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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83화) 열두 번째 상가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0. 9. 13. 11:28

 

 

(83화) 열두 번째 상가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여고 연말 총동창회에서 프로 야구 치어걸 제자들과 함께한 퍼포먼스 댄스에 관중은 기대 이상으로 기립 갈채 박수를 받게 되었다.

파티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프로그램에 없는 것을 한 번 더 제의하였다.

< 젊고 예쁜 프로 야구 치어걸들이야 우리가 이미 아는 댄스지만, 오늘은 총동창회 주제인 만큼 젊은 제자들은 제외하고 혼자 하는 솔로 댄스를 보는 것이 우리 나이에는 더 흥미롭지 않겠습니까? 자~ 맞는다고 생각하면 앙코르 손뼉을 쳐 주세요 >

이곳에 오기 전 제자들과 함께할 퍼포먼스 댄스만 연습했는데 갑자기 솔로 댄스 제안받게 되었는데 음악도 준비된 것이 없다 해도 행사장에 있는 댄스 음악 중에 하나를 찾아보라고 그런다.

재즈 에어로빅과 어울리는 음악을 그중에 발견하고 즉흥적인 내 감각대로 추게 되었다.

내 솔로 댄스에 더 많은 환호해 사회자가 칭찬과 더불어 한마디를 더 붙인다.

< 와~우~ 잘 봤어요? 이런 모습에 부럽지 않나요? 우리 나이가 되면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길 나이라서 맨날 누워서 TV만 보면서 허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당장 이 친구만큼은 될 수 없겠지만, 내일부터라도 조금씩 꾸준히 운동해 관리한다며 훨씬 더 건강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신감을 동기부여 한 친구에게 고맙다는 박수를 한 번 더 쳐 주세요>

 

여고 총동창회 연말 파티는 그렇게 잘 끝내고 난 제자들과 함께 대구로 올라왔었다.

 

 

다음 번째 부산에서 쇼핑하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여고 동창생을 졸업 후 처음 보았는데 우리 서로 알아보았다.

여자들이 흔히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잘하는 칭찬이 " 넌 어쩜 그대로야! 하나도 안 변했네" 그런 말을 잘한다.

오랜만에 만난 서먹한 여고 동기생에게 내가 그랬다.

< 넌 그때 그대로네. 하나도 안 변했어>

< 뭘~ 그동안 지나간 세월이 있는데... >

우리가 나누는 인사에 동행한 동기생 딸이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우릴 쳐다보면서 말을 하였다.

< 아줌마, 우리 엄마가 그때 그대로라며 고등학교 때도 우리 엄마가 지금처럼 늙었나요?>

우린 그 말에 한참 웃다가 내가 그랬다.

< 너도 우리 나이가 되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ㅎㅎ>

 

 

제자들을 교육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다.

대다수 젊은 나이들이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교육생도 있는데 본인이 직접 부모의 도움 없이 어렵게 교육비를 지급한 이는 눈빛부터 벌써 다르고 악착같이 열심히 배우려 한다.

그러나, 좋은 외모 조건만 믿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혹은 부모님이 교육비를 지급한 이들 중에는 건성건성 다니면서 교육 규율도 제대로 안 지키면서 잦은 지각에 변명거리만 잔뜩 늘어놓은 이, 조금만 지적해도 바로 울먹거리다가 울어버려 분위기만 다운시키는 이, 약간만 나무라도 내일부터 당장 교육 그만두겠다는 엄포놓은 이, 동작을 정확하게 배울 생각 없이 대충 얼렁뚱땅 시간만 보내는 이, 뭐가 항상 불만이 많은지 뻣뻣하고 퉁퉁 부어 대답도 제대로 안 하는 이, 그 외 기타 등등.

 

이럴 때는 내 옛날 얄개 시절이 떠올라 우리 선생님도 아마도 나에게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반성할 때도 사실 생긴다.

나의 옛날 시절로 돌이켜 보면 공부에는 손톱만큼 관심 없어도 학교는 오직 내 아지트라고 생각하고 다녔으니 공부로 한 번도 상을 받은 적은 없었으나 개근상은 잘 받았다.

선생님과 나 사이에는 늘 만화에 나오는 '톰과 제리'처럼 지냈으니 오죽하면 여고 졸업식 날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당부하셨을까?

