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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52화) 나의 자서전 여섯 번째 이야기 (아파트 살 적의 친구 이야기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4. 6. 25. 16:01


(52화) 여섯 번째 이야기 - 아파트 살 적의 친구 이야기들


 


대구에 직장을 둔 친구들은 아직도 미혼인데 난 벌써 세 명의 자녀를 둔 엄마가 되었다.
외출조차 할 수 없는 내 처지를 잘 알기에 친구들이 우리 아파트에서 커피를 마시면 수다 떨면 놀았다.
엄마가 된 모습으로 우리 아이들 챙겨 먹이고 보살피는 내 모습은 볼수록 아주 신기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나를 보아온 친구들이라 내가 그간 남자를 아주 우습게 여겼고 유난히 별나서 도저히 연애와 결혼은 절대 못 할 것 같았는데, 제일 먼저 약혼하고, 결혼해 그리고 남편에게 꼭 잡혀 찍소리 못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데 허물면 동창생들이 우리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아주 재미있다는 어조로 깔깔 되었다.
< 네가 처음 네 남편과 사귈 때부터 알아봤어! 넌 그때도 교장 선생님을 사귄 것 같다고 우리가 그랬잖아.>
< 맞아! 넌 여전히 교장 선생님 밑에서 교훈 받고 사는 것 같아! ㅋㅋㅋ>

 

그도 우리 친구들과 여고 졸업 동시부터 허물없이 지낸 사이이며 당시 나 외는 남자 친구가 없는 친구들은 우리와 함께 어울리다 보니 돈 없는 고시생 그가 내 친구들 커피값까지 지급하느라 전당포에 맡긴 시계를 날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도 친구를 "이모"라고 부르면 잘 따랐다.

 

도청에 다니는 A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남동생과 부산에서 하숙했었다.
포항에서 선박 몇 채를 가지고 있는 부잣집 딸이며 생긴 외모가 외국인 같은 얼굴에 아주 세련된 친구이다.

A 친구가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고 우리 부부와 인사도 나눌 겸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그동안 남자친구가 없었던 친구이라 그 말이 무척 반가웠다.

 

우리 부부와 그들 커플과 함께 저녁 식사도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 그에게 궁금해서 물었다.
< 남자가 보는 눈은 어때요?>
< … >
그가 침묵할 뿐 선뜩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떠냐고요?>
남자가 왠지 진실성이 없어 보여서 아주 찜찜하다면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그 후 친구가 들려준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결혼할 남자가 군대 가기 전에 어느 아가씨와 동거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내아이 생겨다는 사실에 친구가 충격을 받았고 그 남자와 단호하게 헤어졌는데 친구를 스토커처럼 뒤 따라다니면 괴롭힌다고 한다.
그 남자와 악연은 끝나지 않고 양부모님들 모셔놓은 맞선 보는 자리에 어김없이 나타나 "자기와 놀아난 그런 사이이라면서" 계속해서 방해를 놓는다는 것이다.
옛날 그 시절은 소문에 아주 민감한 시절이라 부모님 보기가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고 했다.
맞선을 보는 자리라면 전국 어디서나 불쑥 나타나는 물귀신 같은 그 남자가 살아있는 이상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없다면 결혼도 포기한다면 울었다.
또한, 그 남자를 만나주지 않자 친구 직장까지 매일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도청에서도 끝내 사표를 내고 대구를 떠나고 말았다.

 

 

대구은행에 다니는 B 친구는 대도시 미스 진으로 뽑힌 매우 예쁜 친구이다.
나와 무용한 친구이며 같은 대학교 무용과에 함께 합격하고도 우리 집 가정 상 입학할 수 없었던 그 대학교 빼지를 달고 첫 방학 부산에 왔을 때 친구를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하면 가슴앓이했었다.
(그 시절에는 대학교 빼지를 달고 다녔다.)

예쁜 미모는 맞선을 보자마자 서울 강남 부잣집 외아들과 결혼하고 대구를 떠났다.
결혼반지 1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때 처음 보았다.
그 시절 서울 강남 논현동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영화에서 본 어리어리한 저택에 친구의 자가용 운전기사가 차 안에서 리모컨 조절로 차고 셔터가 올리는 모습 보고 입을 떡 벌린 체 놀랬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사는 친구를 동경의 눈초리로 부러워하니 친구가 그런다.
< 내가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얼마나 심하게 하는지 네가 알면 차라리 돈이 좀 없더라도 마음 편한 것이 백배 낫다고 할 것이야.>
그래서 그런가?
예쁜 친구 얼굴은 결혼 후에 반쪽처럼 보였고 눈 밑에는 거무스름한 다크서클이 낀 체 사는 것 같았다.

