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좋은 음악이 날마다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든다

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86화) 열두 번째 상가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1. 1. 8. 21:41

 

(86화) 열두 번째 상가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학생들 사이에서 에어로빅댄스가 입소문이 퍼지면서 주변 지역의 에어로빅장을 경영하는 원장 및 선생들부터 댄스 특강은 없는지?  배우고 싶다는 문의 전화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런 점에서 체육 학과장께서 나에게 제안을 하셨다.

<인근 지역 에어로빅장에서 특강으로 댄스 작품을 배우고 싶다는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데 제 생각에 우리 학교 이미지도 부상시킬 겸 학교 홍보도 될 것 같아서 이번 기회에 우리 체육과에서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 특강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선생님께 의견을 여쭈어봅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 지역 사회에 봉사가 될 것 같네요. 에어로빅장 경영하시는 분에게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겠습니다>

< 그럼 그렇게 알고 계획을 짜서 봉사 특강 개최한다는 공문을 띄우겠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혼잣말로 나에게 중얼거렸다.

< 나도 일 복도 참 많지! 더는 일을 안 벌이고 이제는 쉬고 싶다면서 또 봉사하겠다고 승낙을 했으니.....>

하지만, 이 결정에 보람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부산 00 대학교 체육과 교수님의 수업을 받고자 일주일에 한 번씩 매년 간을 부산까지 청강생으로 다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나도 배움을 받았으니 그 보답으로 누구에게 되돌려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좋은 보람 같았다. 

 

 

봉사 특강 교육이 시작되었다.

강의 하루 전부터 오늘 배울 작품의 음악 녹음테이프를 미리 준비하고 강습이 끝나도 수강생  중에 각자 안 되는 부분에 다시 개인 레슨까지 해주고 나면 하루가 훌쩍 지나면서 매우 피곤하였다.

그래도 내 고달픔보다는 배우러 오시는 분 중에는 먼 경북 끝 지역에서 오시는 분들은 새벽부터 출발하셨다는 말에서 그분들에게 오늘이 헛된 하루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수강생들에게 임시 녹음테이프를 드렸지만, 계속 쓰면 곧 늘어나기 때문에 LP판을 주문하는 것이다.
국내 가요 작품 음악은 수강생 각자 알아서 구할 수가 있으나 국내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최신 팝 댄스곡은 요즘처럼 쉽게 인터넷 검색과 음악 다운도 받을 수 없는 시대인지라 일반지역에서 LP판 구할 수가 없으니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외국 최신곡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 음악이 국내에 유행하기 전에 미리 작품을 만들면 훨씬 생명력이 더 지속하기에 먼저 음악을 찾아내는 것이 최고의 내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도 직접 서울 청계천이나 낙원 상가 위층 레코드 상가를 부지런히 뒤집고 다니면서 발품을 팔아야 구할 수 있었다. 

 

(요즘도 그곳에 아직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는 매우 성업하였다)

 

서울 가게에서 내가 먼저 음악을 들어보고 선별된 LP판을 가져올 적에는 우리 헬스장을 비롯한 취업 나간 제자들 몫까지 가져와야 하는데 장거리 기차 이동 과정에서 무거운 LP판을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것이 매우 힘들어 이곳의 수강 선생들 몫까지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가져올 수가 없었다. 

요즘처럼 편리한 택배 시절이 아니라서 서울 가게 사장님에게 고속버스 편으로 LP판을 보내 달라고 부탁해도 대부분 혼자 가게를 경영하는 분이라 가게를 비우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오고 가는 것은 시간 소비가 많다며 내 부탁을 꺼렸다.

다행히 단골 가게 사장님이 보내주면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직접 물건 찾으러 가야 하는 시대지만, 얼마나 고마운지.

 

 

음악 선정에서 이보다 훨씬 더 힘들었던 작업은 퍼포먼스 공연을 위한 음악이다.

