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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84화) 열두 번째 상가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0. 10. 16. 07:46

 

 

(84화) 열두 번째 상가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이전에 내가 부러워한 공인 에어로빅 심판이 되고자 그토록 노력해 막상 꿈은 이루어졌으나 실제로 해보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 바로 알게 되었다.

첫 심판이라 최고조 긴장 상태에서 기색 역력한 표정이 되어 조금이라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한 경기가 끝날 때마다 점수를 동시에 제출해야 하는데 각각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은 같은 분야를 맡은 다른 3명 심판들과 점수와 근사치에서 벗어나 혼자 엉뚱한 점수를 내놓으면 심판 자질에 문제점이 바로 찍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종일 지속한 경기에서 잠시라도 긴장 풀 수 없는 계속된 상태에서 체내 당이 매우 딸리면서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용의 입에서 불을 내뿜는 것을 보았는데, 난 당이 딸리면서 내 입에는 시궁창 냄새를 내뿜어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나 고생하면서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다고 했으나 주심으로부터 같은 분야 심판들과 다른 점수 때문에 두세 차례나 지적 항의를 받았다.

주심의 눈빛에는 처음 보는 심판이라 이번은 용서하겠지만, 만약 다음에도 이러면 곧바로 심판 자격 미달로 잘릴 수있다는 의미심장한 표정의 느낌을 받았다.

 

 

그날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완전 녹초 되어 집에 돌아와서는 양쪽 어깨가 몹시 뭉쳐 몇 날 며칠 몸살 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으니 두 번 다시는 미숙한 심판으로 주심에게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시간이 날 때마다 세계 챔피언의 경기 비디오를 보면서 점수 학습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그것이 큰 도움이 되어 인정 받음으로 다음 경기 때부터 고정 심판이 되었다.

경기마다 여러 장소에서 심판을 보면서 경력도 많이 쌓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 체육과에서 뽑는 스포츠 에어로빅 전공 특기생 전국 대회는 치열한 막상막하 실력에서 뽑는 것에 입시생에게는 가장 예민한 시합이라 나 역시도 최고의 초긴장된 부담감으로 보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이럴 때는 가끔 나의 에어로빅 인연을 돌아보게 되는데 "세상은 정말 앞날이란 알 수 없다"는 생각 들 때가 많았다.

내가 이렇게 살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전의 내 인생에서 여고를 졸업하자마자 남편을 만나 어린 나이에 약혼, 결혼하고 3명의 아이로 임신, 출산, 육아를 반복하며 10년간 계속하다 보니 여자 나이에서 가장 예쁘게 꾸밀 20대에 미니 원피스는 상상도 못 하고 항상 펑퍼짐한 임신복만 입었던 기억뿐이다.

그런 날만 계속된 어느 날에 부산 친정에 갔다가 우연히 이종 언니 따라서 어느 점쟁이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점쟁이가 그 당시 언니의 문제점을 잘 알아맞히는 것에 난 매우 신기해서 호기심으로 나의 궁금증도 묻게 되었다.

<전 아이들이 많아서 이제는 모든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고요. 다른 것은 궁금하지 않지만, 남편의 시집살이가 애들보다 더 힘들어요. 저는 언제쯤이면 남편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여태 점쟁이 생활에서 이런 점을 묻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완전 엉뚱한 반전 말을 나에게 하였다.
< 네 인생은 앞으로 학생으로 살거나, 선생으로 살거나, 또다시 되풀이되면서 선생에서 학생으로 평생 그렇게 살 게 될 거야>
<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종 언니와 난 완전한 엉터리 점쟁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열을 내었다.

별난 남편 시중에다 3명의 어린 딸 육아를 혼자 돌보는 이 와중에다 지금 넷째 아들 임신 중이라 앞으로 4명의 아이 육아에 매달려야 하는데 이게 말이 될 소리인가??

