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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56화) 나의 자서전 일곱 번째 이야기 (주택에 살 적의 이야기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5. 5. 4. 10:23

 

 

(56화) 나의 자서전 일곱 번째 이야기 (주택에 살 적의 이야기들)

 

 

막상 아들을 출산하고 보니 양수검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아들을 출산했다면 좀 더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을 텐데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던 사실에 "정말 그 말 맞네!"라며 한 번 더 증명하듯이 다들 반응들이 그냥 그랬다.

나 역시 미리 남자아이 옷에 맞추어 색깔도 남자 것으로 모든 준비를 해 두었으나 그래도 출산까지는 초조한 점도 있었고, 아들이라는 말에 이르러서야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그도 내 앞에서 좋아하는 표시를 낼 수 없는 것이 아들이 필요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스스로 정관 불임수술까지 받았고 아들을 고집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했으니 기뻐하는 속내를 드러내 놓지 않았고 별다른 것이 아니 척인 양 아들과 상관없이 이미 태어난 자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잘 키워야 한다는 말만 했다.

 시부모님께서도 뱃속에 든 아이는 낳아봐야 안다고 하셨지만 먼저 들었던 말이 있어 어느 정도 지레짐작을 하고 계시어 생각처럼 놀라워하지 않았고 그래도 아들 손주에 가장 기뻐하시는 분은 역시 시어머니이셨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늘 그랬다.

나를 처음 본 약혼식 때부터 냉소하셨고 결혼 후에도 큰집 동서 형님은 같은 해에 아들만 세 명을 출산할 때마다 미운 오리새끼처럼 난 반대로 줄줄이 딸만 세 명을 그해에 출산하였으니 하나에서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면 불만의 차가운 눈초리만 노골적으로 주셨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리셨다.

큰집 손주들과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큰집 아들 셋 손주만 안아보시고 우리 세 딸은 한 번도 안아주신 적이 없어 늘 섭섭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 한 번씩 오셔도 손녀에게는 과자 하나 사 주신 적이 없을 정도 편견이 매우 심했다.
그런 분이 우리 집에도 손자를 보신 게 무척 안심된다며 매우 기뻐하시고 우리 집에도 하루 건너오셨다.

(하지만 그 후에도 차별 대우하시어 맛있는 것은 손자에게만 주시고 손녀는 여전히 밀어내셨다)

 

아이 네 명 육아에 힘들어하는 나에게 그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두자고 하였다.

그래서 도우미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어 함께 살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나의 육아를 믿지 못하시고 전화로 매일 아주머니에게 손주 안부를 묻어보셨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산모가 모유가 적어서 걱정이라는 점에 그점에 심각하게 생각하시고 당장 재래시장에 두 분이 가시어 아주 큰 가물치를 사 오셨다.
보기만 해도 무섭게 생긴 끔찍한 큰 가물치를 살아있는 통째로 정성껏 국을 만들어야 아주 좋은 약 효과가 있다며 내일 다시 검사하러 오시겠다고 하셨다.
가물치를 몇 시간 욕조에 담아두고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아 걱정스러운 근심만 하다가 가물치보다 더 무서운 시어머니가 겁이 나서 용기를 내어 해 보기로 하였다.

불에 달건 찜통에 참기름 한 병을 다 붓고 무거운 대형 가물치 겨우 큰 찜통에 밀어 넣고 아주머니와 둘이서 뚜껑을 힘껏 눌렸는데도 가물치는 힘이 대단해 눈 깜짝할 사이에 뜨거운 찜통에서 튀어나왔다.
반쯤 허물이 벗긴 진 체 식탁 아래에서 살아서 지그재그 자로 꿈들 꿈들 돌아다닌 모습에 혼비백산해 아주머니와 나는 안간힘을 쓰면 잡았던 그 기억으로 도저히 가물치 국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어머니 보는 앞에서 조선 시대의 장녹수가 사약을 마신 것처럼 속이 뒤틀리고 울렁울렁 대는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한 사발씩 마셔야 했다.

오직 손자의 모유가 풍부해져야 한다는 그 하나 이유로…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해 가물치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고 온 몸이 움찔움찔해진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신 후에는 방도 부족하고 우리 아파트에서 자살한 남자의 트라우마도 그렇고 이사하기로 하였다.
부동산 가서 집을 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출근하는 그가 나에게 어디 나가느냐고 묻었다.
< 부동산에 가 보려고요. >
< 그런 것이라면 갈 필요 없어. 여기 주소와 약도를 줄 테니 시간 날 때 찾아가 봐.>
< 여기가 어디 데요?>
< 이사갈 우리 집.>
< … >
띵~ 하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런 식이다.
우리가 서로 처음 만난 날부터 시작해 그 후 약혼식, 조기 결혼식, 공무원 사표, 대구 시가집으로 이사, 현재 이사까지도 무조건 혼자서 다 결정해 버린다.

