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홉 번째 이야기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하다)
옛날 그 시절은 요즘처럼 국민건강보험 없었고, 개인 보험 가입도 잘 하지 않았으니 암으로 입원, 수술, 수차례 방사능 치료비와 장기간 입원비는 요즘처럼 신용 카드 분할 제도가 없었던 시절에 병원비를 한꺼번에 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가 예전처럼 사업이 한창 번창할 적 같으면 병원비 부담도 없겠지만, 얼마 전에 공장문제로 오랜 민사소송에 휘말려 큰 손해를 보았고 다시 회복해보겠다는 것이 증권투자로 말미암아 전 재산을 완전히 탕진해
27평 작은 아파트에 이사온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 병원비 혼자 부담은 큰 무리수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큰집과 함께 시어머니 병원비 부담을 하는 줄 알았는데 퇴원 절차 밟을 때까지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아마도 여태 우리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 이번에는 너희가 병간호하고 병원비까지 부담하라는
애초부터 그런 뜻인지…?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나에게 시아버지 반지를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 나도 다 알고 있다. 너희도 요즘 힘든 상태에서 내 병원비를 너희가 전부 다 낸 것을, 앞으로도 병원 정기검사도 계속 가야 할 텐데 이 반지는 네 시아버지 다이아몬드 반지이니 이것이라도 팔아서 내 검사비라도 보태라>
하지만 돌아가신 시아버지께서 평생 낀 반지를 팔 수도 없었지만, 그리고 만약 동서 형님께서 시어머니께서 나에게 그냥 준 것으로 오해가 생기면 나보다 시어머니가 곤란해질까 봐 아무리 거절해도 시어머니는 그래야 당신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며 끝내주셨고 나를 볼 적마다 그 반지 팔았느냐? 하시어 팔았다고 했으나 시아버님께서 평생 낀 반지를 차마 팔 수가 없었고 지금도 그 반지는 꼭 간직하고 있다.
병원 퇴원 후에 시어머니는 자주 우리 집에 오셨고 정기 검사 병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러셨다.
그날이며 병원도 같이 가고 집에 오는 길에 미용실에서 시어머니 컷, 파마, 백화점 구경과 옷, 신발 쇼핑에 재래 시장통에서 어묵, 순대, 국수 같은 군것질도 하면서, 남들이 모녀 사이냐고 물어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딸 없이 아들만 둘만 두신 분이라 이런 경험이 없어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매우 행복해하셨고 나 역시도 생각해 보니 그동안 시어머니는 늘 두렵고 매우 무서운 존재로만 생각했으니 명절이나 시어머니 생일날, 어버이날 같은 특별한 날에만 선물만 챙겨드렸고 용돈만 드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 용돈으로 당신이 알아서 옷과 신발을 사거나, 미용실 가거나 그것이며 며느리 노릇을 다 했다고 생각했으니 이런 쇼핑을 함께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어느 날 병원 담당 의사 선생님에게 내가 물었다.
왜? 암이 생기는지?
< 유전적이나 여러 가지 요소가 원인도 있고, 많은 의학적 원인 발표도 있으나 지금까지 제가 만나고 관찰한 암 환자의 공통점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암 환자가 더 많은 경우를 봅니다. 암이란 감기 바이러스처럼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으나 같은 스트레스라도 덜 받고 밝고 긍정적인 삶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의사 선생님은 암 수술 후에 5년 기간이 매우 중요한 시기이니 재발하지 않도록 스트레스 덜 받고 음식 조절 잘하고 마음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좀 더 즐겁게 사셔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에 동감하면서 이번 입원 기간에 간병인이 되어주신 친정어머니를 우리 집에 자주 오시게 하여 두 분이 말벗도 되고 화투 친구도 되어 즐겁게 보내니 두 분 사이에도 매우 돈독해졌다.
초등학교 일학년 우리 아들 소풍날에도 일부러 난 빠지고 친손주, 외손주 할머니들만 따라가시어 보물찾기, 손주와 함께 달리기 상으로 공책도 받아와 자랑도 하셨다.
효도 여행도 오직 두 분만 보내드리니 단체 여행에서 두 분이 한 방을 사용하면서 서로서로 얼마나 잘 챙겼는지 각별한 단짝이 되어 돌아오셨다.
그렇게 밝고 긍정적인 생활은 병원 검사 때마다 의사 선생님이 계속 호전되었다는 말에 시어머니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아파트 경기가 전국적으로 매우 호황을 이루고 있어 아파트 분양 투기 바람이 불었다.
대구에서도 최상의 위치, 학군, 교통으로 최고급 아파트 분양에 주부의 로망으로 평가를 받으며 그 아파트를 분양받고자 구름 때처럼 모인 사람들은 밤새 줄을 서야 했는데 얼마나 혼잡하고 복잡했으며 아파트 직원들이 새치기하는 사람을 잡아내곤 했다.
