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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69화) 아홉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7. 12. 18. 15:28


(69화) 아홉 번째 새로운 아파트에서 생긴 이야기


그 후에도 지인들이나 친구 부부 팀과 자주 산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 가을에는 문경 대야산으로 계획을 짜고  3팀의 친구 부부들과 우리와 2대 자동차로 나누어 타고 가게 되었다.
친구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우리 부부가 함께 타고 가게 되었는데 길을 아는 앞서간 일행 자동차를 놓쳐버렸다.
그 시절은 내비케이션이나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라 만약 도중에 헤어지면 문경 대야산 목적지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었으니 우리가 알아서 가야 했었다.
길을 묻고자 어느 시외버스 터미널에 잠시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리들이 화장실 다녀올 동안 운전한 친구 남편은 그동안 운전 긴장도 풀 겸 담배를 피우면서 길을 알 것 같은 경찰관에게 다가가 길을 물었단다.
< 대야산 가는 길인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요? >
경찰관은 아주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는 그랬단다.
< 우리는 지금 금연 구역 터미널 안에서 담배 피우시는 분을 단속 중인데 선생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재발로 담배를 피우시면서 우리에게 오셨네요>
< 아차!>
친구 남편은 화들짝 놀라면서 담뱃불을 끊으나 터미널 한복판 안에서 그랬으니 이미 때는 늦었다.
< 선생님의 주민등록을 보여주세요>
친구 남편의 실수는 그곳에서 어쩔 수 없이 벌금을 받게 되었는데 친구는 화를 내면서 "평소에도 그만큼 해로운 담배를 끊으라고 그랬구먼, 끝까지 내 말도 안 듣고 뭐가 급해서 위급한 상황도 아니면서 구태여 담배를 피우면서 재발로 경찰관에게 길을 물어보다니도무지 생각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친구는 남편에게 잔소리하기 시작하였다.
친구의 잔소리에 우리 보기가 민망하지 기죽지 않을 태세로 친구 남편은 갑자기 자동차 속도를 높이면 무리한 운전을 하였다.
그러다가 방금 바뀐 빨간 불 신호등을 갑자기 정지할 수 없는지 그냥 지나버렸는데 경찰 자동차가 그것을 목격하고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면서 스피크에서 경고 말이 울려 펴졌다.
< 삐용~ 삐용~ 0000 번호 자동차는 도로 옆으로 차를 세우세요>
친구 남편은 또다시 경찰을 만나면 안 될 것 같은지 그냥 달리다가 다음 번째 큰 사거리 신호등 빨간 불에서 정지해야 했다.
정지선에는 양쪽으로 대형 트럭 화물차 중간에 서게 되었는데 뒤따라 온 경찰 자동차가 내려와서는 친구 남편 얼굴을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 아~ 선생님은 조금 전에 터미널 안에서 담배를 피우신 또 그분이네요! >
<>
그 경찰관들도 터미널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교통 신호 위반한 우리가 탄 자동차를 발견하고는 뒤따라 온 것 같았다.
< 선생님께서 양쪽 대형 트럭 중간 속에 숨어있으면 우리가 모를 것으로 생각하셨나요?>
< 서다 보니 그런 것이지 일부러 숨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벌금 딱지도 받았는데 이번에는 그냥 봐 주시면 안 될까요?>
< 선생님 같은 분은 법규 위반을 매우 잘 하시는 분 같아서 그래서 더욱더 안 됩니다>


결국, 친구 남편은 연이어 두 번째 교통범칙금을 받게 되었는데 친구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린 상태에 또다시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다가 속도위반과 신호위반으로 연이어 교통범칙금을 받게 된 것이라며 친구의 혈압 상승한 숨소리가 우리 귀까지 들리는 것 같아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이 매우 불편했었다.
겨우 대야산에 도착하고 당일 산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그들의 자동차를 또 타야 하는 것에 매우 부담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타고 와야만 했으나 그들은 집에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냉랭한 자동차 분위기에 빨리 집에 도착해 내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유도장 계약 기간이 끝날 때 쯤에 회원 수가 많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지 유도 관장님이 자기네가 내는 한 달 치 월세만큼이나 터무니없이 올려달라고 그런다.
어차피 유도장은 오전에 비워진 시간을 잠시 한 시간을 사용할 뿐인데 올려달라는 월세는 내가 주는 월세로 유도장을 공짜로 쓸 작정인 것 같았다.
회원들은 그 요구에 매우 흥분하면서 이번 기회에 장소를 옮겨자고 그런다.
멀리 갈 수 없는 입장에서 갑자기 부근 장소를 물색하니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급하게 구한 장소는 회원 수에 비교하면 샤워 시설과 장소가 흡족하지 못했으나 그런대로 편안한 여성 전용 에어로빅장을 오픈하게 되었다.


이전해 회원 수가 매우 많아지면서 새벽 타임부터 저녁 타임까지 여러 차례 강습하였으나 오후 4시 안으로 집에 들어가야 하는 내 처지에 오전 수업 한 타임만 맡았고 그 외 시간은 다른 선생님들에게 맡겼다.

선생님이 없을 때 어쩌다가 새벽 타임이나 저녁 타임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는데 회원들이 내가 원장인 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자기네들이 되려 나를 친절하게 상담해주며 여기 등록하고 한번 다녀보라며 권했다.

