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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85화) 열두 번째 상가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0. 11. 1. 15:52

 

 


(85화) 열두 번째 상가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헬스클럽에 캐네디언 3명이 등록 후부터 가장 난감한 것은 영어로 어떻게 대화를 할 것인가?

요즘은 우리나라에 많은 외국인이 입국해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겠으나, 그 시절만 해도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백인들 모습이 흔치 않은 시절이라 우리 헬스클럽에 캐네디언 3명이나 등록을 했으니 회원들이 매우 신기해 흥미롭게 그들을 보았다.

 

영어 회화도 그랬다.

요즘 영어 회화를 잘하는 학생도 많지만, 그 당시 우리 헬스장에는 젊은 대학생들도 많았지만, 다들 입시 이론 위주 공부만 한 탓인지 실제로 외국인 앞에서는 간단한 짧은 대화조차도 다들 꺼리며 피하는 눈치이었다.

나 역시도 영어 대화는 한마디도 못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헬스장 주인이란 이유로 내가 상대해야 하니 그저 눈치로 대충 지레짐작하였다.

영어 번역기 없었던 그 시절에 내 손발 대화는 서로 뜻 전달이 달라져 동문서답으로 한 적도 많았다.

그들 세 명 중에 A 성격은 매우 밝고 궁금증이 많아 나와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B와 C는 성격이 매우 소심해 경계심조차도 많아서 그저 조용히 헬스 기계 운동만 열심히 하다가 가는 편이었다.

 

어느 날 A가 나와 대화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본인 학원에서 가르치는 영어 교재를 가져와서 나에게 조건 없이 영어 개인 과외를 하겠다는 것이다.

난 학창 시절에도 죽어라 하기 싫었던 공부였는데 결혼 후, 헬스클럽 경영하면서 어쩌다가 십 년 힘들게 학교에 다녔다.

이제 끝났다며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공부로 절대 고생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캐나다인 3명 회원이 등록하면서 이번에는 A가 영어 교재를 들고 와서 지금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하자고 그런다.

내 일상도 벅차 죽을 지경이라 앞으로는 현재 내가 맡은 일 외는 절대로 안 하며 정말 쉬고 싶었다.

 

외국어라며 이번뿐만 아니었다.

이전 시아버지께서 일본교포 분이라 일본어로 또 고생한 적도 있었다.

시부모님은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 사셨고 두 분은 일본에서 만나 결혼하셨는데 두 아들을 낳으시고 세 번째 울 남편 임신 중에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하지만, 오랜 일본 생활에서 한국 생활을 적응 못 하신 시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셨고 시어머니는 어린 두 아들과 울 남편 출산이 가까운 임신부 상태로 그 시절 비행기도 아닌 장시간이 걸리는 옛날 여객선을 탈 수 없어 한국에 남아셨다고 하셨다.

시아버지께서 일본으로 먼저 건너가 새로 자리가 잡힐 때까지 울 남편 출산 후에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6. 25사변이 발생하여 혼란한 시기를 맞이하면서 두 분은 소식이 완전히 끊겨버려 일본과 한국에서 이산가족으로 사셨다.

 

한 분 형은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남편은 태어나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체 홀어머니 밑에서 두 형제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고 하였다.

남편 군대 시절에 시아버지와 이산가족 상봉이 비로소 이루어지면서 그때부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난 그 이후에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다.

시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환갑 때까지 일본에서만 사시어 평소 한국어를 하셨는데, 어느 날은 난 무엇을 잘못해 시아버지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처음은 한국어로 하실 때는 난 알아들을 수 있으니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렸지만, 다음은 급한 성격으로 한국어 단어가 빨리 생각 안 나시는지 갑자기 일본어로 "와따시와 ~ &#$%^&^ 울라~울라~ … 하셨다.

난 당최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들으니 자연히 서러운 감정 눈물도 말라버리며 멀뚱해졌다.

시아버지께서 시어머니에게 통역하라며, 시어머니께서 나에게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셨다.

" 네 아버지 말은 다음부터 네가 그러지 말라는 뜻이다"

" 예~"

시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며 "내가 5분 이상 한 말을 왜 그것뿐 있느냐?"

