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좋은 음악이 날마다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든다

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79화) 열한 번째 월세 단칸방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0. 1. 3. 14:31


(79화) 열한 번째 월세 단칸방에서 생긴 이야기


오늘 절에서 올린 내 간절한 기도가 정말 남편에게 통한 것일까? 놀랍게도 늦은 밤 남편 전화 음성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면서 온몸에 소름 돋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나 기다린 남편 전화 거만, 살아있으면서 왜 여태 소식이 없었느냐? 우리가 얼마나 걱정하며 살았는지 아느냐. 건강은 괜찮냐? 식사는 제대로 하면서 살았느냐? 야속한 무소식에 서러움으로 울 것만 같았는데 하지만,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거만, 말문이 꽉 막혀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정말 당신이에요…?>

<나야…>

< 거기가 어디예요…?>

<서울… 아이들은 괜찮아…?>

내 걱정은 묻지 않느냐고 투정하고픈 것도 생각일 뿐, 도대체 말이 막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당신은… 괜찮아요…?>

< 난, 괜찮아…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고 당신이 서울 올래…?>

내일 당장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약속 시간을 정하고 서둘러 에어로빅 수업은 선생들에게 맡겨 놓고 허둥지둥 다음 날 서울로 향했다.


기차 창가에서 푸른 시골 배경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큰 스님이 들려준 전생이란 단어가 떠오르면서 누군가가 생각이 난다.

나의 시간 여행자 필름은 되감아 어느 과거 시점 달리는 기차 속으로 내 친구들과 대학 시험을 치르고자 서울로 향하는 그때가 비추어진다.

서울역에 마중 나온 그는 나를 발견하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 쏜살같이 달려와 환희의 얼굴로 두 팔 벌려서 한호성과 더불어 나를 안아 360도 돌리면 날 반겨준 장면과 다음날 서울역에서 작별의 아쉬움으로 그는 끝내 떠나는 위험한 기차에 뛰어올랐고 우린 추운 기차 마지막 뒤 칸 밖에 앉아 그때도 이런 시골 마을을 보면서 나에게 팝송에 얽힌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는데…

그날 입장권 한 장으로 부산역까지 나를 배웅해 주고는 바로 되돌아간 여러 가지 장면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물밀 듯이 빨리 스쳐 지나간다.


그다음, 그가 군대 입대 며칠 앞두고 나를 만나러 왔을 때 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이미 2주일 전에 약혼했다고 첫사랑에게 지독한 큰 상처를 주었다.

그 나이에는 난 철이 없었고 나이가 들어서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 줄 알게 되었다.

큰 스님이 들려준 전생이 정말로 있다면… 혹시나 이 마저도 다음 후생에서 또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런 무서운 두려움이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나를 억압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남편과 엮인 전생의 인연으로 현생에서 충분히 고통을 받는 데…


(신이여~  더는 어떤 한 인연도 앞으로 저와 엮인 지 않게 해 주소서~)

 

서울역에 도착하였고 남편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반겼으나 난 남편의 차림새부터 살펴보았다.

혹시나 그동안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식사는 제대로 하면서 살았을까? 이런저런 노파심으로 위아래 상태를 훑어보았으나, 내 예상과 달리 변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안심되었다.

그는 매우 나를 반기며 내 손을 얼른 꼭 잡고는 서울역에서 빠져나와 성남으로 가는 버스를 태웠다.

버스 속에서도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으나, 난 여러 가지 궁금증이 많았지만, 버스 안에서는 간신히 꾹, 참고 우린 성남 분당에 도착하였다.

그의 숙소는 분당 번화가 백화점 빌딩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밥은 굶지 않았을까? 그런 걱정 하며 여태 살아왔는데 남편이 사는 고급 오피스텔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실, 깨끗한 거실, 침대. 고급 싱크대를 보는 순간 내 감정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동안 우리는 아주 싼 월세 단칸방을 구해야 하니 욕실은커녕 화장실도 없고, 싱크대는커녕 흔한 타일조차 없는, 아주 옛날식 시멘트 부뚜막에 시멘트 바닥의 부엌에서 여태 밥해 먹고 살아왔는데 그는 우리와 비교해 매우 고급스러운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는 것에 분노가 부글부글 뒤엉켜 참을 수 없었다.

<그간 고생 많았지?>

남편은 나에게 미안하고 머쓱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난 그의 손을 확 단호하게 뿌리치고는 내 감정을 간신히 누르고 낮은 음성톤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에서 살았어요?>

<처음부터 여기서 산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허접한 월세 여관에서 살다가 이곳 분당으로 옮겨와 월세 여관방 생활에 이것저것 허드렛일 알바 생활하면서 조금씩 모은 소액으로 증권 객장에 나오게 되었어. 증권은 내가 아는 분야라서 매일 객장에서 홀로 증권 시세도 분석하면서 처음에는 소액으로 시작했으나 어떻게 운이 좋아서 투자액이 불어나 증권회사 객장이 있는 이 빌딩으로 얼마전 월세로 이사 오게 되었어>

