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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59화) 나의 자서전 일곱 번째 이야기 (주택에 살 적의 이야기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6. 3. 18. 15:45

 

(59화) 나의 자서전 일곱 번째 이야기 (주택에 살 적의 이야기들)

 


그날 전문대학장님의 제안을 받은 날은 나 스스로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으나 그렇다고 쉽게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여건상 결코 쉽지 않았다.

내 일과는 꼭두새벽부터 시작해 딸들의 긴 머리 묶어주고 학교 준비물, 도시락 챙겨 학교 보내고 돌아서면 남편 출근 도와주고, 출장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면 에어로빅 수업으로 헬스클럽에 서둘러 가야만 했다.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가사와 어린 아들까지 맡길 수가 없어 헬스클럽 부근의 개인 미술학원 원장 C에게 아들을 맡기게 되었다.
C는 둘째 아이 임신으로 학원을 잠시 쉬는 기간에 우리 아들을 맡길 수 있었는데 그렇게 알게 된 그녀와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아침 헬스클럽 출근길에 아들을 C에게 먼저 맡기고 오전 에어로빅 수업을 끝나면 그 후부터 밤까지 헬스클럽은 다른 선생님에게 맡겨 놓고, 아들을 데리고 오는 길에 저녁 장을 보고, 딸들의 하교 시간과 6시 칼퇴근하는 남편 저녁 식사 준비하면서 혹시나 신발 정리부터 깔끔해 있진 않으면 절대 못 봐주는 그의 결벽증 성격을 맞추어야 하고, 저녁 식사 후에 아이들 숙제 봐주고, 네 명 아이들 잠자리 봐주고, 그리고 내일 아이들 도시락 반찬과 에어로빅 안무를 연구해 만들어 연습하고 나면 새벽이 될 때가 있는 동분서주 현실에서 대학을 꿈꾼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TV 경제 뉴스에서 모르는 전문용어가 나왔을 때 그에게 그 용어가 무엇인가? 묻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잘 가르쳐주었으나 다른 용어와 요즘 시국에 대해서 몇 번이나 질문 하자 귀찮아하는 말투로 말했다.
<뉴스가 집중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신문을 볼 적에 쓸데없는 것만 보지 말고 정치나 경제 뉴스를 좀 봐.>
그날따라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무리 편한 부부사이라도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
안 그래도 최근 대학 학장님의 이력서를 논했을 때 나자신에 매우 부족하다는 것에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그 말은 더욱더 자극제가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다시 대학을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경영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어느 날 아들을 찾으러 C의 집에 갔을 때 그녀가 주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에 지금이라도 대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내 여건상 그렇지 못함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말에 C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대학교 갈 수 없을 것이라면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보라고 하였다.
자기 남편의 절친이 전문대학 경영과 교수니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다음에 C의 집에 갔을 때 그녀가 알아본 결과는 전문대학 경영과는 경영자에게는 특별히 조금의 가산 점수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입시 학원에 등록해 입시 준비를 하라면 우리 아들은 그녀가 잘 맡아 줄 테니 걱정 말라면 용기를 돋워 주었다.


그냥 그녀에게 한탄스레 한 말이었는데 다시 불씨의 기회가 되면서 입시학원에 등록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그에게 대학 입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끄집어내자마자 내 말을 혹시 잘못 들은 것처럼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하였다.
현재 아이 네 명에다 헬스클럽 경영까지 하는 와중에다 또 무슨 대학까지 생각하느냐면 두 눈을 부릅뜨고 어질한 기색으로 말도 못 끄집어내게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 너는 왜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해. 서울에서는 부업 한다고 설레발이고 대구 와서도 아이들 곁에서 제발 얌전하게 있기 바라면 외출과 경제권도 막아도 헬스클럽에다 이제는 그것도 부족해 대학교까지 다니겠다니 대관절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는 나로 인해서 계속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라면 나를 완전히 넋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취급했다. 
<결혼 전에 약속했잖아요. 결혼 후에라도 내가 원하면 대학을 보내주겠다고 했으니 약속 지켜야죠.>
<그때만 해도 우리가 아이가 네 명이 될 거라고 상상이라도 했겠어. >
그날부터 토라진 우리 부부 사이는 냉랭한 찬 바람 기운이 돌았다.

