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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76화) 열 번째 전원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9. 4. 1. 12:53


(76화) 열 번째 전원주택에서 생긴 이야기



서울에서 내려온 뒤부터 국가 공인 심사 자격증 취득에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이것저것 알아보는 도중에 그 시기에 2급~1급 생활 체육 지도자 자격증 시험 있는 시기라서 먼저 그것부터 취득하자는 충동감이 생겼다.
요즘 시험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생활 체육 지도자 자격증에는 전문직 한 종목만 취득할 경우에는 3급을 취득할 수 있고, 3급 생활 체육 지도자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지도 경력과 체육 석사학위 가진 자는 1급 자격증까지 취득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3급 자격증에서 더 높은 2급이나 1급 급수를 원하면 본인의 전공 이외 다른 생활체육 종목을 더 추가 선택해야 하는데 많은 생활체육 종목에서 그나마 조금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수영, 볼링이라 선택하였다.

그리고 선생님의 지도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실력 있는 개인 트레이너 선생님으로 전 국가 대표 선수 선생님들을 섭외해서 매일 연습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하게 시험을 망쳐 버린 사건이 되었다.

단기일 교육으로 시험을 치르는 것은 그 자체부터 내 잘못된 생각이었다.

수영은 난 원래 부산 사람이라 어릴 때부터 바다 수영을 무척 좋아했으나 여태까지 내 멋대로 즐긴 개헤엄에 불과한 것이다.

수영 자격증 취득 자격증에는 내 멋대로 즐긴 개헤엄이 아니라 정식 수영 전 종목과 인명구조까지 다 배워야 했다.

볼링도 평소 지인들과 볼링장에서 에버리지 점수에만 신경 쓴 재미로 즐긴 것이라 볼링 정식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한다면 여태까지 내 몸에 배긴 잘못된 습관을 다 버려야 한다며 트레이닝은 냉정할 정도로 가르쳤지만, 잘못된 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없었고, 거기에 신경 쓰다 보니 스텝만 자꾸 꼬이면서 절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아예 모르면 흰 도화지에다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코치 선생님이 가르치기가 수월할 텐데 이런 시간만 계속 보내다 보니 시험 날짜는 다가오고 그럴수록 다급해진 내 마음은 매일 스트레스만 잔뜩 쌓여만 갔다.


매일 내 생활은 에어로빅장에서 수업을 가르치는 것도 버거운데 바로 부리나케 수영장, 볼링장으로 달려가 무리한 연습을 끝내고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와서는 게다가 주부로서 집안 살림까지 늦도록 하고 나면 몹시 지쳤어 난 매일 반 시체가 되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드디어 시험 날짜가 되었다.

시험 장소도 대구가 아닌 서울 태릉 선수촌에서 치러야 했는데 무거운 볼링공을 대구에서부터 서울까지 종일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과 하루 전날까지 무리한 볼링 연습하느라 손목 인대마저 늘어져 붕대를 칭칭 감고서 서울 태릉 선수촌 집합 장소에 갔었다.

그곳에 막상 가 보니 젊고 신체 건장한 프로 야구 선수, 레슬링 선수들을 비롯한 전 현 여러 종목 국가 대표선수들도 은퇴 후에 취업에 꼭 필요한 2 - 1급 자격증이 필요한 것인지 그곳에 다 모인 것 같았으며, 시험도 치르기 전에 그들 틈에 끼어 있으니 체구에서 벌써 비교 대상이 되어 주 녹이 되었다.   


수영은 태릉 선수촌에서 실시하였고 볼링 시험은 서울 어느 규모가 대단한 볼링장에서 실시하였다.

볼링 실기 시험장에서 내 차례가 되었는데 어깨 통증과 늘어진 아픈 손목 인대 통증 악화로 무거운 볼링공을 잡는 순간에 느낌이 안 좋았는데 역시나 꼴 좋게 옆 가장자리 골대로 볼링공이 쑥 미끄러져 빠져버렸다.
그 순간 심사 위원들, 시험 지원생들, 관람하는 관중들까지 일제히 시선이 나를 향해 쳐다보면서...

