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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64화) 나의 자서전 여덟 번째 이야기 (다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7. 6. 13. 13:48


(64화) 나의 자서전 여덟 번째 이야기 (다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다)


아파트 앞에서 어린 아들이 내 눈앞에서 시내버스에 받혀 쓰러지는 것을 보았을 때는 지금도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라 잊을 수가 없으며 어떻게 병원까지 오게 되었는지조차도 모를 정도이다.


검사를 마친 의사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들이 버스에 받혀 넘어질 때 머리 방향이 뒤쪽이며 매우 위험하고 심각한 상태가 될 수도 있는데 다행히 옆쪽으로 넘어져 팔 골절과 철과상이 생겼으나 머리 손상에는 그다지 영향을 준 것 아닌 것 같다며 아이가 매우 놀라서 그렇지 부서진 팔은 어린 유치원생이라 어른 뼈와 달라서 재생이 빠른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다.


그렇게 해서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께서는 큰집 맏손자를 하늘나라로 보낸 아픈 경험이 있는 분이라 누나 세 명을 두고 얻은 귀한 손자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많은 질책은 받았으나 시어머니께서 아들 보호자로 병실에 함께 계시겠다고 자처해 주셨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라 집에 컴퓨터가 없었다.

PC 게임으로 또다시 찻길 건너 PC방에 가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 집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만들어진 PC게임 프로를 사서 컴퓨터에 직접 삽입해 게임을 할 수 있는 그 시절에 비싼 컴퓨터를 남보다 먼저 사게 되었다.
그리고 교통사고의 매우 놀란 가슴과 예전에도 병원에 실려가 죽다가 살아난 기억들이 앞으로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제발 탈이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들 공부는 큰 기대하지 않았던 동기도 되었다.


시어머니께서 몸이 불편한 이상한 증세가 엿보인다고 하시어 종합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모든 검사를 받은 결과가 암으로 판정이 되어서 급히 수술과 입원을 하게 되었다.
요즘처럼 유료 간병인이 없었던 시절이라 그때는 오직 가족이 병간호를 맡아야 했다.
병실이 산부인과이라 남자분이 입원실에 있기가 불편하고 곤란한 점이 많았고 수술 후에 거동이 불편해 밤,낮을 병실에서 함께 지낼 보호자가 당장 문제가 되었다.
아들 형제만 두신 시어머니의 간병인은 오직 내밖에 할 사람이 없었다.

동서 형님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젊은 날 시어머니의 성미가 매우 까다롭고 결벽증으로 낮에 절대 눕는 법이 없었고, 며느리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시켜시어 동서 형님은 나이가 들면서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시어머니께서는 수술과 방사선 치료로 하나부터 열까지 보호자가 잠시라도 없으면 안 되는 상태였는데 방사선실에도 보호자가 직접 납 앞치마를 입고 들어가 환자를 도와주고 나오는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호자가 왜 직접 납 앞치마를 입고 들어가 환자에게 도와주고 나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 불능이지만…)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한시라도 환자 곁에 보호자가 늘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때 아들은 초등학교 갓 입학했고, 그 시절 초등학교 일학년은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이며 병원과 초등학교 거리는 버스로 약 한 시간 거리의 먼 곳에 있었다.


병실에서 밤을 보내고 지친 몸으로 새벽에 잠시 들어와 어린 딸 세 명 도시락 준비해서 먼저 학교 보내고, 초등학교 입학한 아들이 오후반일 때는 아들 책가방 챙겨서 함께 병원으로 와야 했다.
병원 측에서 방사선 치료실 부근에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으나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어려움도 많았다.
어느 날에는 병원 측에서 보호자가 어디 가지 말고 대기하라고 할 적에는 병원 복도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이고 도로에서 모르는 택시 기사에게 부탁해 먼 거리를 아들 혼자 학교에 태워 보내야 할 적에는 무사히 학교에 잘 도착했는지? 더구나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라 물어볼 곳도 없어 매우 불안과 초조해 그때 마음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헬스클럽 경영과 에어로빅 지도 수업도 내가 가지 못해 차질이 생겨 엉망이 되었으나 신경을 쓸 만한 겨를이 없어 마음만 진퇴양난 안달이 되어 몹시 지쳐 쓰러져 병이 날 지경이 되었다.


친정어머니께서 사돈이신 시어머니 병문안으로 부산서 대구로 오셨다가 당신 딸의 고달픈 일과를 보시고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시다면 딸 대신 사돈 간병인을 자청하시고 병원에 남아셨다.
친정어머니께서도 바쁜 분인데 매우 죄송하고 미안했으나 덕분에 병원이 아닌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었고 잠시나마 정상적 주부 생활로 네 명의 아이들 아침 준비물과 도시락 챙겨서 보낼 수가 있었고 아들도 낯선 택시를 태워 보내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훨씬 안도가 되었다.


친정어머니는 병원 청소 아주머니가 힘든다고 6인용 입원실 화장실을 본인이 매일 하시는 바람에 시어머니 병간호만 해도 미안한데 병원 화장실 청소까지 하시는 것에 내가 아무리 말려도 본인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다.
"죽으면 썩어 없을 몸이니 살아있을 때 부지런히 남을 도우면서 살아야지"
친정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시는 봉사 철학이다.
친정어머니는 불편한 병실 바닥에서 자면서 시어머니에게 다정한 말 벗 친구도 되어주고 화장실 갈 적에 불편한 점 하나부터 열까지 손발이 되어주셨다.
시어머니의 수술한 경과가 호전되어 이제는 본인 혼자서 화장실도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안심하고 고생만 하신 친정어머니는 부산으로 가셨다.

친정어머니와 내가 간병인으로 고생할 동안 시숙님께서는 거의 매일 낮에 다녀가셨으나 동서인 형님은 입원 기간 동안에 두 세 번 낮에 잠시 사무적인 병문안만 오셨다.

그러니 전반적으로 시어머니 간호는 내 몫이 되었지만, 형님 마음은 선량한 분이라 며느리 입장에서 형님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했다.

시어머니께서는 딸은 쓸데없다며 아들만 선호하신 분이었는데 처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이번 일을 꺾고 보니 딸도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아>


시어머니는 나를 처음 만난 약혼식 날부터 무척 못마땅하게 보셨는데 더구나 딸만 줄줄이 세 명을 낳은 며느리를 여전히 마음에 안 드셨다가 아들 낳은 후에 관계가 좀 나아졌다.
젊은 날에 호랑이처럼 무섭게 호령하시고 의기 당당하신 분이 이제는 연세도 드시고 시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에 외로움 속에 암 수술까지 받으시니 마음이 매우 약해져 셨다.
병원 퇴원 후부터는 두 아들과 큰며느리에게 말 못 하는 부분까지 나에게는 마음을 털어놓으시면 나를 무척

의존하셨다.


나 역시 예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분이 시어머니인 줄 알았는데 늙고 병들고 가진 것이 없는 시어머니의 매우 약해진 모습에서 측은해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 계기로 예전과 다르게 생각되었고 우린 좋은 고부 관계로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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