결혼하고 그에게 찍소리 못하고 살아온 세월 속에서 대학 문제만큼은 절대 굽히지 않았고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하고 마는 내 고집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도 한 걸음 물러나면서 굳이 학교를 원하면 아이들 어느 정도 키워놓고 가라고 그런다.
옛날 그 시절은 요즘처럼 만학도가 있는 시절이 아니었고 재수생이나 군대 다녀온 복학생이 제일 나이가 많다고 한 시절에 더구나 남자도 아닌 아줌마 대학생은 매우 보기 힘든 시절이라 아이들 다 키우고 가라는 말은 그만 포기하라는 말과 같았다.

끝내 그는 내 고집을 꺾지 못했고 오직 내가 대학 시험에서 떨어지기만 간절하게 바랐다.

 

어쨌거나 다행으로 어렵게 해결되면서 대학 입시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짧은 기간에 기본기 없는 내 실력으로 영어와 수학은 아예 포기하고 간추린 요점 문제지 풀이에만 매달리면서 거의 잠을 잘 수가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입시 학원에 나가면서 에어로빅 수업은 다른 선생님에게 맡겨지면서 이제는 남편보다 헬스클럽 회원들에게 엄청난 불만들이 터져 나와 매우 힘든 시기가 계속되었다.


드디어 대학입시 시험날이 되었다.
역시나 시험장에는 나이가 제일 많은 수험생이라고는 재수 삼수생 이상 되는 사람이 없는 시절에 아줌마 수험생에 다들 쳐다보고 수군거리는 큰 관심 대상이 되었다. 
시험 과목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수학 시간이었다.
일반 수험생들에게는 수학 풀기에 매우 부족한 시간이겠으나 내 실력이란 어쨌든 객관식 문제 답안지에다 잘 찍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천히 해도 10분이 체 걸리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엄청난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개를 들고 있자니 앞의 감독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고,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자니 목이 몹시 아팠고 지루함에 졸음까지 왔다. 
몇 번 끄덕끄덕 졸다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펜으로 답안지에다 이리저리 줄을 막 그어 놓았다.
< 아이고 이 일을 우째~~>
시험 감독 선생님에게 다시 답안지를 부탁하고 원래는 앞 답안지를 보면서 다시 해야만 정상이겠지만 어차피 정답이 아니니까 볼 것도 없이 또다시 마음 가는 대로 찍었는데 한 번 더 하니 그 덕분에 시간이 덜 지루했다.

감독 선생님은 안 그래도 아줌마 수험생 답안지가 궁금했는지 두 장의 답안지를 비교 보면서 아주 열심히 수학문제를 풀다가 틀린 것이 아니라 졸음으로 이리저리 줄을 그어 망친 답안지에 서로 완전 다른 답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ㅋㅋ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수학, 영어를 제외한 다른 암기 시험은 족집게 문제집으로 공부한 것이 그런대로 잘 치른 것 같았다.

점수 결과는 예상대로 4년제 대학교에는 절대적으로 못 미치는 점수이고, 그나마 경영자 혜택 가산점을 받고서 겨우 전문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입학으로 예전 친정 이종 언니 따라서 우연히 보게 된 점쟁이 말 한 것처럼…

"네 운명은 학생이나 선생으로 평생 살게 될 팔자야" 정말 그렇게 살 첫 시발점이 되었다.

난 어릴 적부터 공부에 전연 관심 두지 못해서 한 번도 공부로 상장을 받은 본 적도 없었고 시험 때는 전날에 소나기 공부하고 시험 끝나면 다 잊어버리는 게 내 공부 방식이었다.

더구나 일찍 결혼하면서 그리고 아이 네 명을 두면서 더욱더 대학이란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알고 살아왔는데 30살에 대학 학장님의 이력서 제출 제안 계기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그에게 경제 전문용어 질문으로 받은 상한 자존심으로 C와 한탄스레 한 말이 인연이 되면서 31살에 아줌마 대학생이 된 것이다.

 

우리 경영 과에는 대다수가 남학생들이고 여학생은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학교 전체에서도 최고의 나이 연장자는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남학생 몇 명이 전부 지라 특별한 나를 보려는 다른 과 학생들도  심지어 수업에 들어온 교수님마저도 내 이름을 먼저 불러서 확인하는 나의 존재는 호기심으로 보는 동물원 원숭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 나의 호칭은 우리과 여학생은 언니라고 불렀고 남학생들은 누나라고 불렀지만, 차츰 학생들 사이에 '두목'이라는 호칭도 생겼다.
(무슨 산적 두목도 아닌데 내 성격에 딱 어울리다면 자기네 두목이라고 생긴 별명이다)
우리 과 학생들과 점차 친해지면서 그들의 사생활 상담도 해 주면서 나날이 대학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반대로 주부로서 집안 살림과 네 명의 아이들 뒷바라지, 헬스클럽 회원들의 불만은 조합비까지 만들어 도와주었는데 그 보람도 없이 수업 없는 날만 한 번씩 나타나니 불만들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더 힘든 것은 학교 다니고 난 후 부터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고 또한, 비유를 다 맞추는 것이었다.

