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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87화) 열세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1. 3. 28. 10:15

 

(87화) 열세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세 명의 딸이 대학교 졸업하고 직장에 입사한 후에야 비로소 일단 부모로서 책임이 가벼워져 안도의 한숨도 쉴 수 있어서 부모의 인생 무대가 1막을 무사히 내린 것 같았다.

 

내가 우리 부모님 밑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것처럼, 언제 세월이 흘러간 것인지, 새의 둥지 안에 있는 새끼 새들에게 부모 새가 부지런히 먹이를 구해 입에다 먹이를 넣어줘 키우고 나면 새끼 새들이 깃털이 자라고 펄떡거릴 때가 되면 둥지를 떠날 준비 하듯이, 아직도 내 눈에는 철부지 자식인데 벌써 첫째 딸이 우릴 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결혼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여기서부터 또다시 내 인생 2막의 무대가 올라가는 듯이 시작하는 것 같았다.



첫째 딸이 대학교 시절에 어느 동아리 모임에 첫 가입 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대학교 선배와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 날짜가 곧, 정해졌고 결혼식 준비해야 했었다. 

 

난 어린 나이에 결혼하면서 첫째 아이의 출산, 육아 그리고 내 나이 20대 말에 첫 딸의 학부모가 되었을 때도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가르쳐야 하는지 여러 가지로 그때도 서툰 것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랬는데 또다시 40대 말에 나이와 걸맞지 않은 일찍 첫 사위를 맞이하면서 도저히 실감 나지 않았고, 첫 경험이라 결혼 준비도 서툴렀다. 

 

어느 날 신랑집에서 우리 딸에게 줄 결혼 예물을 마련하러 가는 날인데 예비 안사돈께서 전화 와서 나랑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 전화에 난 놀라서 난감하고 당황스러웠다.
우리 딸에게 줄 결혼 예물 마련하는 곳에 내가 동행한다면 얼마나 부담스러울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닌 것 같아서 완강히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에 예비 신랑과 함께 우리 집 앞으로 자동차로 모시러? 올 테니 딸과 꼭 함께 밖에 나와 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당부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렇다고 사이가 매우 어려운 관계인 예비 안사돈의 간절한 부탁 말씀이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예비 사돈의 자동차에 마지못해 합승하게 되었다.

 

예물 매장에서 우리 딸에게 어떤 예물을 사주든지 모르는 척하느라 매우 어색하고 조심스러워 불편한 자세로 멀찌감치 앉아 딴전을 피우느라 매장 잡지를 읽는 척 고개 숙여 잡지를 보고 있는데 예비 안사돈께서 갑자기 날 부른다.

본인도 뭘 하나 사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을지 몰라 추천해 달라고 그런다.
<제가요...? 어떤 것을 좋아하시는지 제가 취향도 잘 모르는데요…?>

<괜찮아요. 사돈께서 마음에 드시는 것이라면 전 무조건 좋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에 꼭 드는 것을 골라주실래요?>
<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것은 다 있을 것 같고요. 좀 다른 특별한 것이 어떨까요? 저는 저기 보이는 큰 흑진주가 눈에 무척 띄는데요?>
< 사돈께서 마음에 꼭 드시는 것이라면 전 무조건 좋으니 사장님~ 저것을 꺼내어 주실래요?>
사장님이 전시 유리 속의 그 반지를 꺼내어 놓자, 날 보고 먼저 꺼 보고 보여달란다. 그래야 본인께서 한 발자국 물러나 봐야 잘 보인다고 그런다. 
<그런가요? 그럼 제가 먼저 끼어볼 테니 한 번 보세요. 자 ~ 어떠세요?>
< 어머나! 예쁘네요. 그리고 반지 사이즈까지도 딱 맞네요>
< 한 번 꺼 보세요. 이제는 제가 봐 드리게요>
< 아녜요. 실은 오늘 매장에 함께 가자고 한 것은 그동안 따님을 키우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그 보답으로 제가 반지라도 선물하고 싶어서 애시당초 계획을 세우고 함께 온 자고 전화한 것입니다. 곱게 딸을 키워서 보내 주신 것에 비하면 이것은 하잘것없겠지만, 제 성의라고 생각하시고 거절하지 마세요>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시기에 난 매우 화들짝 놀라면서 사양하였다.
< 무슨 그런 말씀을요? 그랬으면 진작 이렇게 비싼 것을 고르지 않았어요!>
< 아녜요. 마음에 꼭 드신 것을 고른 것 같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순간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너무나 놀라서 완강히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사장님에게 포장해 달라고 그런다.
보석 가게 사장님마저도 그 광경에 매우 감동하셨다며 나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태 장사하면서 신랑 어머니가 신부 어머니에게 예물 반지 선물하는 것을 처음 본다고 하셨다. 