(요즘 같으면 간 큰 남자라고 백번 이혼감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가 하는 대로 따라가는 바보처럼 살았던 시절이었다)

 

이사만큼은 시어머니께서 노파심으로 말씀하셨다.

귀한 손자 태어난 해에 이사하려면 집 방위도 좀 알아보고 날짜도 좋은 날을 택해야 한다면 함부로 이사를 결정하는 것에 당신의 아들에게 한마디 나물랬다.

아무리 확정된 집이라도 방위가 좋은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이사 날짜도 좋은 날을 뽑아서 가라고 하시어 대구에서 유명한 철학관을 남들에게 물어 묻어서 혼자 찾아가게 되었다.

그 철학 인은 우리의 생년월일 등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단번에 나에게 이상한 말을 하였다.
< 지금 집 방위가 문제가 아니야. 더 심각한 일이 당신에게 닫칠 거야…>
<…예? >
< 아이 엄마가 30대 후반에 죽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런 비슷한 사달이 일어날 거야>
철학 인의 충격적인 말에 놀라서 몹시 꺼림칙했으나 어떻게든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비싼 부적 팔아먹으려고 괜히 하는 상술일 거야. 안 들은 것보다 못 할 기분만 나쁘잖아. >


(그때는 그냥 무시한 말이였는데 30대 후반 되는 해에 정말 그런 일이 생겼다. 다음에 나올 이야기임으로 생략…)

 

신축한 큰 주택으로 이사 하였다.
(그 시절은 그의 사업도 최고로 번창할 때라서 경제적으로 제일 부유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는 동안 가장 최상의 고급 주택이었으나 미리 한마디를 한다면 세상일은 아무도 앞날을 알 수 없듯이 계속 그렇지 못했다. 다음에 나올 이야기임으로 생략…)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겨울날에 출근하는 그를 따라나섰다.
< 은행에 볼일이 있는데 가는 길에 나를 좀 내려줘요>
그날은 눈이 많이 온 날이라 택시 잡기도 매우 힘들었다.
은행 부근에 먼저 내려면서 도로가 상당히 미끄러워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내디디고 걸었다.

그날 저녁 그가 퇴근해 와서 나를 힐끗 위아래로 계속 쳐다 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ㅎㅎㅎ 아무래도 네가 살을 좀 빼야겠어. 난 그 정도 심각한 줄 몰랐는데 오늘 아침 택시 기사 아저씨가 네가 조심해 걷는 것을 보고는 날 걱정하더라. 만삭 임산부가 눈길에 혹시 넘어지면 매우 위험할 것 같다며… ㅎㅎㅎ>

그 당시 내가 그랬다.
출산 백일이 지났는데도 곧, 아이를 출산 하러 갈 임산부 배처럼 조금도 꺼지지 않았다.
그 원인은 모유에 좋은 음식은 죄다 먹으면서 집안일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다 해주어 편한 상태로 지내고 보니 무거운 임산부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건강마저 매우 좋지 못해서 그와 함께 종합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물론 예상했던 대로 검사 결과가 좋게 나올 일이 없었다.
심장 부담이 매우 심각하고 위험해 운동이 시급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내가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라 헬스클럽 외출보다 집 주변 돌면서 운동하라고 그런다.
며칠은 그렇게 열심히 하였으나 그것은 지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유 때문에 다이어트를 할 수 없는 상태이고 내 게으름은 오늘은 날씨가 춥네, 비가 오네, 바람이 부네! 이런저런 여러 핑계로 운동이 지속하지 않았다.

그도 더는 내 게으름으로는 운동이 되지 않는 것에 받아드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건강이 우선이니 아주머니가 집에 계시어 아이를 돌봐 주어 할 수 없이 헬스클럽에 나가는 것을 끝내 허락하게 되었다. 
그 대신 여성전용 헬스클럽에 나가는 조건이 붙었다.

 

 

그것은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나를 위한 진정한 외출이 시작되었고 내 인생에서 그토록 다르게 살고 싶다고 한 내 바람의 자아의식 자물쇠를 열게 만들어준 동기 계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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