 

두 명의 친구들이 그렇게 대구를 떠난 후에 동네 아파트 아줌마들과 어울리면 수다를 떨고 있었던 어느 날 서울에 사는 C 친구가 나를 찾아 대구에 왔었다.

 

C 친구도 중학교 때부터 친구이다.

20살 나이일 때 우리네 손가락에 구리반지도 낄 수 없었던 시절에도 C 친구는 작은 다이아몬드 박힌 반지를 끼고 다녔다.
우린 비싼 옷이 아니 지라도 몇 날 며칠 부모님에게 졸라야만 살 둥 말 둥 한 시절에 C 친구는 외제 명품 수입품 옷을 걸치고 명품 가방을 메고 다녔다.
볼링장도 호텔 안에 있을 당시에 호텔 볼링장을 매일 들락날락 거리는 친구 모습은 우리네 사는 것과 거리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친구는 아주 어릴 때 부산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돈 많은 양아버지와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재혼한 두 분 사이에 새 남매 동생이 생겼는데 홀로 외톨박이가 된 딸에게 친구 어머니는 사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돈으로 매우 사치스럽게 키웠다고 한다.
C 친구는 여고 시절 공부 실력도 별로였으나 서울에 있는 대학 들어갈 때도 대학교에 셔틀버스 한 대를 증정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C 친구 남편은 서울 명문대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는 가난한 남자지만, 똑똑한 머리 하나 믿고 결혼한다고 하였다.
친구네 집에서 결혼식 비용과 서울의 비싼 맨션아파트에 집 가구 일체를 마련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는 세 명의 시누이 동생 결혼 자금도 친정에서 도와서 결혼식 하게 하였단다.
그 후 친구 남편은 대기업에 사표를 내면서 창업 사업 자금을 요구했단다.
이래저래 많은 핑계를 대면 무한정 친정에 돈만 요구하는 것을 본 양아버지가 처가의 돈을 보고 결혼한 남자라고 결국 이혼을 시켰다.
그들 부부 사이에 3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양아버지가 두고 나오라고 그랬단다.
친구 부모님이 사업에 부도나고 친구마저 돈을 몽땅 탕진하고 철저히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정신이 들더란다.
아들을 찾아보았으나 그 사이 남편은 총각처럼 행사하면 또 다른 부잣집 딸과 결혼하면서 비열하게 아들을 아동 복지로 통해 외국에 입양 보내버려 아들 행방을 도저히 찾을 수도 없었단다.
친구는 돈을 쓰는 법만 알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없다면 사는 것이 무척 고생스럽고 뒤엉킨 자기 인생을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 그때 어린 자식을 키우는 처지에서 친구 사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

 

그 시절 친구 이야기들이다.

 

D 친구 이야기.
역시 중고등교를 함께한 나의 절친이다.
옛날 적에 우리네 어머니 옷차림은 변변치 못한 차림일 때 D 친구 어머니가 중학교에 오시면 무슨 영화배우가 온 것처럼 교실 창밖으로 내다보고, 친구 어머니를 구경하려 갈 정도로 아주 화려한 멋쟁이 옷차림에 고급 양산을 비스듬히 쓰시고 학교에 오셨다.
중학교 어린 나이라 멋쟁이 어머니가 부러웠다.

D 친구가 결혼할 적에도 역시나 어머니는 부산 최고의 중매쟁이를 동원 시켜 어느 국회의원 외아들과 맞선을 보고 친구를 결혼시켰다.
그 시절 사람들이 꽉 들어찬 호텔에서 큰 케이크 자르는 장면은 영화에서나 보는 광경이라 모든 친구가 부러워했다.