"앞으로 길에서 날 보더라도 절대로 아는 체 말라"

그랬는데, 내가 어쩌다가 지금은 선생이 되어서, 그때 내가 한 업보를 너도 당해보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애초에 이미 다 해 본 짓거리들이라서 그들 속을 유리알을 보듯이 파악하기에 도리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1.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교육생에게는 변명 따위에는 아랑곳 듣지 않고 지각한 시간만큼 모든 교육생까지 똑같이 단체 기함으로 들어간다.

그 부담감 미안함에 다른 교육생들도 지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딱히 이유가 있을 때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사실 나도 지각 엄청나게 많이 했는데.....)

 

2. 조금만 지적해도 바로 울어버리는 교육생에게는 ,

<너 또 울 거지? 내가 바깥 베란다에 너를 위해서 특별히 의자와 휴지통도 준비해 두었으니 그 지정석에 나가서 실컷 울고 들어와. 네가 돌아올 때까지 교육 않고 우리가 기다려 줄 거니 걱정 말고 갔다 와>

그 후부터 본인도 지정석에 나간다는 것도 머쓱하고 귀찮은지 또한, 교육 않고 기다리는 부담감에 퍽 하면 울던 버릇도 점차 사라졌다.

 

3. 얼렁뚱땅 대충 넘기려는 교육생이나 선생들에게도 내 어릴 적 학교 공부도 얼렁뚱땅 대충 넘기면서 무조건 졸업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내 경험이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내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단호하게 시켰다.

특히나 에어로빅 운동 시간에 본인은 동작 않고 서서 나무 스틱만 두드리는 것도 안 되고, 무선 마이크 사용보다는 힘들어도 운동하는 회원에게 무조건 힘찬 구령으로 인도해야 하고, 회원들과 운동 동작도 쉬지 않고 함께 하면서 끝마무리까지 완수해야지 얼렁뚱땅 대충 시간만 보낸다든지, 성의 없는 느슨한 수업은 난 결코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최선의 노력 덕분에 많은 회원을 확보한 것 같았으나, 하지만 다른 곳에서 새로 온 선생들은 내 방식이 너무 힘이 든다고 그만두는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엄격하게 교육만 했어도 안 되고, 칭찬도 아끼지 않고 보다 나은 희망도 심어줘야 하고, 평소에는 편안한 친구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그들이 가진 고민거리 상담도 함께 풀면서 지냈다.

그렇게 어렵게 교육을 끝나면 에어로빅 자격증 취득 시험도 합격시켜야 하고, 좋은 취업 자리도 마련해 줘야 한다.

 

(동기생끼리 모임을 계속 유지하면서 결혼 후에는 남편과 자식들도 함께 친분을 쌓고 형제처럼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그들은 내가 한국에 살 적에는 스승의 날과 내 생일 날을 잊지 않고 항상 꽃다발과 음식 대접했으면 지금도 한국 방문 때마다 환영회도 열어주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제자들이다 )

 

 

각 에어로빅 협회마다 모두 장점이 다르다.

난 그런 점을 높이 인정하면서 우리 교육생이나 선생들에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 것만 추구하지 말고 여러 협회에서 열리는 안무 작품 회에도 참석하면서 여러 가지 넓은 안목을 받아드리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오해를 받을 때도 있었다.

대다수 다른 협회 관장님들은 자기네 교육생들을 다른 협회 참석에 가는 것을 막는 경우가 있어서 심지어 " 네 관장이 부족해서 다른 곳에 보내는 거야" 그런 말을 들으면 속이 상할 때도 있다는 교육생에게 난 그런다.

< 누구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는 거야. 그런 오만한 생각부터 먼저 버리고 많이 배워야 해. 나도 처음은 댄스만 남보다 잘하면 되는 줄 알고는, 이론도 제대로 모르면서 마구 신나게 뛰다가 무릎에 물이 생겨 고생한 후부터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회원들을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특히 외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워크숍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찾아다녀 배웠고, 그뿐만 아니라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부산 00 대학교 교수님 에어로빅 수업에 참여하느라 체육과 학생들에게 눈칫밥이 되어도 청강생으로 매주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배우려 다녔어. 결코, 배움에서는 절대 오만하면 우물 안 개구리 꼴이 되는 거야. 늘 새롭게 달라지는 에어로빅에 난 아직도 워크숍마다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있어, 물론 처음에는 모방에서 시작되겠지만, 그렇게 해서 넓게 안목을 키워서 쌓이다 보면 너 나름의 기준도 만들어지는 거야 >

 

이 말이 끝나자 다른 교육생이 평소 의문이 있었다면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제 친구가 네 선생님은 실력은 좋다면서 왜 감투가 없느냐고? 그럴 적에는 할 말이 없지만, 저도 그 점에 궁금해요>

이런 질문은 종종 받을 때가 많았다.