 

난 그렇게 예비 안사돈에게 예물 반지 선물까지 받게 되었는데 그것뿐만 아니라 내 나름 성의껏 예단비를 보냈는데 그중에서 성의로 굳이 30%만 받겠다면서 70%를 다시 보내왔었다.
예물 함도 신랑 친구들을 보내면 신붓집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며 그것조차도 신랑과 남동생 편으로 직접 함을 보냈으며, 함 안에는 딸의 고급 겨울 밍크코트를 비롯해 매우 흡족할 예물들이 꽉 차 있었다.

 

 

결혼식 날, 우리 하객도 집안 친척과 내 헬스클럽 많은 회원으로 매우 북적거렸으나, 사돈 집은 딸의 시아버지께서 아주 큰 교회 장로님이시고, 시어머니 역시도 같은 교회 권사에다 00시 부녀회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더구나 그들에게 첫아들 결혼식 날이라 사돈집 하객은 놀란 만큼 수많은 하객 긴 줄로 이어져 매우 북적거려 정말 놀라웠다.
또한, 축하 기도는 딸의 큰 시아버지께서 목사님이시라 축하 기도를 이미 하셨는데, 또 많은 목사님이 오셨는지 다른 목사님의 축하 기도까지 이어져 결혼식 날인지? 큰 교회 일요일 집회 모임인지? 아무튼, 그런 날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이바지 음식은 내 절친 친구가 유명한 전통 다도회 회장이라 직접 이바지 음식 작품 선물로 만들어줘 칭송을 받았고, 음식은 사진 작품으로 남겼다고 하셨다.
첫 경험 결혼식이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척이나 고민도 많았으나 걱정과 달리 어쨌거나 쉽게 마칠 수가 있었다. 

 

 

우리 집 경제는 그동안 힘들게 마련했던 아이들 학비와 유학비, 매달 서울에 보내야 했던 생활비 등의 지출이 정지하니 우리 집 경제도 훨씬 쉽게 회복되면서 작은 상가 3층 주택 월셋집에서 새로운 새 아파트 전월세로 옮길 수가 있었다. 

 

셋째 딸은 호주 어학연수에 다녀온 후에 영어를 잊어버릴까 봐 처음에 인터넷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과 영어 채팅 대화를 시작하였으나 모두 끊어버리고 마지막 남은 백인 친구는 딸과 동갑내기로 꾸준히 지속하고 있었다. 
 
(우리 시절에는 외국 펜팔이라고 하였으나 요즘은 인터넷에서 영어 채팅 대화이다)

 

 

그 백인 청년은 한국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이 생겼는지 추석을 앞둔 날에 백인 청년이 우리 집에 방문하였다.
키가 185cm에 얼굴도 매우 미남이며 젊은 청년이 담배도 피우지 않은 매우 성실해 보였고 예의도 바르면 젊잖았다.

난 외국인과 인연은 시아버지께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환했을 당시에도 시아버지의 일본 친구들이 우리 집에서 며칠씩 묵고 가셨고, 지난 우리 헬스클럽에서도 캐네디언 3명의 영어 선생님들이 회원으로 등록하면서 친하게 지낸 것과 막내아들이 호주 고등학교 방학 때에 일본인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에 와서 일주일 묵고 간 일도 있어서 외국인과 직접 대면은 그다지 서먹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어 대화는 전연 되지 않았다. 

(요즘 TV 프로에서 "어서 와 한국이 처음이지" 그 프로처럼 난 그런 과정을 그 당시에 이미 겪어본 것 같았다)

 

 

추석 전날이라 딸은 시가 큰집 제사 음식을 도우러 가 버리고 나 혼자 무척 바쁘게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는데 남편은 TV만 보면서 혼자서 음식 장만하는 것이 외국인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지 자기라도 도와주겠다며 불편한 좌석 자세로 부침개를 굽는 서툰 모습에 무척이나 기특하기도 하면서 웃음도 잦게 만들었다.

다음날 추석 아침에도 차례상 앞에서 절을 하는 모습도 매우 신기한지 한국 문화를 모르니 아무도 없는데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 매우 궁금한지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차례상을 치른 후에 청도 운문사에 갔었는데 추석이라 절에는 방문객도 없어 매우 한적하면서 안개가 자욱한 절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면 연달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경내 부엌에서 어느 스님이 가마솥에서 방금 찐 솔잎을 깐 따뜻한 송편을 꺼내다가 외국인을 발견하시고 그에게 한번 맛을 보라고 주셨다.
그는 첫 한국 방문에서 추석 차례상 풍경과 청도 운문사의 한국적 풍경, 그리고 한국 음식도 매우 좋아하며 한국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떠났다.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함께한 부부 모임에서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셋째 딸이 그 경비로 차라리 유럽 첫 가족 자유 여행을 떠나자고 그런다.

