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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58화) 나의 자서전 일곱 번째 이야기 (주택에 살 적의 이야기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5. 10. 27. 04:56

 

 

(58화) 나의 자서전 일곱 번째 이야기 (주택에 살 적의 이야기들)

 

 

 

 

 

그의 분노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고 회원들에게 당장 남은 조합비를 돌려주고 문을 닫으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고 그는 나를 설득시켰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경영이란 절대 쉽지 않은 것이면 신경 쓸 일도 많고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도 나가야 하니 예전처럼 회원으로 편안하게 운동이나 하라고 그런다.
하지만 이 일은 조합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에 의해 단호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얼마나 힘들게 조합을 만든 것인데 이게 말이 되느냐고 그러면서 남편 하나 설득 못 시키는 것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이조 시대에 살다가 온 사람이냐고 빈정거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잠깐동안 헬스클럽 문을 닫는 소동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았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내 기억 속에는 늘 아파 누워있는 모습만 보면서 자랐다.
아픈 아버지 대신해 어머니 홀로 생계와 자식들 학비까지 마련하느라 무척 고생하셨는데 철없는 맏딸인 나는 그런 어머니의 고충은 내 안중에도 없었고 동생들보다 못 한 장녀로 내가 하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철딱서니 없이 요구만 했다.
한 번씩 철부지 딸에게 속이 상하시면 누워계시는 아버지에게 한탄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 점까지도 아버지가 싫었다.
점잖은 장남 큰오빠, 특히 작은 오빠는 아픈 아버지에게 지극 정성으로 잘해서 효자로 동네에서 소문나면서 부산시장 효자상까지 받았다.
여동생도 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했는데 나만 건강하지 못한 아버지가 싫어서 친구들의 건강한 아버지를 항상 부러워 했다.

 

 장례 절차에서 집안 친지들과 우리 가족 간에 분쟁으로 매우 시끄러웠다.
집안 친지들은 당연히 집안 선산에 아버지를 모실 것으로 생각하고 선산에 안장할 모든 준비를 다 마쳤는데 큰 올케언니가 반대했다.
평생 아픈 분이라 깔끔한 화장이 후손들에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옛날 그 시절에는 며느리 발언은 완전히 무시당하는 시절인데 집안 어른들 의견에 감히 며느리가 반대하는 것에 가당치도 않다고 했으나 우리 어머니는 집안 친지 의견보다는 우리 집에서는 큰 며느리 의견이 더 소중하다면 며느리 편을 들어주어 끝내 화장을 하게 되었다.

 

불교 의식대로 사십구재 천도재를 절에다 올리게 되었고, 첫 번째 제날이 되었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많은 손님이 절에 참석해 천도재 진행 도중에 우리 어머니와 올케언니는 갑자기 심한 복통으로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호전되어 집으로 오셨는데 큰 올케언니는 매우 심각해서 생사를 좌우할 만큼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그랬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참석한 여러 사람이 여기저기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화장을 원치 않았는데 며느리가 우겨서 벌을 받는 것이라면…

 

혼란 속에서도 이미 시작한 천도재를 도중에 중지할 수 없어 그대로 진행하고 있었으나 나 혼자만 법당안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채 밖에서만 배회하고 있었다.
그 사연에서 잠시 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독실한 교회 전도사님이셨다.
요즘과 달리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은 틈만 생기면 학급 아이들에게 전도하셨고 하나님 이외는 모두 우상이라고 하셨다.
기독교 세뇌 교육을 얼마나 했으면 명절 차례 지낸 음식조차도 난 먹지 않을 만큼 거부했으니 어머니께서 한 번씩 절에 따라가자고 하시면 놀라 기겁을 했다.
불교신 자 어머니는 그런 딸에게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어느 종교이든 나쁜 짓을 하라는 종교는 없을 것이니 네 뜻대로 하라고 하셨고, 다음에 인연이 닿으면 그때 인연 법에 따라가라고 하셨다.

 

우리 반 아이들을 주일이면 담임선생님을 따라서 대부분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매우 추운 겨울날,

그날도 우리 학급 아이들과 교회에 갔었고 한참 기도하는 시간 도중에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되었다.
기도 중에 갑자기 큰 불덩이 같은 것이 내 몸에 확 들어온 것처럼 몸은 매우 뜨겁고, 머리 위에는 집채만 한 무거운 물체를 얹힌 것처럼 계속 눌러 매우 무거웠다.
기도 도중에는 아무리 눈을 뜨려도 눈이 뜨지 않았고 머리 위에 무거운 것을 내려놓고 싶어서 허 손짓을 하면서 휘저었으나 도저히 내 힘으로는 불가능했는데 목사님의 기도에서 "아멘"과 동시에 모든 것이 풀렸고 그대로 바닥에 푹 쓰려졌다.
목사님을 비롯한 우리 담임선생님, 신도들이 모여들었고 분주하게 물을 먹이면 정신을 차리라고 했다.
추운 겨울날인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으니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묻었다.
있었던 그대로 말씀드리니 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신자까지 그런 현상에 축복 기도를 해주면 부러워했다.