< 아주 엉터리 점쟁이야! 다른 것보다도 난 공부라면 학교 다닐 적에도 통 취미가 없어 저만치 도망친 나였고, 지금은 결혼한 상태에서 3명의 아이와 더구나 지금 넷째 임신 중이니 앞으로 힘든 일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내가 무슨 학생, 선생이 된다는 거야. 지금도 집 대문 밖에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날 감시하는 남편은 또 어쩌라고~ 나 참~ 생각할수록 정말 어처구니없고 형편없는 아주 많이 웃기는 엉터리 점쟁이야!>

 

(이 시기는 여섯 번째 이야기 아파트 살 적에 50화 ~ 참조)

 

그 당시는 유별난 남편의 구속상태에서 3명의 육아에다 더구나 넷째 임신했을 때라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 소리 점쟁이 말에 너무나도 기가 막혀 헛웃음을 치면 흥분하니 이종 언니도 내 사정을 잘 알고 있어 맞장구를 치면서 그랬다.

< 내가 생각해도 이것 진짜로 아니다!>

 

(그때는 너무 터무니없어 무시한 일이 그 후로 내 인생에서는 공부와 선생이란 직업은 평생을 나를 따라다녔고 현재까지도 캐나다에 살면서 영어 때문에 학생 신분으로 영어 학교 다니면서 동시에 일주일에 한 번 운동 선생으로 살고 있으니...)

 

 

그 후 내 이런 운명이 시작된 동기는 막내아들 출산 후에 백일이 지났는데도 전연 체중과 배는 여전히 남아있어 누가 보면 곧, 아이를 출산할 임산부인 줄 아는 정도이었다.

불어난 체중은 건강마저 나쁜 영향을 끼쳐 심각해져서 병원 종합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진단 결과가 심장 부담이 매우 위험한 상태이니 당장 체중조절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헬스장에 일반회원으로 등록하면서 에어로빅과 첫 인연이 되었다.

그 당시 헬스장 에어로빅 선생은 서울에 가서 일일이 에어로빅 안무를 받아 오는 것에 내가 조금이라도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에 어릴 적부터 음악을 많이 들었던 감각에 오랫동안 무용한 경험도 도움이 되어 에어로빅 안무를 직접 만들어 보았는데 회원들에게 매우 인기를 받으면서 갈수록 에어로빅에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랬다가 선생님이 없는 날에는 대리 보조 선생 역할 하게 되었다.

내 구령 소리는 여고 시절 1년 넘게 합기도 한 것과 가야금 창을 배운 것도 한몫이 되어 회원들 사이에 인기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회원 중에 은행장 사모님이 이곳의 헬스클럽이 잘 되는 것에 본인도 다른 장소에서 개업하면서 나에게 정식 선생으로 도와달라는 제안받아 어쩌다가 뜻하지 않게 선생이 되면서 그것으로 시발점이 시작되었다.

 

 

공부와 인연도 처음에는 난 에어로빅 이론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는 줄 알고 무조건 댄스만 남보다 잘하면 되는 줄 무식이 용감했던 그 시절에 회원들이 궁금한 이론을 물어보면 난 알지 못해 무척 난감하였다.

그랬을 때 공부하게끔 확고하게 결심하게 된 계기는 그 당시 우리 동네 뒷동산 공원에서 일요일마다 자원봉사로 에어로빅댄스를 잠시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교단을 제공해 주신 00 전문대학 학장님께서 내 학벌이 석사 이상인 줄 착각하시고 학장님이 재직하는 그 대학교에서 에어로빅 강의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그 대학 학장님과 체육과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남들이 원해도 대학교 강의를 맡는 것은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기회는 왔을 때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내가 그 제안에 무척 반가워하실 줄 당연히 아셨지만, 난 화들짝 당황해 어쩔 줄 몰라 바로 사색이 되어 거절하였는데 그때는 차마 내 학벌이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걸 말을 못 하고 변명하듯이 말하였다.

"저를 무척 잘 봐주시어 고맙지만, 현재 에어로빅 경영에다 어린아이 4명의 육아 때문에 곤란합니다"

내 학벌에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서둘러 풀 죽은 듯이 집에 오면서 그날은 공부에 더욱더 필요성 실감을 느꼈다.