시어머니는 " 당신 말이 너무 급하게 해버려 입력이 안 되었어..."

그러시다가 두 분은 말다툼으로 이어져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로 계속하셨다.

 

그리고 일본어는 시아버지께서 한국으로 귀화하신 후, 한 번씩 일본 친구분들이 시아버지 만나러 한국을 방문하면 시가가 아닌 우리 집에서 며칠씩 묵고 가셨다.

우리 집에서 며칠 지낼 동안과 또는 시아버지께서 바쁘셔 친구분이 일본에 가져갈 선물이 필요하다며 백화점 쇼핑에 내가 안내해야 할 적은 그때도 일본어로 무척 난감했었다.

그 친구분이 가시면 또 다른 일본인 분이 우리 집에 오시니 몇 차례나 그런 일을 겪었다.

그때는 일본어로 내 손발이 고생했는데 지금은 3명의 캐나다인에게 둘러싸여 영어로 다시 손발이 무척 고생하는 중이다.

 

( 현재도 캐나다 살면서 영어는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한쪽 귀로 바로 통과해 나가서, 난 아직도 영어 앓이를 하고 있다)

 

하루는 A가 자기네 집으로 저녁 초대하였다.

초대받아 갔는데 캐나다인 그녀의 남편이 저녁 음식을 만들고 있었으며, 그녀의 남편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A 남편도 영어 선생님으로 부부가 함께 한국에 처음 온 것이라 하며 식사하는 동안에도 한국에 대해서 이런저런 궁금증을 묻는 것이었다.

영어는 한 명도 대하기 힘든 판에 부부가 합세해 영어로 질문하니 저녁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내가 영어 대화가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영어 선생님들이라서 그런지 영어를 몰라도 조금도 신경 쓰지 말라며 천천히 시도해 주는 것 같았다.

그들의 저녁 초대가 고마워 이번에는 내가 한정식 식당으로 초대하였는데 식당 점원들은 백인 두 명과 함께 들어오니 내가 영어를 잘하는 줄 아는지 선망의 눈으로 보았다.

그다음은 그들이 맥줏집으로 날 초대하였고, 다시 내가 그들과 맥줏집으로 오가며 영어 대화는 서툴고 거북해도 나름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 그때 그들이 캐나다에 관련된 그림을 자주 보여줬는데 이다음에 내가 캐나다 살 운명인지 왠지 캐나다가 매우 좋아 보였고 친숙함도 느꼈다)

 


A가 한국 절에 대해서 매우 호감이 많다고 해서 내가 다니는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곳까지 내가 운전해 다녀오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둘만 있어야 할 텐데, 영어 부담을 어쩌나? 걱정되었다.

특히나 A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매우 궁금증도 많아 자동차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한국 가을 시골이 예쁜지 운전하기에 바쁜 나에게 쉴 새 없이 영어로 말을 걸어 영어 답변을 몰라 멘봉 상태에 전전긍긍하였다.
사리암 절은 경사가 있어 약 40분간 산에 올라가니 그녀는 힘들다며 어디에서 쉬고 싶다고 하였다.

우린 여성 신자의 휴식 공간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시절에 사뭇 다른 백인 여성이 방에 들어서니 많은 신자분은 화들짝 놀라는 눈빛으로 매우 신기하듯이 쳐다보았다.

뜨뜻 뜨뜻한 한국 온돌방 첫 경험에 그녀는 감탄하며 또 궁금증이 발동하는지 어떤 원리인지 물어보아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영어로 내 나름 설명하였다.

한 방에서 우리 대화를 지켜보는 나이 드신 분들이 나에게 감탄하는 눈빛으로 그런다.

" 에이고 어쩜 그렇게 영어를 잘해요! 오죽 잘하며 미국 여자와 단둘이서 여행도 다녀요?"

