. 밤이라 의사들이 다 퇴근한 뒤에 왔으니 수술을 못 한 거여. 그 전날만 해도 응급실이 어수선하고 북적북적했는데 그날은 다른 급한 환자도 없었제. 그것이 좋은 운이 되어 오늘까지 온 거여. 참말로 그때 옷핀으로 피를 조금 뽑은 것이 아주 잘한 일이고. 그렇게 했으니 재발 없이 오늘까지 차차 회복되었을 것이여. 우째~ 그날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텐데 바늘을 찔러 피를 내라고 했을까? 참말로 당신이 희안하데이….>
할머니께서 어떤 보호자로 응급실에 오셨는지 내가 물었는데 긴 한숨을 내시고 말씀하셨다.
< 우리 영감이 밤늦게 술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컴컴한 도로를 무단으로 건너오다가 차에 치인 것야. 저게 무슨 꼴인지. 어디 하나 성한 곳도 없이 팔, 다리를 칭칭 감아 여기저기 주렁주렁 걸쳐 놓은 꼴이 꼭 정육점 고기 같잖슈. 의사가 뭔 철사로 뼈에다 끼워 넣는 수술과 다른 곳도 수술을 해야 한다고 우리 두 아들을 불러놓고 말을 했다는데 우리 자식 저거 살기도 매우 어려운 형편에 지 애비 수술 못 하겠다고 불효자식처럼 말을 못 해 수술한다고 했다네. 그래서 내가 절대 수술 못 하게 했어. 한 군데도 성한 곳도 없고, 영감 나이도 많아서 나을 가망성도 없을 텐데 쓸데없이 돈만 버리제. 나아도 그놈의 술버릇 못 버리고 또 나갈 텐데, 돈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내라도 수술을 말려야지>
늦은 밤,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어느 조폭 패싸움에 칼 맞은 보스인지? 봉합 수술하고 중환자실로 실려 들어온 이후로 중환자실 앞 복도에는 건장한 깍두기? 들이 양쪽 복도를 종일 점령 보초를 서 있어 그 앞을 지나가는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주변 분위기가 험악한지 불편해 보였다.
난 남편의 위험한 순간을 넘겨서 정말로 감사해 안도했으나 담당 의사는 15일 이내로 재발 위험도 많은 뇌출혈이라 아직은 안심 단계는 아니라고 해서 재발만 안 생기도록 기도하였다.
한편 헬스클럽에서는 며칠째 내가 학원에 나오지 않으니 무슨 일인지? 교육생 교육도 내가 없으니 중단되었다.
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남편이 아파 병원에서 보호자로 잠시 있으니 선생님들이 맡아서 운동하라고 그랬다.
또한, 대학교 강의도 나갈 수 없으니 학과장님에게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보호자로 있어야 하므로 아무래도 수업을 못 할 것 같으니 다른 교수님으로 강의를 교체하라고 하였으나, 아직 이른 결정을 하지 말라며 학과장님께서 알아서 임시 대처한다며 절대 만류하셨다.
연이어 행사가 있는 서울 에어로빅 심판석에도 나갈 수 없었으니 그토록 힘들게 이룬 내 심판석도 다른 심판관으로 교체하라며 협회에도 공문을 보냈다.
난 담당 전문의 의사에게 남편 회복 가능성에 대해서 문의했으나 뇌출혈이란 머리의 복잡한 신경 뇌 손실이 손상된 것이라 회복이 쉽지 않다며 다른 예를 들면서 전기 합선된 회로와 같아서 이전처럼 완전 회복은 매우 불가능하니 재발만 없어도 천만다행이며 수술하지 않았으니 다른 이보다 회복은 좀 더 나을 것이라 했다.
남편 병원비는 오랫동안 부은 매우 큰 액수 보험이 있어 다행인 줄 알았는데 그가 이미 해약하고 해약금을 찾아간 상태라는 말을 듣고 허탈함에 다리 힘이 풀려서 매우 참담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현재 사는 전·월세 아파트에서도 전세 보조금을 빼고 비싼 월세로 교체된 상태이며 또한, 남편 통장마저도 빈 통장이었다.
어쩌다가 이토록 이성 사리 판단이 망가진 상태로 주식 투자를 했으니 실패는 당연했을 것이며 그럴수록 본인의 건강 관리도 소홀해져 체중은 10kg 이상 불어나 고혈압에다 엄청난 스트레스는 불안'초조 증세로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 같았다.
사람마다 주식에 빠진 이유는 각각 다르겠으나, 내 생각에 남편의 경우는 어릴 적 지독한 가난이 큰 영향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채 먼 시골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시골 장날에만 잠시 나가 나물장사와 작은 밭농사로 겨우 생계를 유지할 만큼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도시락을 못 사서 소풍도 포기할 정도이었단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할 형편이지만,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공부 잘하는 제자가 안타까워서 선생님의 박봉 한 봉급을 털어서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단다.
그 후로 학업을 계속하려면 그 당시 경북 도지사 장학금이 있었는데 꼭 그것을 받아야만 했단다.
교과서조차도 없는 가난에서 먼 거리를 빌려 다니면서 공부해야 했고, 멋을 부릴 가장 예민한 사춘기 시절 방학 때마다 스스로 자기의 눈썹을 밀어서 문둥이 모습으로 바깥 유혹을 차단하면 오직 공부만 죽도록 파고들었단다.