(저런 실력으로 시험 치르러 온 거야?)

그런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아서 매우 창피스러웠다.

다시 말하자면 비싼 트레이너 비용에 비싼 장비 구매와 무리한 연습으로 팔인대만 늘어진 채 망신만 당하고 허탈한 상태로 늦은 밤차로 대구에 내려오게 되었다.


온종일 몹시 지친 상태에서 늦은 밤 열차를 타니 그간 피곤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졸음으로 설상가상 동대구역에서 못 내리고 지나쳐 버린 것이다.

뒤늦게 깜짝 놀라 허둥지둥거리며 역무원에게 물었다.
< 제가 동대구에 내려야 하는데 잠든 바람에 못 내렸는데 다음 역은 어딘가요?>
<다음 역은 밀양역인데 부산에서 올라오는 막차와 밀양역에서 잠시 맞다 하기는 하지만, 잘못하다가 두 열차를 다 놓쳐버리면 한밤중에 밀양역에서 오도 가지도 못할 수도 있으니 그냥 포기하세요>

< 정차하는 시간이 얼마인가요?>

<약 2분 정도지만, 밀양역에서는 반대편 쪽으로 가려면 육교 위로 올라가 반대편으로 다시 내려가야 갈아탈 수 있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도저히 안 될 것입니다>
그 말에 난 가방을 메고 뛸 준비를 하였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막차와 내가 타고 온 기차는 밀양역에서 서서히 서로가 정지하면서 문이 드디어 열렸다. 
반대편 기차로 갈아타기 위해서 무거운 볼링 가방에다 내 소품 가방마저 양어깨에 둘러메고는 육교 위로 안간힘으로 뜀박질하니 심장 통증으로 숨이 끊이질 듯이 매우 아팠다.
<이대로 포기해서 안 돼! 저 열차를 못 타면 난 한밤중에 밀양역에서 오도 가지도 못해 헉~헉~>
영화 장면에서 자주 나오는 시한폭탄처럼 카운트가 내려가면서 10초, 9초. 8초. 7초, 6초, 5초..... 드디어 반대편 동대구 기차로 오르자 기차 문이 닫혔다.
숨쉬기가 매우 곤란해지면서 내 심장 요동은 큰 북소리로 변해서 한동안 불규칙하게 들렸다.


그 후부터는 여태 좋아한 수영은 물만 봐도 도망할 정도가 되었고, 지인들과 재미로 즐겼던 볼링도 둥근 공 모양만 보아도 한동안 기겁할 정도로 싫어졌고 그 여파는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 실패의 계기로 내 인생에서 절대로 과한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큰 교훈을 심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부터 느긋함과 조용함이 간절해져 여유가 있는 주말이 되면 청도 운문사 사리암 절을 찾아가 기도와 명상을 즐기게 되었다.


그해 무더운 여름날.

그날은 이종사촌 언니와 함께 사리암 절에 가서 기도와 명상을 하였다.

잘 마치고 아래 주차장에 내려와 자동차 시동을 거는 순간에 언니가 갑자기 매우 놀라 당황하면서 지갑을 절 샤워장에 두고 왔단다.
<샤워장에서 손 씻다가 내 지갑을 선반 위에 두고 왔어! 그 속에 곗돈 현금 100만원하고 중요한 카드랑 신분증이 다 있는데 빨리 뛰어 올라가 네가 지갑 빨리 찾아와>
< 엉? >
<어서 빨리 뛰어 올라가 >
청도 운문사 사리암은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 중턱 사리암까지는 약 40분가량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언니는 경사만 바라보아도 엄두도 못 내면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두 눈을 부릅뜨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만 재촉하였다.
< 어서 빨리 뛰어. 내 지갑, 내 지갑… >
여름철 무더위 산을 오를 때는 눈썹도 때고 싶다 할 정도 더운 날씨에 지갑을 찾으려 또다시 뜀박질로 이제는 산으로 뛰어야 하니 내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통증에 시달리며 밀양역 악몽까지 되살아났었다.

