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좋은 음악이 날마다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든다

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47화) 나의 자서전 - 다섯 번째 어설픈 재태크 부분에서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2. 11. 9. 12:36

 

나의 자서전 -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을 때

 

아이가 둘만 되어도 세들어 가기 무척 힘든 시절이라 만삭의 몸으로 빨리 우리 집을 구하고 싶었다.

그는 대통령 수행 일로 항상 바쁜 근무 중이라 집을 함께 보려 다닐 형편도 아니고 만삭의 몸으로 고생하지 말라는 말에 내가 알아서 정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우리 집을 가진다는 꿈에 가진 돈은 얼마 되지 않아도 마음은 그림 같은 집을 사고 싶었지만, 애당초 불가능한 현실에 부딪혀 접기로 했다.

집을 보는 안목이 없었고 곰곰이 입지 조건도 따질 줄 몰랐고, 그냥 우리 아이가 뛰어놀 수 있는 마당 있는 집에만 온통 초점을 두고 있었다.

서울 신장위동에서 동네 부동산 아저씨가 권유하는 집은 내가 가진 적은 돈에 비해서 마당이 제법 넓은 집이었고 남에게 뺏기기 전에 서둘러 빨리 계약하도록 부추이자 그 충동에 휩싸이어 누구의 상담과 조언도 한 번 들어보지 않은 체 또다시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덜컹 계약하고 말았다.

 

이사 가는 날이 되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짐을 풀어놓으면서 불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대문 앞에 이삿짐을 주차할 수 없는 좁은 골목에 집도 도로 아래에 있어 짐을 일일이 안고 계단에서 내려와도 다시 리어커가 제대로 안 들어가는 좁은 골목과 집과 집 사이 이중 대문 안에 들어간 집이라 수고비를 두 배로 달라고 했다.

이삿짐 아저씨 지적에 이제야 단점들이 보이면서 비로소 좀 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고 내 성격대로 대충 둘러본 것에 한심한 후회를 하였다.

 

이사 들어온 후에 옆집 아주머니도 말했다.

주인은 몇 년간 매매 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동네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하는 분이 몇 년간 이 집에서 전세로 산 것이며 집 관리도 엉망이고 먼지와 거미줄로 방치된 집을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으니, 결론적으로 남에게 절대 빼앗길 염려가 없다는 집이다.

전세 사시는 분도 계약 당시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고, 집주인도 아주 쉽게 집값을 깎아준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미용실이나 집이나 매매가 쉽게 되지 않은 이유가 다 있는 법인데 가진 돈에만 생각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것들만 나는 계약한 것이다.

 

어쨌거나 인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마당 넓은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집의 수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안방 한 칸만 우리가 쓰고 두 칸은 노부부에게 전세를 놓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처음 이 집을 지은 사람이 비싼 자연석으로 정원을 꾸며 놓은 흔적이 있어 더럽게 방치된 정원석을 깨끗이 물청소로 닦아 재정비 배치하고 마당 한가운데에 큰 웅덩이를 파고 제법 큰 연못으로 만들었다.

물고기도 비싸 한강에 나가서 낚시꾼에게 얻기나 사기나 해서 금붕어와 함께 넣어 주었다.

정원 잔디도 비싸 임신한 무거운 몸으로 몇 날 며칠 동안 동네 뒷동산에서 집 마당으로 무리하며 양동이로 옮겨 심어 정원 전체를 가득 메웠다.

봄이면 할미꽃도 피고 덕분에 쑥은 집에서 캐 먹을 수 있었다.

 

단점인 불편한 갑갑한 이중 철문을 몽땅 때어 버리고 통로 사이에 아치형 빨간색 덩굴장미로 전체덮었고 나지막한 하얀색 나무 앞대문을 만들어 정원과 연결해 지나가는 사람들이 훤히 보이게 했다.

키가 낮은 앞대문에서 아치형 뒤덮인 덩굴장미 숲 안으로 들어서면 제법 큰 연못, 비싼 자연석, 꽃과 나무, 초록색 잔디로 마감한 예쁜 정원과 깨끗하게 페인트칠한 아담한 러브 하우스 변신한 집이라 동네 소문이 좋게 나면서 허접하고 더러웠던 집은 대조적으로 다르게 꾸며져 동네 분들이 구경하러 많이 오셨다.

사실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재정비해서 꾸민 것인데…

암튼, 처음으로 우리 집이 생겼다는 것에 세상을 다 가진듯이 뿌듯한 행복감이 생겼다.