그렇게 열심히 했으니 학창 시절에 거의 만점으로 단 한 번도 전교 1등에서 벗어난 본 적이 없었고 장학금 덕분으로 졸업할 수 있었으며 그때 포부가 사법고시를 꼭 합격해야만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음악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어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군대 입대한 후에 일본에 계시는 아버지와 이산가족 재회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으로 살 수 있었단다.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제대하고, 난 여고 교복을 갓 벗은 봄날이었고, 그 당시에는 나는 유난히 철없는 자유분방한 시절 때라서 여러 가지 일로 그는 약혼을 서둘면서 그의 포부인 사법고시 공부도 접었고 이어서 결혼 준비에 공무원 시험을 보았는데 최우수 점수 특혜로 그가 원하는 청와대 근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아버지 뜻에 따라서 공무원보다는 사업을 선택하면서 공무원 사표를 내고 대구로 내려왔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고 젊은 나이에 크게 성공해 자만심이 상당히 컸던 시기에 그의 사업에서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기면서 다른 길을 엿본 것이 잘못된 주식투자이었다.
큰손이라 불릴 만큼 주식 투자에서 처음은 엄청난 수익금을 맛본 그는 다른 세계 신기루 세상을 만난 양 매우 흥분되어 구태여 힘들게 어려운 사업할 필요성마저도 없어지고 그때 가져본 최고의 희열은 가난으로 어릴 적부터 한번 제대로 못 놀아본 한이 짜릿한 주식 게임에? 그를 푹 빠지게 했다.
이전 그의 생활 철학은 매우 철두철미해 모든 것이 빈틈없을 만큼 완벽주의를 추구했으나 그것조차도 한순간 무너져 오직 주식 투자에만 올인했지만, 실패로 많았던 부동산은 몽땅 주식 블랙홀에 빠뜨리고 결국 폭망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주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실패한 문제가 무엇인지 연구하여 공인 증권 투자 상담사 자격증까지 취득하게 되었고, 그 계기는 국내 대기업 증권 회사에서 증권 투자 상담과 투자 분석사로 근무하게 된 것이 또한, 그의 인생을 비극으로 초래한 것이다.
(자서전 77화 참조)
난 남편을 아무리 판단해 보아도 공부나 공무원 체질인데, 사업가도, 증권 투자 상담사도 그에게는 남의 옷을 입은 잘못된 인생으로 산 것 같았다.
아무튼, 그 이후에는 어려운 경제 속에서도 두 아이 유학하고 세 딸 대학교 졸업, 그리고 딸들의 좋은 직장 취업, 큰딸 결혼,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도 군대 입대하였다.
자식들 부담에서 이제는 벗어나 한결 가벼워지고 우리 집 경제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으니 이대로 쭉 평온하게 살았으면 오죽 좋았을까!
남편 자체 성실함은 더할 나위 없는 모든 면에서 가정적인 사람이라 항상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올바른 생활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었으나 다만, 그의 인생에서 주식투자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별 탓 없이 잘 살아왔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남편은 경상도 남자에다 지나칠 만큼 집에서 말이 없는 과묵한 성격이라 울 아이들이 (우리 아빠는 말을 하면 죽는 줄 아나 봐) 할 정도이었다.
그만큼 집에서는 식사, TV, 수면 등 늘 변화가 없으니 요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기가 어렵다.
그러니 그에게 어떤 일이 터져야 난 알 수 있을 정도이라서 그런 점에 아무리 다투어도 소용없어 포기하고 살았다.
얼마 전부터 몹시 움직임의 귀찮음이 더 심해 살도 많이 찌고 무슨 고민거리가 있느냐는 물었지만, 별일 없다고 그런다.
<사무실에 조그만 문제로 스트레스는 있으나 별것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어>
그때 남편은 이미 또다시 주식 투자를 시작하였고, 예상과 달리 실패가 거듭되자 이성 판단 통제가 안 되어 해약한 보험금, 전세 보조금, 은행 대출 등등... 돈이 될만한 모든 것을 주식 투자했으나 마음만 조급할 뿐, 성급한 조바심은 되레 올바르지 못한 판단으로 이어져 가진 돈을 모두 탕진되었으니 그 충격은 갈수록 스트레스에 눌려 결국 혈압과 뇌출혈에 의해서 쓰러진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20일간 보내고 담당 의사는 그간 재발 없이 호전되었다며 일반병실로 옮겨 주었지만, 그때는 가격이 싼 6인 일반병실도 없었고 오직 1인 병실만 있었기에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과 선택 여지가 없었다.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없는 심각한 상태라서 그런 일은 남에게 맡길 수도 없었고 난 24시간을 남편 곁에만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헬스클럽 운영도 차질이 생겼고, 에어로빅 교육생 수업도 계속해 중단되었으며 대학교 강의, 심판, 등등 모든 것을 갑자기 손을 놓아야 했으니 앞으로 내 수입마저 없다면 비싼 아파트 월세, 언제까지 입원해야 할지 모르는 비싼 병원비, 재활 치료비, 생활비 등등......
정말 인생에는 한치를 예상 못 했던 일이 갑작스럽게 터졌을 적에는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도저히 앞이 캄캄해 이런 막연한 인생의 긴 터널 안에는 과연 출구가 있기는 하는 것인지?
난 이전보다 더 깊고 더 어두운 터널 안으로 또다시 들어가고 있었다.
'내 삶의 이야기 > 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92화) 열네 번째 작은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0) | 2022.04.30 |
---|---|
(91화) 열세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0) | 2022.01.22 |
(89화) 열세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0) | 2021.09.10 |
(88화) 열세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0) | 2021.09.10 |
(87화) 열세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0) | 2021.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