큰 비용에 걱정하니 처음 계획한 일본 경비만 생각하시고, 그 외 추가되는 비용은 서울에 있는 두 딸이 알아서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다.
첫째 딸은 결혼했으니 갈 수 없고, 아들은 호주에서 유학 중이라 갈 수 없으니 서울에 있는 두 딸과 함께 떠나면서 제주도 여행 이후로 처음으로 유럽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가족 자유 여행이라 여행사의 일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또한 가이드마저 필요 없으니 우린 지도 한 장만 들고는 아주 자유롭게 유럽을 돌게 되었다.

 

( 그 시절은 지금처럼 스마트폰 시대가 아니라서 지도를 가지고 찾아다녔다)

 

그때는 관광 여행자가 많지 않을 시절이라 어디를 가나 조용했었다.

런던에서 빨간색 이층 버스 투어, 브로드웨이 극장의 뮤지컬의 '캣츠', 영국 박물관, 그리고 프랑스 미술관, 세느강 유람선, 파리 에펠탑 전망대, 그리고 리용에서는 유명한 인형 극장, 그곳의 매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전차에서도 무섭고 특이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추석에 우리 집에 방문했던 그 백인 청년과 그곳에서 우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추석 때 우리 집에 왔을 때 함께 청도 운문사를 다녀왔는데 베르사유 궁전에서 두 번째로 다시 만나니 우리 가족과 더욱더 가까워졌고, 우리가 프랑스 리용으로 떠나면서 그 백인 청년도 자기네 나라로 떠났다.

이탈리아로 이동할 적에는 그 당시 처음 타보는 초고속 (KTX 같은) 기차를 타고 스위스를 통과하면서 기차에서 무료로 주는 와인 한잔을 마시면서 창밖의 풍경과 어느 기차 여행은 외국 영화에서만 본 옛날식 작은 방으로 나누어진 각자 방문이 달린 기차 여행 하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유럽의 빨간 색의 지붕들은 예전 그림책에서 본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그 호텔은 세계적 유명한 많은 배우가 숙박한 곳이라 그들이 남긴 사인 글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기억과 밀라노에서 패션가, 베네치아에서는 콘도라 보트를 탄 아름다운 기억과 김치 통조림을 사 온 것을 먹는데 한국 파리와  달리 그곳 파리들은 처음 맡아본 김치 냄새 반응에 자꾸 날아들어 쫓아내면서 웃었던 기억도 남는다.

무엇보다 다리가 아프면 어느 노상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 거리의 악사들이 우리 곁에 다가와 바이올린으로 연주해 더불어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매우 좋았다. 

 

숙박은 셋째 딸이 근무하는 서울 소공동에 있는 대형 호텔은 외국 대형 웨스틴 호텔과 체인 회사라서 해외에서 직원 특혜 할인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 긴 여행 기간에는 가는 장소마다 최고급 웨스틴 호텔에서 날마다 지낼 수 있는 것이 매우 편안해 좋았다.

그때 가 본 가족 해외여행은 첫 경험이라 그런지 여태까지 여행 중에서 내 기억에 가장 오랫동안 남은 아름다운 추억 여행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이전에 매우 어렵고 힘든 시련이 찾아왔을 때, 하마터면 아이들 대학교도 포기할 뻔한 절망한 시기를 잘 견뎌서 졸업하고, 그리고 좋은 직장에 취업한 덕분에 이번 가족 해외여행은 딸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아서 더욱더 뜻깊은 여행이 되었다.

 

 

그 이후에 그럭저럭 한 줄기의 무탈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나 싶었는데...,

인생이라는 바람은 늘 고요하게 부는 것이 아니었다.

 

 

이다음에 나올 이야기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예상조차 못 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의 세찬 바람이 불어 닫치면서 전연 생각하지 못한 캐나다 정착하게 된 것은, 그 이후 셋째 딸이 그 백인 청년과 결혼하면서 딸이 사는 토론토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난 외국인 인연이 유독 엉켰지만, 설마 백인 사돈까지 생길 것이라고는 전연 생각지도 못했는데....,

 

내 인생을 돌아보면 누굴 어떻게 만나서 미래 우리가 캐나다에 살게끔 이 모든 것들이 이미 내 인생 각본에 짜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