 

친정어머니께서 둘째 아기 출산을 돕기 위해 고등학생인 막내 여동생과 함께 오셨다.

천방지축 철부지 말괄량이 어린 딸을 시집보낼 때만 해도 걱정에 잠 못 이룬 날도 많았는데 그런 딸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알뜰하게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한 것이라 무척 대견스럽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둘째 아이 출산 날짜를 잘못 알아 너무 일찍 오셨어, 하루도 집을 비우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형편과 동생 방학 개학 날짜까지 맞물러 무척 고민하셨다.

산부인과 의사와 의논 끝에 예정날짜 15일 앞두고 무모한 유도 분만을 하기로 하고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 없는 둘째 아기를 억지 유도 분만하느라 반죽음 상태로 24살 여름에 둘째 딸을 출산하였다.

 

옆집과 우리 집 작은 장독대는 붙어 있어 옆집 고양이와 7살짜리 쌍둥이 말썽꾸러기 남자애가 우리 집을 제집 들락거리듯이 신명 나게 왔다갔다하다가 장독을 여러 번 깨뜨리고 했었다.

그 집 고양이는 우리 집 연못에 날마다 쪼그리고 앉아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물고기를 공격해 스트레스를 주었고, 맛있게 굽은 생선도 한순간에 물고 가곤 했었다.

어느 날은 내가 정성껏 만든 메주로 집 간장을 담아 만들어 놓았는데 말썽꾸러기 쌍둥이 남자애들이 메줏덩어리를 장독에 넣는 것을 보았는지 연탄재를 대문 앞에 모아 쌓아두는 그 시절에 흉내로 연탄재 덩어리를 우리 집 간장 항아리에 소복이 넣어 두어 간장을 망쳐 놓은 사건도 있었다.

 

쌍둥이 이야기를 하고 보니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그 당시 우리 집에 친구가 자기 남편이 한눈을 팔고 외박해 대판 싸우고 집을 나왔다며 부산서 가방을 들고 침울한 얼굴로 왔었다.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 세상에 네 남편 같은 사람 또 없어…>

내가 그의 남편을 옹호하게 된 사연이 있었다.

 

여고 시절 합기도 배울 때그 친구가 짝사랑하고 매우 좋아한 대학생 사범 선배가 있었다.

대부분이 여학생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친절했을 때 유독 그 선배는 우리에게 큰 소리로 강압하고 말도 함부로 해서 참지 못하는 성질에 나와 말다툼도 많았던 선배이다.

친구는 졸업 후에도 합기도에 남아 후배를 양성하는 사범이 되었고 방송국 등에 출연하는 단체 시범단에 합류되어 자주 서울에 왔었단다.

다른 곳에서 시범단에 합세한 어떤 다른 남자 사범이 있었는데 친구를 좋아했단다.

서울에서 귀빈들 앞에서 아주 중요한 시범을 했는데 크게 실수해 관장님에게 엄청나게 기압을 받고 스트레스를 풀고자 그 남자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단다.

술에 취한 그가 고아로 자란 자기 배경을 비관하며 우는 모습에 불쌍한 모성애 같은 것이 생겨 친절하게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 당시 통행금지 있던 시절이라 사이렌이 울리는 바람에 여관으로 급히 피하게 되었고 서로가 만취된 상태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말았단다. 

임신이 되었고 친구 부모님에게 들켜 쫓겨나고, 합기도 내에서도 나쁜 소문으로 친구는 정말 좋아한 선배와 어긋난 사랑으로 포기하고 말았단다.

결국, 합기도에서도 밀려 나와 그 남자와 다른 곳에서 합기도 개원하고 둘이 동거 생활하게 되었단다.

살다 보니 그 남자는 고아로 자라면서 세상을 비관하는 심한 피해망상증이 있어 술을 마시면 툭하면 임신한 친구에게 폭행이 잦았단다.  

더구나 친구가 좋아한 그 선배가 보는 앞에서도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언행과 욕설로 폭행하였고 친구가 헤어지자고 항의했다가 그가 거칠게 폭행해 끝내 유산이 되었단다.

그 사건을 우연히 보게 된 선배는 후배 남자를 가로막고 때리게 되었고 앞으로 친구 앞에 얼씬도 못하게끔 단호하게 위협적으로 경고해 악몽같은 그와 생활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단다.

그 사건 이 후 선배는 친구를 따뜻하게 감싸주었고 처음에는 어긋난 친구 사랑였으나 친구의 나쁜 현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덮어주는 선배와 결혼을 했다.