편곡과 특수 효과음을 첨가하는 것은 그 시절에는 음악 전문 스테레오에서만 오직 작업이 가능하였는데 그곳 전문가와 함께 의견을 맞추어 겨우 음악이 완성되어도 퍼포먼스 작품을 조금씩 다듬다 보면 또 달라지는 음악 녹음으로 수없이 다시 교정했던 것은 가장 힘든 작업이라 아직도 그 기억이 남는다.

힘든 음악 작업이 겨우 끝나면 또 밤잠을 설치면서 퍼포먼스 작품 연구를 짜느라 그리고 출연할 제자들에게 꼼꼼한 교육으로 완성되면 드디어 퍼포먼스 공연이 방송 무대 조명을 받고 펼쳐질 때면 비로소 내 고된 작업에 안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결코 돈이 되는 일도 아니며 매우 힘든 작업이지만, 돈보다 앞서 나의 성취감에 큰 보람을 느낄 뿐이다.

 

 

어떨 때는 이런 생각도 들 때도 사실 있었다.
돈이 되지 않은 이런 일에다 큰 노력과 열정을 쏟지 않고 차라리 돈이 되는 곳에다 내 모든 열정을 몽땅 쏟아부었다면 난 아마도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시 내 과거 인생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비록 돈은 안 될지라도 자아실현 성취감은 무엇과 바꿀 수 없었던 내 인생을 뿌듯한 기쁨을 주었기에 물질적인 부자가 아니지라도 마음은 부자이기에 아마도 다시 선택할지도 모른다.....

 

방학 때는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교원 대상 직무 연수에서 내가 졸업한 대학원 체육과에서 몇 주간 에어로빅댄스 강의도 맡았다.

난 헬스클럽 경영, 국내 에어로빅 심판, 교육생 교육, 대학교 강의, 지역 특강 봉사 그리고 우리 집 살림까지 모두를 합치면 나 혼자 일인 몇 역할인지 모를 지경이지만, 아무튼 그때는 열심히 살았다. 

 

 

그 사이 호주 유학 간 셋째 딸은 일 년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복학하였으나 아들은 그곳에 남아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우린 남의 집 월세살이 어려운 상태에서 흡족하지 못한 돈으로 그간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준 부모에게 딸은 감사하게 생각해 매우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왔으나, 아들은 철이 없는 것인지 공부 성과는 전연 없었지만, 누나가 떠난 후에 홀로 부족한 돈으로 외국에서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은 많이 터득되었는지, 이다음 한국에 돌아왔어도 아주 적은 돈이라도 가리지 않고 생존하는 정신력 하나는 확실히 잘 배우고 온 것 같았다. 

셋째 딸 역시도 호주에서 동생과 부족한 생활비로 어렵게 지내다 보니 한국에만 살았던 두 딸과 확실히 비교될 만큼 생활력은 역시나 다른 것 같았다.

서울 자취 생활에서 언니와 서로 영어 대화를 나누면서 영어 훈련을 쌓았으며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며 인터넷 대화로 여러 나라 외국인들과 계속 시도하였다. 

 

 

 

어쨌거나, 딸이 호주를 다년 온 것에 또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긴 것 같았다.

인생에는 롤러코스터가 있듯이 우린 예전 한때는 매우 부유하게 잘살다가도 어느 날 우리 집 경제가 폭삭 망하고 그 일로 남편마저 잇따라 집을 나가고 소식마저 없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이었다. 

그 당시 가장 싼 방을 구하느라 화장실조차 없는 매우 허름하고 아주 초라한 단칸 월세방에서 살았다. 

하필이면 그 시기가 우리 아이들 4명 중의 3명이 모두 대학생 시절이니 나 혼자서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서 생활비 마련과 3명의 대학교 학비, 더구나 두 딸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서울에 보내야 하는 매달 생활비 마련은 나에게 너무나 힘든 큰 시련에서 하마터면 아이들 대학교도 포기할 뻔도 하였다.

 

그때 난 지푸라기조차 잡을 것 없는 진흙 늪 한가운데 빠진 것 같았고, 혹은 앞이 도저히 안 보이는 캄캄한 터널 안에 있어서 곧,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서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감에서 매일 초조한 심정으로 살았다. 
내 주변 친인척 가족들조차도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 3명에다 더구나 두 딸 서울 유학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사치라며 단호하게 나를 비난을 하였다. 