여기에서도 지난 내 과거 학교생활을 돌아보면 난 반장은커녕 흔한 줄반장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다른 승부욕은 강한 편이지만, 오직 공부 승부욕만은 나에게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딱, 한 번 내 중학교 시절에 담임 선생님이 어느 날 등교해 교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성적순으로 적어 붙어놓고 그 지정석에 앉으라 하셨다.

60명 한 반에 내 뒤편으로 아마도 몇 명만 있었으니 내 많은 친구 앞에서 호되게 망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날 내 자존심에 받쳐 영어, 수학은 기초가 부족해 암기 과목만이라도 해 보겠다며 밤잠과 식 은폐도 감수하면서 얼마나 파고 매달려는지 다음 시험에서 앞에서 7~8번째로 앉은 경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글자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실명 상태가 될까 봐. 우리 어머니께서 선생님에게 심하게 항의하신 후에 그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때만 잠깐이긴 했어도 열심히 해 보았지만, 그 제도가 폐지된 후 나 역시도 다시 편안한 내 원래 성적 자리로 돌아왔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그런 감투 자체를 싫어하는 것인지? 아무튼, 무조건 손사래를 치면서 거부했었다.

우리 아이들 4명을 키울 때도 학교 어머니 모임에 간다든지, 혹은 어느 단체라도 가면 나를 얼핏 보기에는 리더심도 강해 보이는지 감투 제안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난 다른 것으로 열심히 협조하겠다고 하니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운동회 안무도 나에게 맡겼고, 아이들 학교 육성회 기부금도 맡겼다.

어쨌거나 감투는 애당초 남의 옷을 입은 양 불편했는데 그렇다고 지난 내 어릴 적의 성적에 대해서 제자들은 아예 상상조차 못 할 것이라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그 후부터 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전공이라도 감투보다는 진정 그 분야의 실력자로 인정받는 것이 열 마디 말보다 낫겠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부터 스스로가 시범이 되고자 결심하였다.

예전에도 다짐은 있었지만, 그동안 복잡하게 일어난 우리 집 일로 미룬 것을 이번 기회로 용기를 내어 다시 도전한 계기가 되었다.

 

이전 서울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000 방송국 주최로 전국 에어로빅 대회에 단체팀으로 출전했을 때, 경연이 시작 전에 검정 정장 차림의 공인 심판들이 한 명씩 일어나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가 그들을 몹시 부러워서 그랬다.

(그래! 나도 스포츠 에어로빅 공인 심판 자격증을 취득해서 이다음에는 저 자리에 나도 앉자!)

 

지금은 스포츠 에어로빅이 어떻게 되었는지? 혹은 심판 자격증 취득도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매우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라서 인기도 매우 높았다.

 

그날 이후에 대한 체조협회에서 발급되는 대한체조협회(FIG) 공인 스포츠 에어로빅 심판 자격증 취득을 위해서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리게 되었다.

스포츠 에어로빅 용어가 외국에서 왔기에 영어 전문 용어도 어려움이 많았다.

(이 또한, 어릴 적에 영어 공부를 제대로 안 한 탓으로 남들보다 몇 배나 난 힘들었다)

 

스포츠 에어로빅스 대회는 4개 부문으로 열리는데 남자개인, 여자개인, 혼성 2인조, 3인조, 단체 조가 있었다.
대한체조협회(FIG) 스포츠 에어로빅 심판 자격증에는 예술심판은 안무 구성과 스포츠 에어로빅스 내용, 표현, 쇼맨십과 타이밍 등등을 보아야 하고, 실시심판은 기술적인 숙련도와 혼성팀의 경우에는 일치성과 정확성 등등을 보아야 하고, 난도심판은 난도에서 감점을 찾아내는 것이며, 라인 심판은 네 군데 모서리의 두 곳에 대각선으로 위치한 라인에 체크하며 그 외 시간 타임과 주심으로 구성된 총 14명의 심판이 한 경기에 맡게 된다.