그런 멋진 남편이라 친구를 설득시켜 부산으로 보낸 일도 있었다. 

 

그 후 그들에게 연년생 별난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남편은 날마다 딸… 딸... 딸 타령을 했었단다.

죽어도 어림도 없다던 친구는 남편의 딸 타령에 못 이겨 결국 세 번째 아이를 출산했는데… 쌍둥이 아들을 다시 출산해 결국 네 명의 아들만 두게 되었다.

한 번은 그 친구 집에 방문했는데 연년생 아들과 어린 쌍둥이 아들이 서랍장 위에서 뛰어내리고 요란한 함성으로 줄을 타고 타쟌놀이로 여기저기 붕붕 날아 돌진하더니 내 앞으로 곤두박질해 커피가 내 옷에 엎질렀고, 또 무엇이 땅바닥에 우랑 탕탕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리, 네 명이 치열하게 싸우는 비명의 시끄러운 소리, 부상당한 피투성이 얼굴로 들어와 현기증마저 생길 정도라서 다시는 친구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친구 말에 의하면 남편이 합기도 4단이고 친구가 3단이라 아이들이 유전적으로 운동 신경이 매우 발달하여 다른 집 아이들보다는 무척 날뛰고 별나다고 그랬다.

 

그 친구 이야기에서 자서전 24화에 있었던 여고 시절 고자 사건 때 있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친구가 그때 한 말이다.

남자도 한 달에 한 번씩 생리한다고…

남자의 생리는 붉은색이 아니라 누른빛 생리를 한다고(그때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정액을 말 한 것을,) 생리 때는 붕대로 감아야 하므로 두툼하게 보여서 그런 날에는 고자와 구별이 몹시 어렵다고 아는 척한 친구다.

생리 중의 붕대 감은 남자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킥킥거리던 여고 시절도 있었다.

 

(운동을 잘했던 친구는 인도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돌아와 유명한 요가 선생이 되었다.)

 

두 번째 우리 집에 찾아온 또 다른 친구는 중학교 시절부터 나와 절친이다.

그 친구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였고 난 결혼을 일찍 하면서 몇 년간 연락이 끊고 살다가 우연히 명동에서 만나 우리 집에 놀려오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 집에서 우리 작은오빠와 만나게 되었다.

나와 소식을 끊고 산 긴 기간에도 보디빌딩으로 몸매를 다진 오빠 체격에 맞추어 XL 치수 티셔츠만 사다 모아 둘 만큼, 알고 보니 우리 오빠를 중학교 때부터 좋아한 것이라 했었다.

암튼, 그날의 만남이 시초가 되어 오빠와 결혼까지 하게 되어 나의 절친은 내 작은 올케언니가 되었다.

그런 여러 가지 추억이 담긴 집은 서울 집값이 갑자기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시절을 맞이하면서 집을 예쁘게 고친 덕분에 매우 비싼 몇 배 가격으로 운좋게 팔았다.

 

재테크에 자부심이 생겨 이 기세로 몰아 나름대로 헌 집을 고치는 감각과 안목이 조금 생긴 것 같아서 마당이 넓고 괜찮은 강남의 헌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시가집에 현재 상황을 말씀드리니 시아버지께서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선언 하셨다.

집을 팔았으면 다시 계약하지 말고 이 계기로 아들 직장도 그만두고 대구 시가집으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시부모님이 처음 서울 가회동 단칸방에 오셨을 때 계산서를 내 놓을 만큼 적은 봉급으로 바동거리며 사는 모습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며 공무원 생활보다 대구에서 사업하도록 도와주시겠다며 아버님도 이 기회에 일본에서 완전히 귀화하시고 남은 여생을 이제는 삼부자가 함께 오손도손 모여 살고 싶다고 제의하셨다.

 

남편은 부모님 의견을 따르고 싶어했고 난 이대로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에 그냥 만족하고 강남에서 내가 다른 부업으로 도우겠다고 설득해 보고 실랑이도 있었지만, 내가 다시 부업 할 것에 절대 반대하는 그는 혼자 결말을 짓고 강남 집을 계약하는 날에 가감하게 공무원 사표를 내고 집에 왔었다.

그때 얼마나 놀라서 당황했는지…

.

.

.

 

 

시가집에서 처음 시골 그의 직장 옆으로 갈 적에만 하더라도 한 달만 있다가 곧, 올 것으로 예상하고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나왔는데, 

트럭의 이삿짐 차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5년 만에 대구 시가집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또 다른 내 삶이 시작되었다.

 

 

3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