" 그러게요. 영어 잘하는 사람들 보면 난 제일 부럽더라"

여기저기서 날 부러워하며 추겨주는 한마디씩 말에 A가 한국어를 몰라서 천만다행이지! 그리고 신자 중에서 영어를 아는 사람 없는 것도 천만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이다음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는 백인에 대한 울렁증이 덜 해 영어는 못해도 무식이 용감해져 도움이 되었다 )

 

절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A가 걱정하는 그녀 남편에게 전화해야 하는데 그 시절에는 산에서 휴대폰이 잘 터지지 않아 어느 식당 공중전화에서 하였다.

그곳에서 약 20분가량? 운전해 왔을 때 그녀가 깜짝 놀라며 전화박스 옆에 지갑을 두고 왔다고 그런다.

나 역시도 깜짝 놀라서 자동차를 돌려 그곳에 갔는데 다행히 지갑이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한국 국민성에 높은 평가 하며 감동하였는데, 나 역시도 속으로 그대로 있어서 무척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우리 헬스장에서 이번 시즌에 열리는 전국 에어로빅 대회에 참가하고자 난 회원들에게 열심히 연습시키고 있었는데 외국인 그들이 무척 흥미로운 눈빛으로 우릴 지켜보았다.

난 그들에게 이번 대회에 함께 참여하자고 넌지시 권유하였더니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다음 날에 이것도 한국에서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며 허락해 우리 회원들과 합류해 연습하였다.

우리 회원들도 캐나다인과 함께 호흡 맞추며 단체전 연습하다 보니 처음에는 말도 못 걸다가 연습을 함께 하는 동안 조금 더 친숙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대회 참가하느라 관광버스 대절하여 아침 일찍 서울로 출발하였다.

예전은 하루 전날 서울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도 있었으나 여러 가지 경비와 여건이 쉽지 않아 다음부터는 당일 일정으로 바꾸었다.

새벽에 출발해야 하니 아침 식사는 가는 길에 고속도로 주변 호젓한 곳에서 미리 주문해 마련된 뜨거운 시래깃국에다 밥을 말아서 김치와 밑반찬으로 우리는 맛있게 먹었으나 그들은 우리가 먹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지 그냥 김밥과 송편만 먹겠다고 하였다.

 

서울 대회장에서는 외국 백인 여성들 참가자가 섞여있는 특별한 우리 팀에 몹시 궁금한지 호기심 눈으로 신기하게 보았다.

 

 

우린 매우 좋은 성적을 받아 쥐고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출발이 늦어지자 관광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는 매우 기분이 언짢은지 아주 심한 속도를 내면서 난폭 운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도 겁났지만, 캐나다는 안전을 최고로 제일 중요시 하는 나라에서 온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손잡이를 잔뜩 움켜잡고 창백한 얼굴로 혼비백산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난 기사 아저씨에게 시간이 연체된 것에 요금과 팁도 더 드릴 테니 제발 외국인들도 있는데 난폭 운전은 삼가 달라고 곱게 달래도 보았으나, 무슨 재미를 느낀 것인지? 아니면 기사 아저씨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한 사람인지? 잠시 진정하다가도 또 속력 내면서 신들린 듯이 광포해지면 운전으로 본인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았다.

난 다음 날 관광버스 회사에 전화해 어제 매우 끔찍하고 험악한 공포 운전에 항의하였으나 요즘처럼 휴대폰 증거 동영상 촬영할 수 없었든 그 시절 관광버스 회사는 죄송하다며 조처하겠다는 것은 말뿐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난폭 공포 운전에 얼마나 놀랐을까?

정말로 미안해 대신 사과하였으나 그날 험악한 운전 쇼크에 큰 충격 받았는지 그날 이후로 모두가 헬스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만 해도 더는 나오지 않은 A 집에 내가 무작정 찾아가 다시 사과하는 것이 몹시 어색하고 머뭇거리다가 시간이 흘러버려서 그 후로 그들과 인연도 끝나고 말았다.

 

 


내가 강의하는 대학교에서 전국 대학생 대회에 참가를 원하면서 연습 준비해 달라며 학과장님이 요구하였다.