 

그런 일을 꺾은 후부터 더욱더 나의 종교는 오직 기독교라고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학교도 기독교 재단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 전도사 담임 선생님과 멀어지면서 차츰 교회에 나가는 횟수가 적어졌고 그 후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고등학교까지도 기독교 재단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교회는 계속 다니지 않았으나 마음에는 늘 내 종교는 기독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상태라서 아버지 천도재에서 법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혼자 배회하고 있었든 것이다.

 

밖에서 배회하다가 남자 화장실에서 어느 남자 목소리가 숨죽인 목소리로 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우리 큰 오빠이었다.
수술 중인 아내 곁에 있지 못하고 병원에서 오신 어머니마저도 집에 누워계시니 장남의 도리로 아버지 천도재에 참석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온통 올케언니의 수술을 걱정했는지 잘못될까 봐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남몰래 남자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우연히 그 장면을 보게 된 난 어찌할 봐 모를 만큼 당황스럽고 심한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평소 말 없고 점잖은 큰오빠가 우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에 생사에서 헤매는 심각한 올케언니 수술 성공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종교를 따질 것보다는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그래서 큰 용기를 내어 스스로 법당으로 들어가 내 생전 처음으로 부처님 앞에 엎드려 소원을 기도했다.
< 난 지금까지 당신을 무서워했고 하나님 이외는 우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제발 우리 올케언니를 살려주세요. 그럼 앞으로 당신을 믿겠습니다>

다행히 올케언니의 수술이 한고비 넘었고 성공적이라 소식이 전해 왔을 때 큰오빠는 환하게 웃었지만, 난 반대로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 앞으로 나는 어쩌면 좋겠노…)
옛말에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에 마음이 바뀐 것처럼…

 

그런 일을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하고 내 가슴에 무거운 숙제를 꼭 끌어안은 체 그대로 오랫동안 살다가 훗날 어떤 계기가 또 생기면서 어머니 말씀처럼 불교와 인연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 다음에 나올 이야기라서 생략…)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그리고 나 역시 자식을 키우다 보니 비로소 철없던 시절 아버지에게 잘못 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꿈에라도 보고 싶어 간절했는데 딱 한 번 내 꿈에 나타나셨다.
아주 큰 궁궐 같은 배경 앞에서 깨끗한 하얀 옷을 입고서 내가 그토록 원했던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환한 미소로 웃으시면 이제 보기 좋으냐는 뜻처럼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 이후 현재까지도 단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헬스클럽 경영은 그가 전처럼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운동하는 오전 시간만 헬스클럽에 머물고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집에서 아이들과 있겠다는 약속하고 헬스클럽 운영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시아버님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아침 눈을 뜨시면 모닝커피 시작해 하루에 6잔~ 7잔을 드시고 담배도 너무 피운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혈관이 막혀 주무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들 둘만 두신 시아버지는 철없는 막내며느리를 당신의 딸처럼 화장품, 옷, 신발, 란제리, 예쁜 악세사리까지도 예쁜 것만 보면 사다 주신 더할 나위 없이 다정다감한 분이다.

 

시아버지는 생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젊은 시절 돌아가신 형님 (시 숙부님) 제사를 형수( 시 숙모님)이 재혼하면서 제사가 없어진 것에 안타까워하셨는데 한국으로 귀환하는 그 해부터 시아버지께서 형님 제사를 모셨는데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시부모님 제사는 큰집에서 모시고 시숙부님 제사는 앞으로 너의 집에서 모시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시어 지금도 시숙부님 제사를 캐나다에서도 모시고 있다.

