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좋은 음악이 날마다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든다

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93화) 열네 번째 작은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2. 7. 30. 06:09

 

 

(93화) 열네 번째 작은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나 자신 내면에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삶 자체 모두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아무런 의욕 없이 온종일 멍하니 축 늘어져 집안에만 틀어박혀 헤어나지 못할 적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었다.
내 친구 생각은 나처럼 오래 세월 동안 사회 활동을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일을 접고 아픈 남편만 종일 바라보며 누구와도 만나기를 꺼리고 바깥 생활 차단한 체 은닉만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강아지를 무척 좋아하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았는지 태어난 지 1개월 된 햇강아지를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 와서 나에게 건네주고 갔었다. 

 

하지만, 강아지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강아지를 싫어하는 이유는 유난히도 깔끔한 성격인 그는 털이 달린 짐승이 집안에 함께 지내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싫어했다. 
더구나 한 달밖에 안 된 강아지라서 이빨이 가려운지 남편의 신발만 물어 흔들고, 새롭게 리모델링한 벽지도 찢어내고 실내에다 소변 실례까지 하니 남편의 스트레스가 혈압으로 올라갈까 봐 난 남편 눈치를 보면서 잦은 강아지 배변 때문이라도 데리고 밖으로 나와야 했었다.
막상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도 갈 곳이 없어 우리 아파트 뒤편 산으로 자연스럽게 산책하게 되었는데 집 안보다 상쾌한 나무숲의 공기를 매일 마시고 걷다 보니 그간 마음에 꽉 찬 어두운 구름도 조금씩 거두어지는 것 같았고 훨씬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남편도 매일 우리와 함께 산책하면서 처음은 거동이 불편했으나 매일 1시간 산책과 1시간씩 난 재활 치료 목적으로 산에서 남편에게 개인 스트레칭 트레이너로 열심히 하다 보니 그 효과 회복은 날이 갈수록 매우 좋아져 그 후로 그는 혼자서도 잘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절제된 건강식 식사를 더불어 시행하니 큰 도움이 되었으며 처음 강아지 배변 문제로 남편 눈치 보느라 산으로 산책을 시작한 시발점이 매일 산을 오르내리고 스트레칭 치료와 건강식에다 더불어 강아지의 재롱을 보는 날들이 갈수록 기분전환마저 좋아져 강아지가 우리 집의 복을 준 것 같다며 이름을 '복동이'라고 지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아직 한 번도 아들 군 면회를 가지 못했는데 복동이가 온 이후로 그의 거동도 예전만큼 불편하지 않으니 처음으로 아들 군 면회를 떠나기로 하였다.
아들 군부대는 DMZ 비무장지대이라 먼 거리로 혹시 지나친 무리가 되지 않을까 몹시 걱정하면서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 도착해 그날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일찍 아들 면허실에 도착하였다.
출입구에서 먼저 신원확인을 마친 후에 오랜 기다림 끝에 민간인 출입 통제선 철책 안으로 이동할 때는 헌병들과 그들의 차로 깊숙한 곳의 면회실로 가야 했다. 

영화에서나, 뉴스에서만 본 비무장지대 안의 풍경은 계속 들어갈수록 '지뢰밭 조심'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여기저기 붙어 있어 긴장감마저 들었으며 어떤 작은 면회실에서 겨우 아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아들은 아빠 건강상 먼 거리 여기까지 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우리 면회에 몹시 반겼다. 

 

그곳 면회실 식당 냇가에는 흔히 말하는 물 반 고기 반, 정말 바가지로 퍼 올려도 될 것 같은 어마한 민물고기들이 엉켜 우글우글했다. 
아마도 비무장지대 가장 깊숙한 이곳은 민간인 금지이니 자연 생태계가 그대로 보존되어 다양한 민물고기가 많아서 이곳 면회실 식당 메뉴도 민물매운탕 하나뿐이었다.
난 민물고기를 여태까지 먹은 본 적이 없었는데 고기를 아낌없이 엄청나게 흠뻑 넣어 끓인 매운탕 맛은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먹을 수 없을 맛이라 아들 면회 간 추억보다 그때 먹었던 매운탕 맛이 더 기억에 남았다. 