그 후부터 에어로빅 선생이면서 전연 이론도 모르면서 남들 앞에 선생인 것과 학장님 말씀처럼 인생에서 좋은 기회는 쉽게 오지 않으니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바로 잡을 줄 알아야 한다는 그 조언 말씀에 영향을 받고는 공부 필요성에 깨닫게 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난 이전까지만 해도 공부에 취미가 통 없었고 특히나 조기 결혼은 더는 공부는 아무짝 쓸모가 없다고 체념한 것인데 예측조차 못 한 이런 영향력을 받음으로 그때부터 공부는 내 인생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당시 30살에 대학 입시 학원에 등록하였다.

내 부족한 실력에 처음은 전문대학에 입학, 졸업하고 4년제 대학교로 편입 공부하였다.

4년제 대학교 편입, 졸업하고 대학원 체육과 석사 졸업장까지 취득하였다.

내 나이 20대 십 년은 4명의 아이 임신, 출산, 육아로 보냈다며, 30대 십 년은 학생 신분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동시에 에어로빅 선생을 하면서 현재까지도 이어오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에 00 전문대학교에서 강의 제안이 들어왔었다.

그 당시에 전국 각 대학교 체육과에서 스포츠 에어로빅 전국 대회 참가를 원하는 대학교가 많아지는 추세가 되면서 이 대학교에서도 같은 지역에서 대학원 체육과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한 사람 중에 대한체조협회(FIG) 스포츠 에어로빅 심판 자격증을 소유한 자를 수소문한 것인데 난 오랜 헬스장 경영한 것도 경력에 덤이 되어 나를 선택한 것이라며 그 대학에서 나를 강사로 초청하였다.

그 당시 대한체조협회(FIG) 스포츠 에어로빅 심판 심판석에는 대다수 심판이 유명 체육과 관련 교수님이 많아서 일반인 나로서는 그들을 부러워할 즘이라 그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봄 학기 개강부터 00 전문대학 체육과에서 첫 강의를 맡게 되었다.

 

 

첫 강의가 시작되는 날, 설렘과 긴장감에 한껏 기분이 고조되어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난 그들과 첫 대면에서 막 20살이 된 풋풋한 새내기 학생들 눈빛이 좋았으나 하지만, 그들은 나와 달리 다소 실망감이 보였다.

< 나도 알아요! 안다니까. 왜 다들 실망한 눈빛인지를... 나라도 이왕이면 아주 젊은 에어로빅 선생이 강의를 모두가 기대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내가 먼저 그런 솔직한 말을 하니 학생들은 잠시 당황하다가 맞는다며 웃음소리로 답변하였다.

< ㅎㅎㅎ 넵~ 맞아요! >

< 어쩌겠어요. 저를 만난 것도 다~ 여러분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여러분의 허탈한 실망감을 확~ 다 날리도록 제가 최선의 수업으로 이끌어 가게요>

 

여기서 지난 내 기억에도 어떤 교수님은 학생이 강의 시간에 잠을 자거나, 말없이 나가도 학생에게 관심이 없었고, 이름은 학과 간부 몇 명 이름만 아시면서 그 외는 " 저 끝에 학생이 말해봐" 혹은 "창가 뒤줄 세 번째 학생이 말해봐" 수업 시간을 성의 없이 시간만 대충 채우는 교수님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생각이 나서 난 학과장님에게 부탁해 학생들 사진과 이름을 복사해서 돌아와 밤새도록 이름과 사진을 대조하며 몽땅 다 외웠다.

두 번째 강의 시간에 출석부 체크를 하였는데 난 이미 그들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우고 온 상태인데 어느 학생이 본인의 이름이 아닌데 대리 출석 대답한 것이었다.

< 네 이름은 000이고, *** 학생은 교실에서 지금 안 보이는데!>

학생들은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매우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 앞으로 출석 체크에서 괜히 수고스럽게 대리 출석 대답하지 마. 난 너희들 이름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으니 절대 안 통할 거야>

그다음 시간부터는 출석 호명에 대리 대답도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학생은 출석하여도 실기 수업이 귀찮다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제대로 따라 하지 않고 뒤에 앉아 구경만 하는 학생도 있었다.