 

 

어느 일요일 봄날,

우리 집 부근 동네 산으로 아침 산책을 하였다.
그곳에서 우리 헬스클럽 회원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일요일 아침마다 동네 산에서 아침 운동하러 나온다고 하면서 그곳의 여러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나에게 일요일 새벽 이곳에서 에어로빅 운동 봉사를 좀 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였다.
일요일 아침은 모처럼 늦잠도 자고 푹 쉬고 싶은 마음에 순간 망설임은 있었으나 나이 드신 분들의 간절한 눈빛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약속대로 일요일 아침 일찍 아주 무거운 카세트를 들고 동네 야산으로 올라갔다.
산이 온통 울퉁불퉁해 적당한 장소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정당한 장소를 찾아 소수의 사람과 에어로빅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차츰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요즘이야 어디 가나 운동 시설이 잘되어 있어 에어로빅, 체조 등등 하는 곳도 많지만, 옛날 그 당시에는 에어로빅 운동을 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흥미로운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넓은 장소와 높은 교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갈수록 계속 복잡해지면서 불만들이 구청까지 민원이 들어갔는지 다음 일요일 아침에 나가보니 구청에서 불도저로 넓은 평평한 장소로 정비해 주었고 또한 높은 교단에는 '대구 00 전문대학 기증'이라고 적혀 있었다.
새로 단장한 후부터 다른 먼 곳에서 온 주민들까지 합세하면서 일요일 날이면 산을 가득 메울 만큼 에어로빅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어느 날 우리 집 도우미 아주머니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그만두게 되었다.
아주머니가 계시어 그동안 편안해 아침 일찍 산으로 올 수 있었는데 그 시각에 이제는 아침 식사 준비를 해야만 했다.
몇 번이나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를 구해 보았으나 예전 아주머니 같지 않았고 결국 출장 도우미 아주머니로 바꾸면서 일요일 새벽에는 나갈 수 없었다.

여러 간부 어르신들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내 처지를 말씀드렸다.
아직 어린 아기까지 있는 내 입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매우 아쉬워하는 분들에게 다른 에어로빅 선생님을 소개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몇 달 동안 운동을 함께한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는 마지막 날에는 구청장님이 직접 오시어 이곳이 "00 주민 체육공원"으로 지정된 것을 축하 발표하고 이에 공헌한 감사패 상을 많은 주민 앞에서 박수를 받으면서 받게 되었다.

몇 달 동안 봉사해준 댓가에 적은 돈이지만 성의라면 아무리 사양을 하여도 막무가내에 봉투를 주셨다.
도저히 그 돈을 받을 수 없어 주신 돈에 조금 많은 돈을 합쳐서 음악 장비를 구매해 그곳에다 기증했다.
내 작은 봉사에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니 잘한 것 같았고 보람도 느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날에 헬스클럽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었다.
대구 00 전문대학 학장실이라면 대학교에 방문해 달라고 한다.
그때 산에서 교단을 기증한 대구 00 전문 대학교이라 바로 기억이 났다.
< 학장님께서 선생님이 꼭, 학교에 방문해 주길 바라는데요>
< 혹시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나요? >
그녀는 학장님의 전달이라면 약속한 날짜와 시간에 꼭, 와 달라고 당부한다.
(무슨 일일까?)

 

약속된 날에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산에서 교단도 기증해 주신 분이라 그간 안부 인사라도 드리자 하는 마음으로 대학교에 방문하였다.
나이가 드신 학장님께서 매우 나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체육과 교수님에게 나를 칭찬하면서 소개하셨다.
운동도 잘 가르치고, 마지막 떠나면서까지도 받은 수고비에 본인 자비를 많이 보태어 음악 장비까지 기증하는 한 것에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하시고 실력과 인성까지 겸비한 선생님이니 더할 나위 없이 우리 학교에 초빙하고 싶다고 이력서를 한 번 제출해 보라고 하셨다.
별생각 없이 왔다가 예기치 않은 제안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랐다.
학장님은 당연히 내가 체육과에 졸업한 학사 또는 석사인 줄 착각하신 것 같았다.
고졸 학력으로 전문대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불가능함에 그 자리에서 내 학력을 말씀드릴 수도 없었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학장님과 체육과 교수님은 내 전후 사정을 모르시니 남들은 못 들어가 안달인 대학교 강의에 좋아할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셨다가 바로 거절하는 것에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매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셨다.
더는 그곳에서 곤경에 빠질 수가 없어서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두 분의 유감의 눈빛을 뒤로한 체 꽁무니 빼듯이 황급히 학장실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어깨가 축 늘어져 맥없이 고개를 떨구면 몇 번이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자신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예전 주민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처음 느꼈던 그때처럼…

다시 두 번째로 또 깨닫게 되었다.

그와 결혼 전에 대학은 결혼 후에라도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있었으나, 결혼 후에 아이 네 명이나 둔 아줌마가 대학이란 도저히 가당치도 않아서 완전히 포기하고 잊고 살았다.

그랬는데~ 그것이 첫 번째 동기 시발점이 되었고 또다른 동기가 더 부여되면서 그해 가을에 큰 용기를 가지고 대학 입시 학원에 등록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30살에 아줌마 대학생이 되면서 내 삶에 또다른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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