<왜 그동안 연락을 안 했어요?>

<내가 그 지경 사태로 만들고 집을 나왔는데 어떻게 빈손으로는 연락하겠어. 그리고 만약 네가 내 거처를 안다면 너 성격에 거짓말을 못 해서 그들에게 날마다 고통 대상이 될까 봐! 참은 거야. 고3 수험생 딸을 대학 시험을 앞두고 나온 것이 가장 마음의 가시가 되었는데 궁금해서 셋째 아이 고등학교 교무실에 전화해 알아보니 서울의 00 대학교 합격했다는 소식에 딸이 너무 고마워 그간 마음의 빚 가시를 빼내는 기분이었어 >

< 그런 것도 알아봤다면 현재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있잖아요>

<대학 합격 문제는 전화로 알아볼 수 있는 일이지만, 도저히 빈손으로 전화할 수 없었어. 어느 정도 내 손에 돈을 쥐어야 용기도 생기지…>

<그럼, 지금은 전화할 수 있는 상태라서 전화했어요?>

<아직은 아니지만, 어젯밤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에 홀린 사람인 양 이상하게 전화하고 싶어지더라고…>

백중 천도재 기도에서 내가 간절하게 기도한 것이 남편에게 텔레파시로 전달된 것인가? 그런 생각이 순간 들었다.

남편은 아직도 우리가 전원주택에 사는 줄 알고 있었다.

난 그간 있었던 자서전 77화. 78화의 사건을 남편에게 말을 하게 되었는데 정녕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산 남편은 몹시 충격을 받았는지 창가에 서서 매우 허탈한 깊은 탄식 한숨을 쉬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고 우리 사이에는 한동안 정적만 흘렸다.

.

.

< 왜 그때 전원주택이 네 소유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

< 당신이 그때는 증권 블랙홀에 한참 빠져 이성을 잃고 있었는데 그 상태에서 내 소유 집이라고 말했더라면 그 집조차 온전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그 사실만 미리 알았더라며 내가 그 돈으로 모두 해결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가족과 떨어져 외로운 타지에 살지 않았을 텐데… 피해당한 분들이 회사에서 난동 소동 부린 것처럼 우리 집으로 몰려와 가족들 앞에서 난동 칠까 봐, 더구나 집안 가장이 되어서 우리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수치 당하는 내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미리 그 사실을 알았더라며 서울에서 떠돌이 생활하지 않았을 텐데…>

비참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듯이 깊은 한탄하는 숨소리가 계속 들렸다.

.

.

< 배고프지? 내가 뭘 좀 사서 올게>

그는 먹을 것을 사 오겠다면 나간 뒤 난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었다.

자기가 벌려 놓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단칸 월세방까지 이사오게 되었는데 그리고 그동안 아이들 학비 문제를 해결하느라 마음고생과 어려운 생활고에 등이 휘도록 힘겹게 살아왔구먼, "아무튼 미안하다! 그동안 고생했다!" 그렇게 도닥거리지 못 할만 정, 얼토당토않게 말하지 않았다며 원망하는 말투 같아서 화가 은근히 나기 시작했다.


평소에 남편은 집에서는 통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의 생활신조도 가정은 오직 편안하게 쉬는 공간이라며 자신의 사업 일이나 직장에서 일어난 복잡한 일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는 것을 가장 싫어한 성격이었다.

그 당시에도 몹시나 초조하고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며 뒤적거리기에 아내로서 궁금해 물어보았지만, 머리 아픈 직장 일이니 모르는 척, 상관하지 말고 그냥 집에서나마 제발 편안하게 쉬게 해 달라고 내 입을 틀어막은 사람이 누구인데, 사건이 터진 후에는 갑자기 집을 나간 사람도 누군데, 인제 와서 "왜 진작 그 사실을 숨겼냐고? 진작 알았다면 집도 안 나가고 본인이 얼마든지 잘 해결할 수도 있었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지도 않았다고" 남편 말에 매우 기가 차서 괘씸한 생각이 들면서 화가 치솟았다.


<딩동~>

남편인 것 같았는데 그냥 열쇠로 들어오지 구태여 벨을 누를까? 혹시나 한 번 더 확인하니 역시 그였다.

문이 조금 열리는 공간 사이로 한쪽 팔을 쭉 뻗으며 아주 큰 꽃다발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이에요? 먹을 것을 사려 간 것이 아니었어요?>

< 물론 먹을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너에게 미안함을 대신하고픈 마음에 꽃을 사려 간 거야. 꽃집 아주머니가 그러더라 닫힌 자기네 가게 문을 막 두드려서 이 밤중에 예쁜 큰 꽃다발을 만들어 꼭, 줘야 하는 상대가 누구냐고 묻어 보더라고. 내가 우리 와이프에게 줄 것이라고 했더니 농담인 줄 잘 안다고 내 말을 안 믿더라. 난 정말인데. ㅎㅎ>

그도 경상도 남자라서 사과 표현도 잘하지 못하고, 곧장 죽어도 남자의 자존심만 세우는 사람이라서 꽃다발로 용서를 구하고자 뜻인 줄 알기에 내 단순함은 조금 전 치솟은 화가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꽃을 받게 되었다.


