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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치료 칼럼/영화치료 칼럼

왕의 남자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09. 4. 22. 00:36

 

 

                               

 왕의 남자

 

(2006)

 

 

-외상후스트레스장애환자 연산과 그의 드라마 굿판-

 

어느 학자가 라디오에서 이야기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싫다고.

제 사는 나라 역사 앎은 근본임을 강조하는 말이었으리라. 역사를 잘 모르는 내가 역사무비에 대해 글을 쓰려니 적지 않은 부담이 되지만 영화는 허구이며 이미 감독의 의도대로 창작과 편집의 두 날로 본 떠졌으니, 나 또한 상담자의 앵글로 내 눈에 보이는 만큼 보고자 한다..

 


< PTSD환자 연산군 >

 

  연산군은 어린 나이에 양육자와 애착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어린 아들이 어미를 찾는 건 지극히 당연한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볼 수 없었고 ‘어마마마가 보고 싶다’고 울 때마다 부친은 우는 연산을 안아주기 보다  ‘못난 놈’으로 질책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생모가 조모와 후궁들에 의해 고통스럽게 살해당하는 엄청난 외상을 겪는다.

아동기에 외상을 겪으면 사건에 대한 왜곡이 더욱 심하며 할 뿐더러 그 영향력은 자신을 파괴할 만큼 엄청난 강도로 한 평생을 짊어가며 살 수 밖에 없다.

역사학자들은 왕으로써 연산을 평가하겠지만 상담자와 치료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그는  왕이기 전에 심각한 외상후스트레스 환자인 것이다.

PTSD는 충분한 사회적 지지를 받으면 회복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땐 더 악화되고 고립감, 정서적 마비를 경험하게 된다. 연산에게는 왕으로서의 역할과 의무만 있을 뿐 슬프게도 자신을 있는그대로 안아주고 이해해 줄 사람은 궁궐 천지에 아무도 없다.

신하들은 또 어떠한가. 매사를 선왕과 비교하면서 못마땅해하고 연산의 불안정한 자아에 열등감을 자극한다. ‘선왕은 안 그랬다. 달랐다’

연산은 선왕이란 언어에서 자극일반화가 일어나고 공포와 분노반응을 보이며 한번 일어난 그 공포는 쉽사리 사라지지 못한다.

희생자 자의식의 방어수단이기도 한 <전지전능감>을 능히 부릴 듯한 왕이라는 타이틀은  허울만 있을 뿐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처선아, 내가 왕이 맞느냐? 선왕이 만든 법도에 매여 사는 내가 정령 왕이 맞단 말이냐!! 그  괴리감은 엄청난 적개심과 분노로 밀려온다.

PTSD환자는 권위적인 인물에 적개심을 품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 할 것이라고 여겨 의사소통도 꺼리고 약물중독에 빠지거나 극도의 정신적 마비를 보인다. 죄의식과 수치심이 만연한 정서를 죽여 다시 외상이 떠오르지 못하게 한다. 각성수준이 증가되면 분노가 폭발하며 적대적이라고 느끼는 대상에게 무조건 과격하게 공격한다.

 

 

< 치료사 공길 >

 

공길! 그는 남자지만 여성보다 더 강한 여성성을 지니고 있다.

불쌍하고 안 된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 부드러움과 모성과 같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동료 장생과 함께 궁과 따뜻한 음식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무작정 입궐을 했으나, 연산은 권위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공길을 ‘놀~자’며 방으로 이끈다.

왕의 방에서의 놀이는 예사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놀이가 아닌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연산자신의 외상사건임을 깨닫는다. 

연산에게 공길은 어미나 누이처럼 고통스러운 기억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동정심과 연민이 강한 공길은 연산의 내적치료를 돕기로 마음먹는다. 이미 둘 사이에는 라포가 형성되었으므로 지지적 환경을 맺으며 공감관계로 발전한다.

인간적 자질이 풍부한 공길이 전문적 자질 또한 갖추었더라면 연산은 내적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리라.

 


 

< 그의 드라마 굿판 >

 

어릴 때부터 연산을 모신 신하 처선은 이런 연산이 안타깝다. 상처와 질병으로 인해 연산의 속병, 화병을 치유해서 제대로 왕  구실하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 병을 치료하고자 각본 있는 굿판을 벌인다.


1번째 굿 - 연산과 그의 애첩 녹수 풍자 놀이판

 

이드를 숨긴 수퍼에고의 늪에서 질식할 것 같았던 연산은 공개적인 성의 묘사와 풍자에서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1번째 굿 이후 두려워하는 장애에게 처선은 “왕을 가지고 놀고는 중신을 가지고는 못 놀아”

신하들의 비리를 풍자하는 굿 한 판 벌리기를 유도한다. 


2번째 굿 - 탐관오리 비리 풍자놀이판 

 

중신들의 비리를 까발린 풍자에 연산은 신나고 즐겁다.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숨통을 조이던 신하들의 비리를 노출하는 굿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러나, 중신 한 명이 웃지 않는다며 탐관오리라는 명목으로 형벌을 내린다.

PTSD환자 연산은 배반감이나 속는 느낌 혹은 놀림당하거나 조종당한다는 느낌이 들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폭발되는 것이다.


3번째 굿 -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경극

 

마치 패왕별희를 재연하는 듯한 경극에서 연산은 생모 폐비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는 외상이 재현된다. 

분노와 적개심을 주체 못하고 원수인 선왕의 여자들을 직접 칼로 쳐서 죽게 한다.

PTSD는 정체감을 분열시키고 파편화시켜 때로는 자신을 살인자와 때로는 희생자와 동일시하며 양극단적인 태도를 갖는다.

 


< 왜 드라마는 실패했는가 >

 

안전한 장소에서 내담자가 준비된 만큼 재경험하여 민감도와 공포를 줄여야 하는데

아무런 심리적 준비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사전예고나 대비연습도 없이

현실의 인물을 앞에 두고 시행되었다는 것이 엄청난 실수다.

준비되지 않은 상처와의 직면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신하처선은 몰랐던 것이다.    

 

 


< 연산을 치료한다면 >

 

이미 시간이 훌쩍 흘렀으나 지금이라도 치료를 받는다면 결코 늦지 않았음을 설득시켜야 한다.

 그 증상들이 지극히 정상적임을 이해시킨다. 믿을 수 있는 안전한 관계를 맺은 후 트라우마에 대한 감정이나 생각들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정화시킨다.

어린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라고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귀인양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고통스런 기억과 정서를 극복하고 자신을 <희생자>에서 <생존자>로 여기게 해야 한다.

 


< 사 족 >

 

이 영화가 “동성애코드”로 인해 더한 인기를 끌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공길과 광대장생의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눈을 잃은 장생이 외줄을 타며 왕과 공길이 보는 앞에서 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을 훔쳐 가는 걸 못 보고, 그 마음이 멀어져 가는 걸 못 보고...”라고 독백하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쏴하고 콧등이 시큰했지만 별다른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장생과 공길의 난 다시 태어나면 광대로 태어 날것이다” “나야, 다시 태어나도 광대, 광대지”라는 대화는 참 감동적이었다..

이런 걸 보고 천직이라는 단어를 쓰겠지.

 

과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다시 태어나도 하고 싶은 바로 그 일인가!!  

 

 

                                      - 글 제공:  영화치료칼럼리스트  김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