어딜 가나 교실에는 우등생과 열의 없는 학생은 있기 마련이다.

난 그런 학생들에게는 콕 찍어 절대로 호명하지 않았고 지적 호명하게 되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릴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내 과거를 보더라도 선생님 중에는 우등생만 예뻐하고 칭찬도 잘해 주면서 수업에 관심 없는 열등생 학생들에는 관심조차 없이 그대로 방치한 선생님이 떠올라 수업에 재미를 못 느끼는 학생에게 더 관심을 두면서 절대로 설렁설렁 소홀한 수업은 나로서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내 실기 수업 방식은 5명씩만 앞줄에 세우고 한 파트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맨 뒤 줄로 가게 하고 다음 줄 5명이 앞줄에 서야 하니 누구라도 앞줄 기준이 되어 뒷줄 학생들은 앞줄 학생들 실기를 따라 하는 시스템에 모두를 긴장하게 했다.

뒤에서 처져 앉아 놀기만 한 학생들도 마지못해 앞줄 기준이 돼야 하니 그럴 적에는 그의 이름을 호명해 앞으로 가능성이 크다는 칭찬과 더불어 관심으로 감싸주니 그들도 내 칭찬 수업에 차츰 취미와 흥미를 붙였다.

 

점심시간도 난 학생 식당에서 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면서 사적 대화도 많이 나누도록 노력하였다.

이것도 또한, 내가 31살 전문 대학 다녔을 때 학과 친구들과 점심시간마다 그들의 틈에 휩싸여서 그 나이에 가지고 있는 그들의 고민과 생각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그 경험은 학생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지 알기에 큰 장점도 되었다.

 

학기 말이 되면 교수들도 학생 평가 점수를 올리지만, 학생들 역시도 학교 인터넷에서 교수 평가를 하는데 내가 노력한 만큼 학교 내 최고 평가를 받았는데 그런 점에 학과장님도 매우 만족하셨다.

어느 날 학과장님이 강사는 돈이 안 되니 좀 더 공부하시어 박사학위를 취득하시면 앞으로 조교수, 정교수도 될 수 있다면 나에게 조언을 하셨다.

난 완강히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하였다.

< 석사 학위 졸업 논문 때 많이 고생한 경험도 있어 더는 공부에 욕심 없이 이 정도에서 지금처럼 학생들과 재미있게 어울리는 것을 충분히 만족합니다>

또한, 내가 소속된 서울 00 에어로빅 협회장님도 나에게 조언을 하셨다.

<이왕에 시작한 대한체조협회(FIG) 스포츠 에어로빅 국내 심판에서 이제는 국제 심판 시험을 한 번 시도하시죠?>

난 그때도 완강히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하였다.

< 스포츠 에어로빅 심판 시험을 준비할 적에 고생한 경험도 있지만, 더는 욕심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취득한다고 하여도 외국까지 나갈 형편도 못 되면 현재 제가 맡은 일만 해도 매우 벅찹니다. 잘못 욕심을 내다가 현재 하는 일조차도 최선을 못 할 것 같아 이대로 만족하겠습니다>

현재도 에어로빅 경영, 교육생 교육과 자격증 취득 후에 취업시키는 일, 매주 에어로빅 안무 직접 만들기, 심판일로 때때로 서울도 가야하고, 대학교 강사, 그리고 4명의 우리 아이들 앞날 생각에다 집안일 등등...

이것도 매우 벅찬 현실에서 또 뭘 더 도전하라는 것이지? 지금까지는 난 멋모르고 열정 하나만 밀어붙였으나 해가 갈수록 이제 피곤이 쌓이면서 예전처럼 무모한 짓을 더는 안 할 것이라며 현재 나에게 처한 일만 충실하고 최선 다하자며 다짐하였다.