 

어느 날 셋째 딸이 캐나다로 취업 이민을 결정했다며 서울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왔었다.
처음에는 매우 당황스럽고 걱정도 많았으나, 딸의 선택 결정에는 깊이 생각한 결론일 거라 믿음을 가졌다.

딸은 캐나다로 출발하기 전까지도 잠시도 쉬지 않고 대구 유명한 입시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하다가 캐나다로 떠났다.
( 그때 딸의 이민 결정은 훗날 우리가 캐나다로 이민 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첫째 딸이 아들을 출산하였다.
우리 곁에 손주와 강아지 '복동이'까지 생기면서 바쁜 날이 많아져 이전보다는 내 우울증 증세 회복도 도움이 조금 되었으나 예전처럼 활기찬 모습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해 음악에 관련된 어떤 것도 계속해서 귀를 닫고 살았다. 
그런 것이 몇십 년 세월 동안 날마다 우리 회원들과 신이 나는 댄스 음악, 스트레칭에 쓰인 조용한 발라드 음악들을 단칼에 무를 자르듯이 쉽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것에 잊고 벗어나고자 모든 음악뿐만 아니라 헬스클럽에 관련된 지인, 내 제자조차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스트레스 폭식으로 내 모습이 망가져 있어 자신감 상실 상태로 대인 기피증은 친구 및 누구라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어느 날.
첫째 딸과 사위가 우리에게 의논이 있으니 함께 자동차 타고 어디로 가보자고 그런다.
자동차를 타고 내린 곳은 국내 유명한 상표의 가구점, 휴대폰 판매점, 운동기구 판매점, 등이 있는 사돈의 건물이었다.
< 여기는 왜?>
< 아빠와 엄마는 오랫동안 사회 활동하셨던 분들인데, 지금처럼 계속 집에만 계시면 생활 의욕 상실로 우울할까 봐 우리 시부모님께서 저게 보이는 휴대폰 판매점을 내보내고 아빠 공인 중개사 사무실로 내드리면 어떨까? 하시네요>
< 아이고~ 사돈 마음은 정말로 고마운 말씀이지만, 아직은 아빠 건강상 일할 정도는 아니야 >
< 우리도 알아요! 그래서 시부모님 생각은 아빠가 집에만 계시는 것보다는 아침마다 출근할 내 사무실이 있다는 그 자체만 생각하시고, 여기에서 단돈 10원 수입도 물론 임대료, 관리비도 아예 생각도 마시고 출근할 내 사무실이 있어 나오신다는 생각만 하시면 어떨까? 하시네요. 우리 의견도 찬성이고요 >
< 너의 시부모님과 너희 마음도 정말로 고맙지만, 아직은 아빠 건강 상태로 출퇴근 자체가 당치도 않은 무리수 같으니 좀 더 회복하며 다음에 생각해 보게>
< 그래도 아빠가 병원에서 퇴원 후에 지금까지 집에만 계셨으니 얼마나 갑갑하셨겠어요. 엄마도 집에서 아빠만 바라보고만 계셨으니 매우 답답하실 것 같고요. 그러니 이제부터 집에만 계시지 마시고 아침마다 엄마가 운전해 여기에 오시어 아침 커피 한 잔 마시다가 놀다가 들어간다는 생각만 하시고 한 번 시도해 보세요>
< 괜한 부담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이다음에 아빠 건강이 더 좋아질 때 한 번 생각해 보게>
<그러지 마시고 시댁에서 장소를 제공하시니 우리는 실내 장식 및 필요한 모든 물품을 채울 테니 일단 나오세요 >

 