 

새로 에어로빅장을 오픈하니 좀 더 나은 선생이 되고자 아무리 바쁘더라도 외국에서 유명한 에어로빅 선생님 초청 워크숍 참석에는 전국 어디라도 절대 빠지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리고자 노력하였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부족한 것 같아서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에어로빅 교수님이 부산 00 대학교 체육과에 계셨다.
그 대학교 체육과 학장님, 여러 체육과 교수님, 그리고 체육과 학생들에게 허락을 받고서 청강생으로 그 교수님 강의 시각에 매주에 한 번은 비싼 당일 왕복 열차를 타고 다녔다.
그 대학교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에어로빅스의 체계적인 이론과 과학적인 운동 방법 등등 에어로빅스에 관해서 많은 배움의 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매주 그 시간이며 빠지지 않고 열심히 출석하는 내 열정에 체육과 교수님들께서 그런 점을 매우 칭찬하시면서 차라리 체육 대학원에서 정식 입학해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조언 말씀에 동기부여가 되었지만, 에어로빅 학원 원장이라 우리 회원들 수업도 가르쳐야 하고, 4명의 아이 엄마이니 도전히 부산까지는 무리었다.

그래서 대구 00 대학교의 체육 대학원에 입학 원서를 내었고 시험에 합격하면서 내 인생에서 또다시 학생 신분이 되었다. 


어느덧 첫아이가 고3 입시생이 되었고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야간 보충 수업과 두 명의 아이들과 합쳐서 아침마다 6개의 도시락을 매일 사야 했었다.
남편은 내가 학교에 다니느라 혹은 에어로빅장 운영하느라 고3 입시생 학부모로서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허점이 보인다며 모든 것을 당장 그만두라는 단호한 조건이 붙었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시아버지와 이산가족으로 살았으니 친구들이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제일 부러워했다고 했다.

또한,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에 시아버지가 안 계시니 시어머니께서 힘들게 조그만 장사를 하시고 집으로 돌아오해 저문 시간이며 일찌감치 시골 구 밖 입구에서 시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린 춥고 배고픈 그때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그는 아이들이 학교에 돌아올 때는 엄마 집에 항상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을 어린 마음에 가장 부러워했던 남편 생활신조는 웬만하며 오후 6시 칼퇴근해서 가족들과 식사하고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아침에 출근하며 바로 학교도 가야 하고 시간 내 에어로빅 수업도 가르쳐야 하고, 그가 칼퇴근해 오기 전까지 결벽남편 성격이라 집 안 청소도 깔끔해야 하고 바로 저녁 밥상이 대령 되어야 하니 그거야말로 고달픈 내 일과는 마음의 여유 없어 하루 24시간이란 너무나 짧았다.

다행히 딸들은 엄마가 대학원에 다니면서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과 에어로빅장 맡은 일도 최선하며 노력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자란 탓에 나름 영향을 받았는지 딸들은 알아서 잘 했으나 아들만 아직도 PC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첫 아이가 고2 때부터 무용에 관심을 가지면서 무용과에 가겠다고 그런다.
어린 시절부터 다져온 무용 실력도 아니고 또한, 무용 체질도 아닌 애가 굳이 무용과에 가겠다니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합격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급구 만류했으나 한편 다시 생각해보니 옛날 내 여고 시절의 입시 때에 서울 어느 대학교 무용과에 합격하고도 못 간 것이 뼈저리게 한이 맺힌 기억이 떠오르면서 옛날 나를 보는 것 같았고 그때의 어린 나이에 못 해 본 상처는 평생 남을 것 같아서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이왕 시작한 무용에 크게 뒷바라지하면서 딸의 꿈을 키울 수 있게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최선을 다해서 몽땅 다 쏟아부었으나 딸은 서울의 어느 무용과에 지원했으나 역시나 불합격이 되었다.
남편은 멀쩡히 편하게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데 끝까지 만류하지 않았다며 많은 책망을 나에게 하였다.


딸은 불합격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무용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였고 그 후 무용과에 미련 없이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 대구에서 다른 과에 입학해 대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은 초등학생 아들, 중학생 셋째 딸, 고등학생 둘째 딸, 대학생 첫 딸, 그리고 엄마 대학원생까지 줄줄이 5명의 학생이 되었다.

나 역시도 대학원 졸업 논문 발표에서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 매우 힘들었다.

마지막 논문 발표에 겨우 통과해 졸업할 수 있었는데 그때의 졸업 논문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두 번 다시 학교의 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내 성을 바꾸겠다고 약속하며 내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에어로빅장 운영에서 서울 본사의 어느 협회의 대구 지사까지 맡게 되면서 전문직 에어로빅 선생 양성반 수업을 가르치게 되었다.
전문직 에어로빅 선생 양성반에는 젊은 아가씨뿐 아니라 남학생도 있었는데 내 어린 시절 무용, 합기도, 가야금 선생님에게 그때 받았던 선생님들의 호된 훈련법에 매우 질렸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나도 선생이 되고 보니 나 역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1기생, 2기생, 3기생 학생들은 내 못 진 훈련법에도 잘 견뎌주었고 그들은 부모님의 돈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내 공인 에어로빅 자격증도 취득하고 여러 헬스장으로 취업해 나가는 제자들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시대의 흐름 탓인지 내려갈수록 조금만 훈련이 힘들어도 부모의 돈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듯이 바로 내 평 캐치고 포기하고 나가는 학생들을 보니 세상을 힘들지 않고 아주 쉽게 얻으려 하는 것에 안타까움도 컸었다.


어느덧 재계약 때가 되었는데 건물 주인은 에어로빅 음악이 시끄럽다며 재계약을 해 줄 수 없다며 또 비워달라고 그런다.
또다시 에어로빅 장소를 옮겨야 하는 시련이 찾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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