하지만, 학생 중에는 수영, 태권도, 격투기, 합기도 등등 여러 유단자 특기생들이 섞여 있는 체육과 남학생 중에는 에어로빅댄스에 별 관심이 없다며 연습을 거부하는 학생들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아직도 십 대 반항심이 남아있는 19~20살 학생들을 어떻게 억지로 연습 시켜 전국 대학생 대회에 출전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다행히 나를 잘 따르는 군대 다녀온 복학생들이 그들을 제압? 해 줘 도움이 되었다.

 

서울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전국 대학생 대회는 여태까지 대회 전통을 이어온 서울 유명 체육과 학생들에게 우리가 바로 우승컵을 쥘 수는 없었지만, 처음 출전하면서 최선을 다해 준 우리 학생들이 고마웠고, 대회에 따라오신 체육 학과장님도 그간 연습만으로 첫 출전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한 것에 만족하시며 힘껏 격려 손뼉도 쳐주셨다.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에어로빅에 급격한 관심을 가진 몇 명 남학생과 프로 야구 치어걸 내 제자들과 함께 팀을 구성해 지역 방송국 특별 행사에 몇 번이나 초대받아 퍼포먼스를 펼치는 생방송 오프닝 쇼에 나가곤 했었다.

여러 군데 참가 퍼포먼스 진행하면서 에어로빅 흥미를 느낀 남학생 제자들이 군대 갈 적에 날 찾아와 잘 다녀오겠다며 큰절을 할 적에는 큰 보람도 매우 많았다.

 

하지만, 좋은 보람만 있는 것이 아닐 때도 있었다.

내 여고 시절 교실 짝꿍으로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가 있어 동창회 참가할 적에는 그 친구 근황이 궁금하였다.

그 친구는 여고 시절 적에 집이 매우 부유해 도시락 반찬 클래스도 애당초 우리와 달라 볼 적마다 감탄하였다.

난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간 적도 많았는데 그 당시 시절에도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켜주었고, 친구 언니는 예쁜 영화배우인지라 친구 집에서 영화배우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참 신기하였다.

친구는 대학교 다닐 적에 어느 지역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 출전해 진으로 뽑힌 경력도 있었다.
(그 해는 나의 베스트 절친도 다른 지역에서 출전해 진으로 뽑혔다)

 


난 일찍 결혼하면서 부산을 떠난 후로 그 친구와 헤어지고 여태까지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어 동창회에서 그녀의 근황을 누가 아는지 물었다.

그녀는 의사와 결혼해 어느 지역에서 잘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친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부족함 없이 잘사는구나! 생각하였다.

 

어느 날 그 지역에 에어로빅 심판 일로 갔을 때, 여기 온 김에 미리 알아 온 전화번호로 통화가 연결되었는데 당연히 내 전화에 매우 반길 거로 생각하였는데 그 친구는 나와 만나길 거부하였다.

 

왜?

요즘은 맞벌이 부부도 많고, 본인의 개성 따라서 사회 활동을 많이 하여도 그때 우리들 시절만 해도 여자들은 결혼하며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 잘하는 것이 현모양처라고 하였고, 대다수가 가정주부로 살았던 시절이었다.

친구와 난 오랫동안 학교 짝꿍으로 지낼 적에는 그 친구는 우리와 달리 매우 부유한 집에서 살았고 대학교에 다니면서 지역 미인대회에서 진이 될 만큼 예쁜 미모에 그 시절 선망한 의사와 결혼하였고, 무엇이 부족해서 날 만나길 거부하는지..??

 

 


내 질문에 친구 이유는 예컨대 이랬다.

어느 날 TV 방송에서 심판하는 내 모습을 여러 번 보았고, 이전 총동창회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와서 재즈 에어로빅한 소문도 다 들어서 내 근황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그런다.

학교 다닐 적과 달리 그 후로 친구는 가정주부로 여태 살아온 반면에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나와 괜한 비교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그 이유이었다.

그때는 그런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 이후에 알게 되었다.

 


( 난 그동안 우리 아이 4명 키우면서 거의 4~5시간 이상 잘 수 없을 만큼 밤잠을 늘 설치며 부지런히 지금까지 하나씩 이루면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다음 남편이 매우 아팠던 시절에 24시간 간호하느라 지금까지 힘들게 이룬 내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버려야만 했을 때, 비로소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