집으로 돌아와 첫딸의 시부모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생각해 주신 마음이 고마워 전화를 드렸는데 그분들은 자식으로 이어진 소중한 인연이니 한 가족과 다름없다며 절대로 부담감 없이 본인들의 성의를 꼭 받아 주길 바란다고 하셨다.
그분들은 이전 결혼식 할 적에도 그동안 딸을 키우시느라 고생했다면 나에게 천연 흑진주 큰 반지 선물을 하셨고, 우리가 결혼 예단비 보냈을 때도 성의로 굳이 30%만 받겠다면서 70%를 다시 보내왔으며 예물 함을 보내올 적에 신랑 친구들이 가면 신붓집에 부담이 될 것이라며 직접 신랑과 그의 남동생만 함을 보내었다. (87화 참조)
그것뿐만 아니라 영덕게를 잡수다가도 우리가 생각나 한 박스를 사 오셨고, 함께 7080 콘서트, 나훈아 콘서트, 동해 횟집에도 다녀온 적도 있어, 사돈이지만 가까운 친근함이 있었다.

처음은 사돈과 이런 관계가 거북해 받아들이길 꺼렸으나 무한정 단호하게 거절만 할 수가 없어 그 후, 마련된 사무실에 처음 출근하게 되었다.
매우 깨끗하게 리모델링된 사무실에는 빠짐없이 일제히 필요한 가구, 사무실 비품 및 다양한 물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남편도 본인의 큰 책상과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을 때는 매우 흡족한지 그의 표정도 여태 집에서 보아 온 다소 침울한 표정과 무척 달랐다. 
사돈과 딸 부부 말처럼 집에서 갑갑하고 우울하게 집에서 보내는 것 보다는 매일 깨끗한 출근복을 갈아입고 이곳 사무실에서 모닝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이 생활 활력소가 되었다. 

 

그곳은 우리가 여태 살아온 곳에서 반대 지역이라 다소 낯설었지만, 좋은 점은 내가 아는 이가 없다는 것은 사실 마음이 한결 편하게 여겨졌다.
이곳에서 남편 지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은 이 지역에서 중소기업 사업하는 분인데 여유가 많은지 매일 아침 우리 사무실에 들러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남편과 바둑 몇 판을 두시고 가시는 분이다.

 

난 운전해 올 적에 매일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 어린 강아지를 홀로 집에 두고 올 수 없어 데리고 나왔다.

여기 사무실에서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으니 남편이 친구와 바둑 둘 시간에 강아지와 주변 산책도 하고 부근 시장에서 장을 보고, 사무실에 돌아오면 피곤해 쉴 수 있는 쉼터 공간이 필요해 제법 넓은 사무실 공간이라 사무실 칸막이벽 뒤편에다 따로 작은 방 하나 만들었다.

또한 매일 도시락 챙겨 오기보다는 이곳에다 간이 부엌을 만들어 간단한 식사는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좋았고, 더운 날에는 샤워가 필요해 간단한 샤워 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으니 아파트에 있는 시간보다는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어느 날, 어느 아주머니가 우리 사무실에 들어와 전셋 집을 구해 달라는 첫 손님이 들어왔다.
누가 봐도 밖에서 보면 우리 사무실은 완벽한 공인 중개 사무실이라 손님이 당연히 들어오신 것인데 난 당황스러운 얼굴로 머뭇머뭇 말까지 더듬느라 등에서 식은땀이 줄~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난 여기 사무실 주소도 모를 정도로 이 지역에 관해서 아는 것이 전연 없었다.
정말 단순한 생각으로 남편과 내가 집에서 암울하게 지내기보다는 사돈 추천과 우리 딸 부부 응원에 여기에서 모닝커피 한 잔과 남편은 친구와 바둑 두는 것으로 정신 건강 회복에 도움 된다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날 얼떨떨한 표정으로 당황하며 첫 손님을 그럴듯한 핑계로 공손하게 돌려보낸 후, 난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부동산 공부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 결심에는 가장 큰 이유가 현재 우리는 생활비가 완전히 바닥난 상태이었고 아무튼 무엇이라도 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이왕이면 여기는 모두 갖추어진 완벽한 부동산 사무실이니 최우선 좋은 조건을 갖춘 첫 번째 이유가 되었고, 둘째 이유는 난 결혼 후, 생전 처음 서울 신장위동에서 집을 구매할 적에 가장 최악의 조건 상태 집을 멋모르고 산 경험이 있었는데, '러브 하우스' 변신시켜 살다가 팔 적에는 운이 좋아서 매우 높은 이득을 본 경험이 있었다. 