D 친구가 혼인 신고도 하기 전에 국회의원 시아버지가 어떤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당하는 바람에 시가는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새 시어머니는 서울에서 큰 요정을 하신 분인데 남편의 어머니 본처를 내쫓고 안방 차지를 하고 있다가 시아버지가 구속되자 재산 몽땅 빼돌려 출행량을 쳤단다.
멋 부리기만 할 줄 아는 어설픈 친구 남편은 새 시어머니에게 돈 한 푼도 건지지 못한 채 현실을 비관하며 강남 술집에서 매일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단다.
어느새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고 임신 중인 친구가 미래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취업 말만 끄집어 내어도 "내가 000 국회의원 아들인데 어디 그런 곳에서 취업하느냐? " 했단다.
이래저래 한국에서 창피해 살 수 없다면 임신한 친구를 무책임하게 버리고 외국으로 나가버렸다.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친구는 딸을 낳았는데 남편과 혼인신고가 되지 않아 아이 출생 신고를 할 수 없었단다.
몇 년 동안 남편을 기다리다가 친구 어머니는 더는 딸의 앞날을 망칠 수 없다면 외손녀를 아버지 친자로 호적에 올리고 다른 부잣집 남자와 맞선을 보게 하였다.
그 남자가 친구와 결혼을 서둘러 모든 사연을 고백했는데도 과거를 꺼리지 않아 친구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라고 부추기며 친구를 등 떠밀어 다시 시집을 보냈다.
결혼 후 호적상으로 둘 다 미혼이지만 알고 보니 남편도 철없는 시절 동거녀에게 두 남매가 있었고 아이들이 들어 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친구 어머니는 딸의 결혼 대상을 무조건 조건만 앞세운 사례가 되었고, 친구가 낳은 딸은 호적상 친정 동생이 되었으며 그 사실을 모르고 자란 딸이 사춘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복잡한 사연이 많았다.)

 

 

E 친구 이야기.
내 자서전 앞장에 나왔던 벚꽃 축제 때 높은 직위 아버지 덕분에 관광 배를 탈 수 있었던 나의 절친이다.
E 친구는 대나무처럼 매우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마저도 아버지 성격에 못 이겨내시고 친구가 사춘기 시절 끝내 두 분이 이혼하셨다.
아버지가 지나치게 엄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자란 탓인지 자기 의사를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한 친구를 나와 달라서 아주 착하고 순해서 그런 줄 알았다.
행정고시 합격한 오빠마저도 꼭, 아버지를 닮아서 집에서 누구와 대화할 상대가 없는 집에서 늘 쓸쓸하게 자랐다.

E 친구 남편은 집안 배경을 보고 결혼한 것인지 아버지와 오빠에게 자기를 좋은 자리로 옮겨달라고 부탁하라면 매일 친정 집으로 가라며 친구 등을 떠밀어 단다.
친정에서도 자기 의사를 말 못하는 친구를 남편은 바보 취급하면 무시하고, 괴롭히며 구타를 했단다.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 못한 친구는 속병으로 키운 것인지 암이 발생해 20대 후반 젊은 나이에 어린 두 아들만 세상에 두고 일찍 하늘나라로 가 버린 친구 영정 사진 앞에서 목놓아 울어야만 했었다.
(자식을 지나치게 엄하게 키운 부모님에게 교훈이 된 사례가 되었다.)

 

F 친구 이야기.
역시 중고등교 함께한 내 절친이며 모나리자 분위기 미소를 닮은 친구이다.
F 친구 집에는 중학교 시절부터 하숙하는 동갑내기 시골 남학생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우리가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시골 남학생은 여드름 난 빨간색 얼굴로 부끄러워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바보 같다고 웃고 했었다.

친구는 캐나다에서 매우 성공한 교포 아들과 맞선을 보고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때까지도 작은 회사에 다니면서 하숙하던 시골 남학생? 이 어느 날 친구 부모님에게 망설이는 목소리로 그랬단다.
오직 친구만 바라보고 흠모하면서 살아왔다면 친구와 결혼하고자 적은 월급이지만 알뜰하게 모은 예금통장을 정중히 내미는 모습에 부모님과 친구가 그만 감동하였단다.
가난한 시골 남학생? 이지만, 어쩌면 딸을 굳이 먼 타국으로 시집 보내는 것보다는 중학교 때부터 착실하고 성실한 점은 보아 온 터라 더 괜찮을 것 같다면 결혼을 시켰다.
우리는 시골 남학생? 과 결혼한다는 말에 모두들 너무 어이없어 펄쩍 뛰고 말리기도 했었다.