집의 정리가 조금이라도 깔끔하지 못하거나 아이들 보살핌에 틈이 보이면 걸핏하면 헬스클럽과 학교를 당장 관두라는 엄포 얼음장을 늘어놓기 일쑤이고  그의 기세는 갈수록 등등해져 갔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집안일을 말끔히 끝내놓고 한밤에 학교 리포트 숙제와 헬스클럽 에어로빅 안무를 만들고 뻐근한 몸으로 일어나면 어느새 동이 트면서 여명이 밝아 오는 날이 허다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를 위한 치장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겨우 세수나 하고 학교 가는 버스 속에서 머리 빗고, 약간의 립스틱 정도 바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루는 빽빽한 버스 속에서 몰래 머리를 한 번씩 빗었는데 갑자기 빗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어디 갔을까? 찾다가 버스에서 내리는 어느 남자 편물 옷 등 뒤에서 빗이 꼽혀서 내리는 날도 있었다.

 

우리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새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아침 일어나 보니 고양이가 새끼 7마리를 낳았다.
옛날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고양이 사료가 없던 시절이라 일일이 8마리 고양이 먹이를 만들어 주어야 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C에게 아들을 찾아 데리고 오면서 8마리 고양이와 새들의 먹이로 매일 동네 시장의 바닥에 떨어진 배춧잎(새 먹이)과 생선가게에서 생선 대가리(고양이 8마리 먹이) 그리고 쌀집에서 보리쌀을 사서 온다.
(보리쌀에 얻어온 생선 대가리를 넣어서 푹 끊어 8마리 고양이에게 먹인다)
매일 어린 아들과 바닥에 떨어진 배춧잎을 함께 줍고, 생선 대가리를 얻어 가는 것이 궁금한지 시장상회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 아기엄마는 왜 날마다 바닥에 떨어진 배춧잎과 생선 대가리 얻어가요? >
< 예~ 제가요 매일 보리쌀 밥에 배춧잎 삶아서 생선 대가리 넣고 찌개를 해서 먹어요>
(내가 너무 쉽게 대답해 시장 아주머니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ㅎㅎ)

 

우리 학과 교수님은 내가 기혼녀인 줄 알고 계셨으나 다른 교수님은 얼핏 보기에는 올드 미스로 착각하시는 분도 있었다.
<학교보다는 시집이나 가지 그래>
짓궂은 장난기 놀림으로 말씀하시는 교수님이 어느 날 지각해 들어오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지각을 자주 해 좀 빨리 학교에 올 수 없어? >
< 죄송합니다. 우리 아기 똥 기저귀 빨다 보니 지각을 자주 하게 되네요. 앞으로 일찍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그 시절에는 종이 기저귀 시대가 아니고 헝겊 기저귀 시절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내 대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킥킥거렸다.
< 결혼한 학생이었어…>
그 다음부터 교수님은 그런 짓궂은 장난기 놀림의 말씀하시지 않았다.

 

시험 날이 되었다.
부엌에는 쪽지를 덕지덕지 붙여 놓고 식사 음식을 장만하면서 공부했었다.

일과를 끝난 한밤에 시험공부를 해야 하니 부족한 잠으로 시험 기간에는 거의 초주검의 상태 되었다.
그래도 도저히 시간이 부족해 커닝 종이를 만들어 보았다.
처음에는 커닝 종이를 길게 만들다가 아무래도 커닝 종이가 커서 줄이고 또 줄이다 보면 어떤 것은 만들 필요 없이 다 외우게 된 것도 있었고 그래도 안 되는 것에는 최대한 매우 작게 커닝 종이를 만들어 갔다.

다음 날 시험 치는 날에 교수님은 어린 학생들보다 아줌마 대학생이 어떻게 답을 쓰는지 관심거리인지 아예 내 옆의 책상위에 걸쳐 앉아 답을 지켜보는 바람에 애써 힘들게 만든 커닝 종이는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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