그 당시 버팀목이 되어준 내 나름의 철학 힘으로 그 시기를 버티게 해 주었다.

 "앞날이란 예측 못 하는 인생사야! 돈, 명예, 권력, 그런 것은 영원한 내 것이 될 수 없는 일시적인 바람 속에 먼지가 될 수 있으나, 자식 머릿속에 든 지식은 먼지가 될 수 없는 영원할 수 있어! 난 어떻게든 이 고비를 견디어 절대로 우리 아이들 대학교 포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말과 달리 현실은 차가운 살얼음판에 서 있어 난 늘 조마조마하게 한 달을 겨우 해결해 살아야 했었고 누구에게도 하소연은커녕 속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

남들 앞에서는 항상 명랑해 헬스클럽 회원들은 내가 늘 행복한 줄 알 것이고, 교육생 제자들도 당당한  내 모습에서 자존감이 매우 높은 선생처럼 보였을 것이다. 

애타고 새까맣게 탄 내 속내 심정은 오직 부처님 앞에서만 엎드려 내 간절하고 진심 어린 기도를 털어놓을 뿐이었다.  

그런 기도가 헛되지 않았는지? 아슬아슬한 학비 낼 고비마다 에어로빅 교육생들이 들어와 목돈의 힘이 되어주었고, 또한 한꺼번에 대학생 3명의 학기 등록비, 서울의 생활비, 헬스클럽 월세, 우리 집 월세. 기타 경영비가 같은 날에 모두를 지불해야 할날도 있었다.

무척이나 부족한 비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매우 고민에 쌓였을 때. 부탁한 적도 없었던 친구가 내가 어려운 것에 미리 알고 말없이 내밀어 준 매우 큰 돈을 차용증 한 장 없이 도와줘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그런 고비를 잘 버틴 후에 남편이 돌아와 비로소 화장실조차 없는 좁은 단칸 월세방에서 작은 상가 3층의 단독 주택 월셋집으로 옮기면서 조금씩 회복도 되었고 친구의 빚도 갚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남편이 책임지고 3명의 대학교 학비, 서울에 보내야 할 생활비 등등 맡아주어 겨우 난 한숨을 돌렸을 때쯤에 이번에는 셋째 딸 바램의 호주 어학연수 결정이 발생되어 우리의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보낼 수준이 아니었다.

"앞날이란 예측 못 하는 우리 인생사야!"

또 어떤 변화가 미래에 올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남의 집 월세살이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결정이지만, 공부는 때가 있을 때 해야 한다며 그것만이 우리가 자식에게 줄 진정한 유산이 될 것이라는 내 나름의 철학 버팀목을 한 번 더 믿어 보자면 셋째 딸과 아들을 호주 유학을 또 보낸 것이다.

부족한 생활비를 보냈지만, 그 과정에서 셋째 딸과 아들은 유난히 생활력이 더 강해진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절망의 시기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니 어둡고 깜깜한 터널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둘째 딸은 신촌 E 여대를 졸업하고 아나운서 아카데미 수료까지 마쳤으나 대구 지역 발음에 실패하고 서울에서 외국인 회사에 취업하였고, 뒤이어 셋째 딸도 흑석동 J 대학교 졸업하고 서울 소공동 대형 호텔에 취업하였다. 
두 딸은 대학교 시절 매우 열심히 공부한 영어가 득이 되어서 취업한 것 같았다. 
첫째 딸도 대학원 학자금을 스스로 마련해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00시 시청 청소년 상담실 소장으로 발령받아 그곳으로 떠났고, 공부도 다시 박사과정으로 들어갔다. 
난 비로소 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내 계산과 어긋난 것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우리 아이들 대학교 학비와 서울에 보낸 생활비, 유학비 돈은 앞으로 몽땅 저축될 줄만 알았는데 하지만, 수학 공식처럼 그렇게 절대로 되지 않았다.

 

 

인생의 연극은 1막이 내리면, 곧이어 또 다른 인생의 연극 막이 올라가면서 새로 또 시작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