늘 온난한 미소를 품은 고운 모나리자를 닮았던 친구는 결혼 후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우 억측스러운 모양새로 이것저것 안 하는 것 없이 돈을 모았고 심지어 친정 돈까지 빌리면 남편 사업 뒷바라지해서 아무튼 사업 기반을 잡았고 시골 시부모님도 모시고 왔고, 시누이들도 시집보내고 그렇게 잘 사는 줄 알았다.
그렇게 친구가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있을 동안 놀랍게도 공장 경리 아가씨와 불륜을 저질러 그 사이 이중살림을 하면서 딸을 낳았더란다.
남편의 순정에 감동하여 좋은 조건을 다 버리고 결혼을 선택했는데 남편 배신감에 친정 부모님과 친구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끝내 헤어지지 않고 부모님에게 빌린 돈 마저도 그 여자에게 몽땅 빼돌리며 또 둘째 딸을 낳은 것에 너무나 기가 막혀 더는 어쩔 수 없다면 이혼하고 말았다.
친구와 남편 사이에 어린 두 딸과 남편의 귀한 삼대 외동 아들있었다.
(즉, 친구 남편은 딸 네 명과 아들을 둔 것이다.)
계모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다고 세 명 자녀를 데리고 나왔다.
걱정하는 친정부모님 곁을 떠나 다른 작은 도시에서 살면서 남편 도움 없이 자식을 키우면 돈을 아끼느라 추운 냉방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텅빈 마음 한구석에는 남편의 배신감에 마음이 항상 아팠다고 한다.
힘든 외로움과 고독에서 속병을 앓은 친구는 암이 생겨 온난한 미소 모나리자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초라한 헝클어진 한 줌의 머리카락만 남은 체 젊은 나이에 세 아이만 세상에 두고 또 하늘나라로 가 버린 두 번째 친구 영정 사진을 보면서 너무 불쌍해 목놓아 또 울어야만 했다.

 

G 친구 이야기.
옛날 11명의 형제 속에서 막내로 태어나 G 친구는 어릴 적에 부모님 돌아가시어 큰 오빠 집에서 큰 올케언니 눈치를 받으면 공부한 친구이다.

친구가 결혼하고 큰 올케언니에게 보라듯이 잘 사는 부자가 꼭, 되고 싶어 했다.
서울 남대문 시장 바닥에서 안 해 본 것이 없을 만큼 악바리 똑순이는 악착스럽게 돈만 모으고 살았다.
고생 끝에 드디어 집세가 제법 많이 나오는 건물도 사게 되었고 예쁜 외동딸은 서울 예고에 입학하면서 우리나라 유명한 과자 회사 광고 모델이 되었다.
친구의 꿈이 모두 이루었다고 매우 좋아했는데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예쁜 딸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친구는 넋이 나간 채 죽은 딸 사진을 매일 끌어안고 슬퍼하였다.
내가 한 번씩 그랬다.
<이미 보낸 딸 사진 그만 안고 자라고…>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던 친구는 슬픔도 너무 지나친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고생 탓인지 몸속에 암이 생겼고 이미 병원에서 전연 가망성이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친구 남편은 자식과 아내를 모두 하늘나라로 보낼 수 없다며 재산도 포기한 체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재배한 생식으로 아내를 정성 끝 돌보면 암과 투쟁을 하였다.
남편의 적극적인 보살핌인지 기적처럼 살아나 병원에서도 무척 놀랐다고 한다.
병이 나아서 서울로 돌아온 친구는 강원도로 들어간 사이에 집세가 통장에 전연 들어오지 않은 것에 격분하게 되었고 세입자들과 싸우게 되면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그동안 생식으로 못 먹었던 맛있는 인스탄트 음식까지 먹게 되었단다.
다시 암의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온몸에 급속히 전이되었고 더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을 만큼 죽음의 문턱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 내가 너무 보고 싶다면 아픈 몸을 이끌고 대구 우리 집에 왔었다.
아픈 고통을 안간힘을 쓰며 참느라 스스로 주사를 놓는 모습과 우리 집 욕실에서 숨이 멎을 것처럼 헐떡이며 토하는 친구 얼굴은 대리석처럼 차가와 너무 가엾어 감싸고 울었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리고 그 친구도 세 번째 하늘나라로 보내고 친구의 영정 사진 앞에서 또 목놓아 울어야만 했다.

 

우리의 어린 시절 낙엽만 뒹구는 것만 봐도 웃는다는 시절에 우리 9명은 항상 떼 지어 몰려다니던 어느 여름날 학교 교정에서 사진사 권유로 그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계단에서 한 줄로 쭉 서 하얀 교복 차림에 서로 예쁘게 찍히고자 안달을 내었다.

얼굴이 안 나올까 봐 얼굴을 옆으로 쭉 내밀고 있는 친구, 두 팔을 머리 위로 크게 벌리고 웃고 있는 친구, 예쁜 척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있는 친구, 문화소녀처럼 새침한 척 찍은 친구, 앞 친구 목을 장난삼아 감은 친구 등등…

 

 

그 시절에는 우리에게 앞으로 어떤 운명이 닥쳐올 줄 그 누구도 몰랐기 때문에 그날은 마냥 천진난만하게

행복한 얼굴로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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