 

시험 준비 연습용 비디오로 세계 스포츠 에어로빅 챔피언들의 펼치는 것을 보면서 예술, 실시, 난도 여러 방면을 각각 나누어 보면서 점수를 매겨야 한다.

그 당시 화면은 요즘처럼 대형 TV도 아니고, 성능도 안 좋아, 더구나 비디오마저도 해외에서 들어올 때 복사된 것을 또 복사된 화면이라 선명하지 못한 흐린 화면으로 세계 스포츠 에어로빅 챔피언들이 펼치는 장면을 보자니 얼마나 빠르게 휙~ 지나가는지 제대로 본 것도 없는데 벌써 끝나버려 저절로 깊은 한숨만 새어 나왔다.

 

그렇다고 종일 비디오만 쳐다볼 처지도 아니라서, 내 일상생활은 아침부터 헬스클럽 경영부터 교육생들 교육, 집안일까지 하면 하루가 턱없이 부족해 남는 시간은 밤잠을 안 자야 한다.

매일 이론 공부와 비디오 실기 공부로 수없이 화면을 보고 또 보니 내가 곧, TV 화면에 빨려 들어갈 만큼 눈도 매우 시려 눈알이 빠질 듯이 아팠고, 또한, 그것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잔 내 눈은 늘 충혈되어 무척 피곤함이 누적되면서 어지럼증도 발생하였다.

<내가 구태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몇 번이고 나 자신에게 이런 반문도 하면서 힘들어 포기하고픈 마음도 생겼지만, 이미 나와의 약속에 꼭 지켜 해내고 말 것이라 다짐하였기에 하루하루를 버텼다.

 

 

드디어 시험 치르는 날 되어 서울에 갔었다.

전국 많은 응시생 중에는 체육과 졸업생, 재학생들, 에어로빅과 관계되는 여러 협회장, 난 그동안 고생한 것을 헛되지 않게 이론시험과 특히 비디오 실기 시험에서는 정신을 총집중해서 시험을 치렀다.

 

고생한 보람으로 대한체조협회(FIG) 공인 스포츠 에어로빅 심판 자격 합격증을 받았을 때는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 몹시 힘들어도 포기 않고 잘 견디어 낸 나 자신에게도 다독거려 주었다.

제자들에게도 누구든지 나이와 상관없이 그 분야에서 포기 않고 도전한다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였다.

 

 

합격증 있다고 무조건 스포츠 에어로빅 챔피언 대회마다 심판석에 앉을 수는 없다.

한 경기마다 14명 심판석에는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유명 체육과 에어로빅 관계 대학교수님들이 차지하고 일반인은 전국에서 겨우 몇 명만 부여되었다.

내가 귀속된 서울 00 에어로빅 협회에서는 이 자격증을 소유한 사람은 나뿐이라 우리 협회장님의 강력 추천으로 어렵게 000 방송국 생방송 하는 서울 잠실 올림픽 체조장에서 열리는 전국 스포츠 에어로빅 챔피언 대회에 사전 교육을 받고 첫 심판석에 앉게 되었다.

 

이전 내가 희망한 검정 정장을 입고 심판석에서 공인 심판 위원들이 한 명씩 일어나 인사하는 꿈이 이루어졌으나 마냥 좋은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 분야의 심판을 맡게 되면 서로 간 의논할 수 없게 각각 떨어진 다른 테이블에 앉아 정확하고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올바른 점수를 매겨서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그 분야의 4명 심판 중에 가장 높은 점수와 가장 낮은 점수를 버리고 중간 점수에서 평균이 정해진데 비슷한 점수 근사치는 괜찮아도 혼자만 다른 엉뚱한 점수로 빗나간다면 생방송에서 선수 관계자, 다른 심판들 앞에 얼마나 창피할 일인가.

그뿐만 아니라 경기가 끝난 후에도 선수를 비롯한 선수 관계자, 주심에게 빗발치는 항의에 왜 그런 점수가 나왔는지 정확한 점수 이유도 밟혀야 하고, 그것으로 심판 자격 미달로 찍히면 다음부터는 앉지 못한다.

 

그렇게 어렵게 자격증을 취득해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어, 두 번 다시는 심판 기회가 오지 않을 것에 난 잔뜩 긴장된 부담감을 안고서 첫 심판석에 앉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