그 후로도 대구에 내려와 최근까지 몇 차례나 허름한 집을 구매해 '러브 하우스'로 고쳐 잘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부동산이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기회로 이론적인 것을 배우면 남편을 도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공인 중개사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남편도 이번 뇌출혈로 아프기 전에는 공인 중개사 그의 자격증으로 규모가 큰 부동산 회사에서 일반적인 아파트, 주택 등은 취급하지 않은 규모가 큰 것만 취급하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개인 부동산 사무실이니 남편을 도울 사람이 필요하니 난 어려운 부동산 교재 책을 사 들고 공인 중개사 학원에 다니면서 매일 독서관에 박혀 공부하게 되었다. 

 

옛날 결혼 초, 생전 처음으로 외사촌 언니 따라서 가 본 점집에서 점쟁이가 나더러 내 인생은 선생이 아니면 학생이 될 것이고 또 학생에서 선생이 되는 평생을 그렇게 되풀이될 팔자라고 했는데 이번도 역시 선생을 그만두니 바로 공부할 학생이 된 것 같아 그때 들은 말이 상기되었다.


난 어릴 적부터 가장 싫어하는 것이 공부이며 제일 못하는 것도 공부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아주 평범한 주부로 살 줄 알았는데, 내 운명은 점쟁이 말대로 이미 정해진 것처럼 나의 삶에는 선생, 학생, 선생, 학생으로 계속 되풀이되면서 그렇게 살았다. 
첫 시작이 된 것은 막내아들을 낳고 엄청나게 부풀어진 심각한 체중으로 의사 선생님 조언대로 살을 빼기 위해서 헬스클럽에 첫 등록 하였는데 그 계기는 에어로빅 선생이 되었고, 그 후 어쩌다가 얽혀 헬스클럽을 맡아서 경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난 댄스만 잘할 뿐이지, 운동에 관해서 과학적인 이론은 아는 것이 전연 없었으니 공부가 필요해 30세 대학교에 입학해 학생 신분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고된 하루는 헬스클럽 경영, 에어로빅 선생, 어린아이 4명을 돌보는 엄마 학생이고 그리고 주부로 힘든 모든 역경을 뚫고 악착스럽게 공부를 버티어 체육과 대학원 졸업하였다.

국가 공인 심판 자격증이 필요해 공부해 자격증 획득 후, 다양한 심판 경험으로 대학교에서 강의도 맡아 선생으로 지내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번 갑작스러운 남편의 뇌출혈로 남편 곁에서 간호하느라 모두를 내려놓아야 하니 이제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난 줄 알았는데, 이번 계기로 다시 공인 중개사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 사무실 오픈하고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며 역시 내 천직은 에어로빅 선생으로 남을 가르치는 것이지, 결코 부동산 사무실 경영은 나와 생각 관이 너무나 달라서 실망과 좌절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까지는 나는 부동산 구매자로 허름한 주택이나 아파트를 사서 '러브 하우스'로 고쳐 살다가 팔았을 때는 진정 몰랐지만, 막상 직접 고객 상대로 상담, 추천 그리고 거기에 따른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직업이라 부동산을 중개하는 직업은 역시 나와 맞지 않았다.

여기에서 앞으로 전개되는 사건들로 내 삶에는 또 다른 경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