그때까지는 주택청약통장 순위가 생기기 직전이라 밤새 잠도 안 자고 먼저 줄을 서고 아파트 분양 당첨만 되면 로또 당첨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떴다 방에서 프리미엄(P)이 붙여서 되파는 시절이라 투기로 모여든 인파로 사회의 큰 이슈가 되었다.
(그래서 주택청약통장 제도가 생겼고 1순위, 2순위 3순위가 생기게 되었다)
우리도 6명 가족이 사는 27평 아파트이라서 이번 기회에 조금 더 넓은 평수로 옮기고자 바늘구멍 같은 경쟁률에 줄을 서게 되었고 운 좋게 경제율이 제일 치열한 34평에 당첨되면서 그 아파트에 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27평 아파트를 팔아도 턱없이 부족한 돈을 충당하고자 여태 내가 경영한 헬스클럽을 아깝게 팔게 되면서 그동안 정든 회원들에게 원망을 받으며 아쉽게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내리면 구조가 앞집과 우리 집 현관뿐이라 난 앞집과 사이 좋게 지내고 싶었다.
아파트 자금 마련으로 헬스클럽 경영을 안 하니 이게 몇 년 만에 맛보는 아침의 느긋한 여유인가?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 직장, 학교 다 내보내고 눈 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아늑하고 평화롭게 편안한 음악 들으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매우 좋았다.
차츰 앞집 아주머니와 친해지면서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망설이듯이 자기 남편이 나와 절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경계 주의를 주었단다.
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서 물었다.
< 아니 왜요? >
그 당시에는 반상회가 한참 잘 되고 있을 때이고 우리 아파트 한 라인 엘리베이터 사용하는 세대가 모여서 집집이 돌아가며 반상회 할 적에 아주머니끼리 나에 대해 뒷말로 수군수군 그렸다고 한다.
대다수 집에는 아이가 1~ 2명이나 많으면 3명인데 나는 젊은 나이에 4명의 아이에다 딸 세명들은 높은 학년에 비해서 나이가 너무 젊고, 또한 막내딸과 아들 나이 차이나는 것도 그렇고, 얼핏 풍기는 분위기도 집에서 살림만 사는 주부가 아니라 했단다.
아마도 딸만 세 명 둔 본처를 내쫓고 아들 하나를 낳아서 새로 안방 차지한 여자일 것이라 했단다.
자기 남편도 그렇게 보았는지 나와 가까이 지내면 왠지 나쁜 물이 들 것 같다는 노파심으로 경계하라고 했단다.
<헉~ 내가 그렇게 보였어요? >
앞집 아주머니도 처음에는 나에 대한 오해가 있었지만, 우리 큰딸과 내 얼굴이 너무나 붕어빵처럼 흡사해 큰딸을 본 후부터는 그런 오해가 풀렸다고 한다.
내가 남보다 일찍 결혼해 20대에 벌써 큰 아이 학부모가 되었고, 아들을 다시 낳으니 4명의 아이를 두게 되었고 또한, 지금까지 헬스클럽 경영하면서 에어로빅 선생 분위기가 몸에 배겨서 아무래도 평범한 주부와 다른 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했다.
앞집 아주머니는 비로소 내 말에 동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가 된다고 하였다.
어느 날 앞집 아주머니가 그 시절 한참 유행한 눈 라인 문신을 꼭 하고 싶은데 혼자 가기가 두렵다며 나와 동행해 주길 바랐다.
그래서 눈 라인 문신하는 집을 찾아갔는데 문신하는 아주머니가 허리를 삐끗해서 꼼짝할 수 없다며 다음에 오라고 그런다.
앞집 아주머니는 눈 라인 문신에 고민을 일 년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오늘 겨우 결정해 왔는데, 못내 아쉬워했다.
난 그간 헬스클럽을 경영하면서 운동하다가 잘못해 삐끗한 회원들을 많이 보았고, 다친 회원들이 집에 갈 때까지만 잠시 응급 마사지를 해 준 그간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몹시 아쉬워하는 앞집 아주머니를 위해서 문신 아주머니에게 응급 마사지를 한 번 해보자고 했는데 어떻게 근육이 풀리면서 문신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은 앞집 아저씨가 일찍 퇴근해 집에 오니 관리실 아저씨가 나와 함께 외출했다는 말에 나에 대한 나쁜 편견을 가진 분이라 잔뜩 긴장해 내가 얌전한 자기 아내를 꾀어 이상한 곳으로 데리고 간 것 같아서 과민한 반응으로 몹시 불안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앞집 아주머니가 깔깔 웃으며 우리 집에 왔다.