 

 

하지만, 인생에는 두 갈래 길이 생기면서 나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였는데, 또 무모한 짓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큰딸은 대학교 졸업 후 대학원에 입학하였고, 둘째 딸과 셋째 딸은 유독 영어에 깊은 관심이 많아 둘째 딸이 다니는 신촌 E 여대의 주변 Y 대학교에서 어학 연수원에서 영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였으나, 셋째 딸은 흑석동 J 대학교에 다니면서 Y 대학교 어학 연수원은 너무 멀어 호주로 어학연수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물론 돈의 여유만 있다면 자식이 택하는 공부에 무엇인들 못 하겠나 싶지만, 현재 우리 집 경제 실정에서는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우린 집도 없이 작은 남의 상가 주택 3층에서 월세로 살면서 아이들 4명 학비 마련 뒷바라지도 매우 버티기 힘 드는 판에 호주 어학연수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살이는 엇박자가 되어 우리가 부유할 적에는 아이들이 어렸고, 한참 교육비가 들 지금은 남의 집 월세살이하고 있으니....

 

어떤 부모는 돈의 여유가 있어 자식에게 사업도 차려주고, 또는 아파트와 자동차도 사 주는 부모도 있을 것이고, 결혼할 때 시가집 예단도 풍족하게 챙겨 호화 결혼식도 해주는 부모도 있을 텐데, 난 그럴 형편도 못 되지만, 이전에 큰 주택에서 매우 부유하게 잘살다가도 우리 집 경제가 폭삭 망하니 화장실조차 없는 매우 허접하고 초라한 단칸 월세방에 얼마 전에 살았다.

그래서 앞날이란 예측 못 하는 인생사라는 걸 그때 내가 겪으면서 깨달은 나름의 철학은 돈, 명예, 권력, 그런 것은 영원한 내 것이 될 수 없는 일시적인 바람 속에 먼지가 될 수 있으나 자식 머릿속에 든 지식은 영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았다.

 

우리 집 장만이 뭐가 당장 급한가? 언제라도 장만할 수 있겠지만, 이 시점에서 부모의 중요한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하더라도 공부에 투자해 주는 것만이 진정한 유산이라 생각하였다.

이쯤에서 아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이었다.

딸들은 본인들이 알아서 잘하고 있으나 아들은 그렇지 못하였고 공부에는 전연 흥미가 없었으며 오직 인터넷 게임 중독에 빠져있었다.

난 아들 태아 시절에 중절 수술로 없애려고 한 적도 있었고, 에어로빅 경영하느라 백일부터 남에게만 맡겨 고열 정기로 죽을 뻔도 하였고,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도 게임에 빠져 오락실에서 급히 건너오다가 버스 사고로 죽을 뻔한 것에 아들 생명을 덤이라 생각하며 그냥 건강하게 살아주기만 바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들 백일 후부터 에어로빅에 뛰어들면서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방치한 것 같았다.

어차피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할 바에 누나가 외국으로 나갈 때 함께 보낸다며 게임에서 벗어나 외국어라도 배울 수 있는 주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난 결국 무모한 결심 하였다.

 

<그래! 돈이란 있다가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으니, 앞날이란 어떤 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공부는 때가 있을 때, 해야만 해!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냥 한 번 밀어붙여 보는 거야!>

큰딸은 대학원 학자금을 스스로 마련하느라 임시 유치원 취업도 했으나 아무튼, 남의 집 월세살이하면서 서울에서 유학하는 둘째 딸과 셋째딸과 아들을 호주 유학 보낸다면 모든 사람은 나를 허영에 미친 짓을 한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 미친 짓을 저지이고 놓고 그다음은 다음으로 생각하자며 셋째 딸과 아들은 호주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 이때 결심한 계기는 이다음에 내가 캐나다에 살 게 된 밑거름되었다)

 

 

어느 날 우리 헬스클럽에 캐나다인 젊은 여성 영어 선생님들이 한 달 사이에 3명이 등록하였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한국에 처음 왔었고 여성 전용 헬스클럽이라는 것에 마음이 들어 다른 날짜에 각각 등록하였다.

에어로빅 경영에서 생전 처음으로 캐나다인 회원을 등록 받았으나 그들은 한국어를 전연 못 하였고, 난 영어 대화를 전연 할 수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난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