평화스러운 느긋함을 느끼고 싶어서 조용한 절을 찾아왔는데…


다행히 샤워장 선반 위에 언니 지갑을 발견하고 내 손에 움켜줘 안심하니 갑자기 다리 힘이 풀리며 다리 마비가 와 그 자리에 폭 주저앉아 버렸다.
지갑 궁금증에 애를 태우는 언니를 생각하며 간신히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산 밑에 내려와 언니 지갑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 상태로 운전하자니 매우 힘들었고, 그 후 몇 날 며칠 퉁퉁 부은 다리로 고생도 많았다. 



그해 가을 날.

이번에는 내 막내 여동생과 제부와 더불어 오랜만에 다시 사리암에 갔었다.
그곳에서 낯이 익은 어느 남자가 날 힐끗힐끗 계속 쳐다보면서 생각이 잘 안 나는 듯이 갸우뚱거리며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디서 본 낯익은 얼굴인데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어디서 봤는지 매우 궁금하네요>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이 난 양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엉뚱한 말을 하였다.
< 아~ 맞다! 이제 생각났어요. 며칠 전에 우리 00 카바레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죠. 그렇죠?>
<엉~ 무슨 말인지?>
그때 내 여동생과 제부가 다가와서는 그 남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 어, 어~ 여기서 만났네. 기억나지 우리 처형이잖아. 내 결혼식 전날 우리 처형 집으로 네가 함 지고 가서 네가 함진아비 했잖아 그때 네가 우리 처형을 많이 괴롭혔지. 발아래 돈 봉투 더 깔아라, 술이 부족하다. 등등 그랬잖아. 벌써 우리 처형과 인사 나누고 있는 거야? >
< 아~ 이 일을 어쩌지…어쩌지…>
제부 친구는 인제야 나를 알아보고는 귀까지 새빨개져 난처하며 도망치듯이 제부 손을 얼른 이끌면서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내가 동생에게 말했다.
< 저 사람은 카바레에 자주 가나 봐. 날 보고 어디서 본 얼굴이라고 인사하더니 며칠 전에 우리 00 카바레에서 만난 사이 맞죠? 그러더라>
내 여동생은 그 말에 배꼽을 끌어안고는 깔깔깔 웃더니 쪼르륵 제부에게 달려가 이 일을 일러바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내 동생과 제부가 서로 깔깔깔 웃는 모습이 보였고 제부 친구는 매우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끍고 있었다.



남편은 집에서는 통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생활신조는 가정은 오직 편안하게 쉬는 공간이라며 자신의 사업 일이나 직장에서 일어난 복잡한 일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성격이며 내가 그런 것을 묻는 것조차도 싫어했었다.

어느 날에는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회사가 본인이 입사 후에 큰 노력해 순위에서 상위권으로 향상되었다며 자랑삼아 득의양양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남편 성격은 학창시절부터 늘 최고 순위만 추구하는 것을 잘 알기에 저러다가 너무 무리해 잘못되는 것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랬는데 어느 날부터 뉴스 시간마다 매일 주식이 폭락하고 있다는 것에 속내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은근슬쩍 물었다.
< 요즘 뉴스마다 주식이 폭락하고 있다는 뉴스뿐이네요… 당신도 고객 담당자라서 걱정이 많겠어요>
< … >
내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피하며 머리 아픈 직장 일은 집에서는 하지 말자고 그런다.

자기 걱정보다는 셋째 딸의 대학 입시가 다가오니 딸이나 잘 챙기라고 그랬다.
그 시기에 남편은 계속되는 주식 하락 부담으로 회사에서 매우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았고 머릿속이 매우 복잡한지 몹시나 초조하며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뒤적거리며 매우 신경이 무척 예민해진 것 같았으나, 그가 원하는 대로 집에서라도 오직 편안하게 쉬는 공간을 만들자며 더는 묻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새벽 일찍이 회사에 갔나? 그럼 먼저 나간다고 말을 하고 갈 텐데? 오늘은 웬일로 말없이 나갔을까? )
그런 궁금한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 등교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니 셋째 딸 얼굴이 하얗게 변한 얼굴로 편지 한장을 나에게 내밀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지 말까지 더듬거리며 말하였다.
<아빠가… 편지 한 장…남기고 집을… 나가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