< 무슨 좋은 일이 있었어요?>
< 그게 아니고 어제 일 때문에 웃는 것이에요>
앞집 아주머니가 눈 라인 문신한 것에 붓기가 퉁퉁 부어올라 남편이 보면 놀랄까 싶어 내일 아침까지는 안 보여 주려고 했는데, 남편이 어디 갔다 왔는지 불신으로 추궁해 눈 라인을 숨기고자 피했을 뿐인데 그것으로 오해를 더 쌓게 되었다며 왜 자기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자꾸 피하느냐며? 오늘 분명히 지은 죄가 있다며 자기 눈을 똑바로 보고 바른말을 하라고 덤벼들어 그럴수록 도망가면서 눈을 피하니 자기 남편 오해가 더 커졌다는 것이다.
< 아직도 남편에게 제 오해를 안 풀었어요? 대관절 내가 어떻게 보였기에?>
<내가 말 했는데도 아직도 이 집 큰딸 얼굴을 제대로 안 봐서 그런지 자기 말이 맞는다고 확신하네요. ㅎㅎ>
<내가 못 살아 ~ 어제 문신 아주머니 힘든 응급 마사지까지 하면서 도와주었는데 그런데도 이런 누명을 들으니 우리 남편이 알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렇게요. 다음에 제가 우리 집에서 저녁 초대할 테니 그때 제대로 인사하고 오해도 풀어요. ㅎㅎ>
앞집 아주머니는 나와 달리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며 웃었다.
어느 날 앞집 아주머니가 매우 예쁜 모습으로 단장하고 나서다가 나와 마주쳤다.
<어디 가세요?>
< 어제 우리 아들 가정 통지문에 오늘 꼭 학교에 와 달라는 선생님 메시지가 있어서 학교에 가요>
앞집 아주머니 외아들은 초등학교 일학년이었다.
그 시절에는 선생님에게 촌지도 가져다주는 시절이라 아주머니는 아주 예쁘게 단장하고 촌지까지 챙겨서 학교 간다고 했다.
얼마 후 현관 앞에서 본 모습은 완전 다른 우거지 인상이 되어 돌아왔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앞집 아주머니는 있는 멋 없는 멋 다 내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자기 아들 그림일기를 보여주더란다.
잘 그린 그림일기가 아니 지라도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그림에는 앞집 아주머니 친구들과 어울려 화투를 치는 장면에 철가방 짜장면 배달까지 있더란다.
그 밑에 비뚤비뚤한 아들 글자에…
( 우리 엄마는 친구들과 화투를 치면서 바쁘다고 오늘도 밥 안 해주고 짜장면을 시켰다)
선생님은 아이 보는 앞에서 화투를 치는 모습은 교육상 안 좋으니 앞으로 조심해 달라고 하더란다.
그 말에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촌지도 못 주고 왔단다.
< 내가 맨날 화투를 친 것도 아니고 이틀간 친구들과 화투를 쳤을 뿐인데 선생님 생각에는 내가 매일 화투만 치면서 밥도 안 해주고 짜장면만 시켜주는 엄마로 볼 것이 아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대충 입고 갔으면 덜 창피할 텐데 오늘따라 더 우아하게 쭉 빼입고 갔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어유 창피해서~ 요 녀석 학교에서 오기만 해봐라>
앞집 아주머니는 화를 못 참고 씩씩거리면서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 뭐야~ 난 아직도 화투 화자도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나를 멀리 경계하라고 했다더니…)
우리 집 바로 위층에 늦게 입주한 집은 유치원생, 저학년 아이 세 명을 둔 집이 이사를 오면서 위층 층간 소음 공해로 시달리게 되었다.
아이들이 자기 집을 운동장 놀이터처럼 생각하고 뛰고 굴리고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쿵쿵~ 소리에 쉴 새 없이 놀라며 머잖아 천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관리실 아저씨에게 인터폰으로 주의를 청했으나 떠들고 소란을 피우느라 인터폰을 몇 번이나 호출해도 못 듣고 있으니 직접 올라가 보라고 그런다.
할 수 없어 직접 올라가 현관 벨을 몇 번이나 눌렸으나 안에서 요란하게 여전히 뛰고 굴리느라 벨 소리조차도 듣지 못할 정도이다.
관리실 아저씨에게 아이들이 뛰고 굴린다고 현관 벨도 못 들을 정도니까 어른들이 오면 주의를 부탁했다.
관리실 아저씨가 그들 부부에게 알렸는지 부부가 내려와 매우 죄송하다고 그런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들에게 주의를 잘 시키겠습니다>
그들 부부는 매우 선량하고 좋은 분 같았으나, 아무리 주의를 시켜도 그때뿐이라며 나를 볼 적마다 죄송하다고 그런다.
어쩔 수 없이 그 집 아이들이 학교 다녀와 그들 부부가 오기 전까지 그 시간 때에 피해서 잠시 시장을 가거나 외출을 하거나 아니면 귀를 꽉 막고 살아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알게 된 윗집 교수 부부와 인연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 공부 인연도 찾아와 4년제 대학교 편입 시험 보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여기 아파트에 이사와 잠깐이기 했지만, 아침에 음악 들으며 느긋하게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는 또다시 4년제 대학교에 편입하게 되면서 편안한 생활에서 벗어나 또 바쁜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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