다음날 서울에 있는 딸들과 함께 재회하고는 난 서둘러 바로 내려와야 했었다.
에어로빅 수업은 잠시 선생들에게 맡길 수는 있어도 에어로빅 선생이 되고자 들어온 교육생들의 자격증 시험이 앞둔 시점이라 내가 가르쳐야 했었다.
힘든 고비일 때 교육생들이 연달아 들어와 줘 우리 아이들 대학 등록비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 고마운 은혜는 전원 에어로빅 자격증 취득하도록 철저한 교육을 해 주고 싶었다.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 창밖의 한강 주변 고층 아파트를 보면서 후회스러운 마음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였다.

예전에 남편이 만약 청와대 공무원 사표를 내지 않았더라며 지금쯤 지위도 많이 올랐을 것이고 현재처럼 단칸 월세방이 아니라 저 고층 아파트에 지금쯤 살고 있을 텐데…

처음에는 사표를 내고 대구에 내려와 첫 사업이 한창 번창했을 때는 공무원 봉급을 비교하면서 진작 공무원 생활 참 잘 그만두었다고 분명히 내가 그랬다.

그동안 잘 먹고 잘산 것도 참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1도 나지 않고 현재 힘든 고통만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애당초 남편은 사업가, 증권 투자 상담사 등등 그런 것이 적성에 안 맞는 거야! 딱, 공무원 체질인데…"

한강 주변 고층 아파트에 무척 부러워하는 나 자신이 참으로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나를 가장 성숙하게 한 인생의 밑거름 시기도 되었다.
"득이 있으면 실이 있고, 실이 있으면 득이 있다"라는 말은 매우 공감이 되었다.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면 실패하기보다는 나름의 계속 이루었고 누르면서 살아왔기에 그동안 오만도 많았다.

심지어 재산이 조금 많았을 때는 주변의 돈이 없는 사람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월세 단칸방에서 돈 없이 생활고에 시달려 보니까 지난날 나의 잘못이 모두 보였다.

그때 내가 한 행동이 남에게 얼마나 큰 오만으로 비추어졌을까?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도 되었다.

"아픔만큼 성숙한다"라는 노랫말처럼…


며칠 후, 남편이 우리가 사는 단칸방에 내려왔었다.

막상 실지로 와 보니 욕실이 없더라도 화장실조차 없어 주인댁 대문으로 열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와 마당 화장실 사용하는 것과 그가 장만해준 안방용 비싼 자개 세트들이 허접한 창고에서 먼지 앉은 채 짐 덤 미가 되어 높이 쌓인 것도 보았고, 단칸방에 붙은 작은 쪽문으로 통하는 간이 부엌에는 싱크대는커녕 시멘트 바닥에 아주 옛날식 시멘트 부뚜막에서 밥을 해 먹는 나를 보고는 남편의 심정이 매우 복잡한지 침울한 표정 되어 눈물을 머금는 눈빛과 축 처진 어깨로 말없이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갔었다.


그 당시 무엇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에어로빅장 부근에 살다 보니 에어로빅장 회원들과 교육생 제자들에게 사생활이 노출되면서 내 자존심의 자괴감은 땅바닥에 추락하였다.

"원장님이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근처 아주 허접한 단칸 월세방에 살더라고."

"나도 소문 들었어. 그렇게 살면서 딸들은 서울에서 유학을 보내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내 뒤에서 쑥덕거리는 에어로빅장 회원들, 선생들, 교육생 제자들, 시가, 지인, 더구나 친정에서도 모두가 나를 미친 짓이라며 여기저기에서 쑥덕거리는 소문에 매우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내 나름대로 깨달은 철학이라면 자식들에게 진정한 유산이란 오직 자식들 머릿속의 지식을 넣어주는 것만이 영원한 그들의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서라도 졸업을 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소원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난 괜찮아! 우리 아이들 공부만 시킬 수만 있다면 이런 자존심 창피 따위에 난 절대로 쓰러지지 않아!>


에어로빅장 계약 기간이 만료가 다가오면서 가장 우려한 것은 에어로빅장 재계약이었다.

건물주는 이번에는 절대로 재계약을 할 수 없으니 반드시 비워달라는 통보가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어려움이 닥치면서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삶 굴곡의 롤러코스터를 타야 하는 것인지?

한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한고비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고 답답하고 다급한 마음에 남편에게 상담 전화했었다. 

항상 그랬듯이 역시나 이번 기회에 또 그만두라는 소리뿐이다.

전화 끊고는 난 몹시 화가 나 혼잣말로 화를 내었다.


(뻑하면 ~ 그만두라는 말뿐이야! 진작 경기 좋을 때 내가 그토록 원하는 버젓한 헬스장을 하나 차려줬더라며 이렇게 쫓겨 다니지도 않잖아. 그나마 에어로빅장이라도 했으니 사는 주택이라도 팔아서 자기의 빚도 갚았고, 자기가 없을 때 비록 월세 단칸방에 살아도 아이들 대학교 등록비도 마련할 수 있었잖아! )


"어떻게 또 이 고비를 넘어야 하나…?"

계약 만료 기간이 임박할수록 잠을 통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