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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1화) 나의 자서전 - 첫 번째 자서전 쓰게 된 동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08. 12. 1. 21:35

          

 (1화) 자서전 쓰게 된 동기

 

  나 혼자 떠나는 에어 캐나다 긴 비행시간 속에서 이어폰에 흐르는 추억의 올드 팝송은 그날따라 유난히 타임머신이 되어 기억 속에 묻어둔 추억 세계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지금까지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으로 살아온 지난날과 달리 예상하지 못한 변화로 삶에 너무 지쳐 모든 것이 상실되었고 우울증으로 암울한 힘든 시간을 마주하다 보니, 참으로 묘하게 현실에서 만족할 때는 그냥 추억으로 끝나지만, 힘든 고비를 맞고 보니 비로소 이제 나를 돌이켜 보는 심리적 변화가 생겼고 또한, 계기 되었다.

마음의 열정이 또다시 식어버리기 전에 캐나다에서 돌아오는 즉시, Daum 블로그를 개설하고, 쓰고 싶은 마음과 시간이 생길 때마다 소중한 내 이야기가 서툰 글이지만, 조금씩 습작으로 되살아나 한 권의 자서전이 완성되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면서,. 그날까지 내 블로그는 계속 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가 내가 기억이 희미한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 어느 햇볕 따뜻한 국화꽃 옆에서 정말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내 추억의  자서전을 읽고 있을 나를 상상하며, 또 한 번 용기를 가지고 그래서 적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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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빠 세 분과 여동생이 두 명 사이에 부산 서대신동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평생 건강하지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키워 섰었다.

 친정어머니는 시골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4녀 1남 중에서 환영받지 못한 셋째 딸로 태어나셨다.

가난해 학교 교육도 못 받으시고 끼니도 제대로 못 잡수고 성장하신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오셨지만, 젊은 나이부터 평생 편찮아 누워 계시는 아버지 때문에 여자로서 아버지에게 애틋한 사랑도 제대로 받아보시지 못하고 마음고생으로 살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내 위로 오빠 세 분 낳고 나를 낳아서 당신이 여태 못한 여자의 한을 맏딸인 나에게 통해서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무척 많았다.

 부모님은 혈액형이 O형이셨다.

그러니 온 가족들이 모두 O형들뿐이라, 밝은 분위기에서 컸었다.

내 아래 여동생이 두 명이나 있지만 어릴 적에는 고집만 세고 무엇이든지 한번 하고 싶은 것은 하고 말아야 하는 내 성격 때문에 경제적으로 동생들까지 챙겨주지 못해 피해를 준 것이 많았다.

아버지 4형제에서 나의 사촌오빠 7명에 우리 친오빠 3명(한 분은 일찍 돌아갔음)고모도 없는 집안에서 오빠들 10명을 낳고 난 딸이라 나름 귀여움을 받았으나 그런 것에 버릇없이 제멋대로 자란 것도 있었다.

그렇게 남자들이 많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만큼 남자애처럼 성장하였다.

타고난 성격도 얌전하지 못했고 우리 오빠들이 하는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 남자애처럼 놀면서 자랐다.

그래서 남들에게 왈가닥, 말괄량이 소리를 듣고 컸었다.

 

 ( 무용과 인연)

6살부터 성장한 곳은 부산 번화가였고 주변이 극장가였기에 영화관 간판이 바뀌는 것을 늘 보고 자랐다.

무용을 시작한 것은 7살 어느 날 여성 국악극을 친척 언니 따라 보게 되었고 동네 친구들과 춤을 흉내로 추면서 놀다가 우연히 이웃 사는 그 당시 유명한 무용 선생님께서 내 춤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무용이 소질이 많은 것 같다고 권했고, 남자들이 많은 집안에서 제발 여자애처럼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어머니께서 허락하시어 그 선생님의 제자로 입문하면서부터 무용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옛날 못사는 그 시절에 나는 위문 공연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에 화려한 예쁜 무용복을 입고 관중 앞에서 춤을 추었고 그들은 손뼉을 쳐 주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정말 잘난 줄 알고 커 왔었다.

 

 ( 성적표 사건)

다른 것은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공부는 달랐다.

위문 공연 등으로 자연히 학교에 결석 많았고 어느 날 학교에 와보면 학급 친구들이 내가 모르는 구구단을 외우고 있었고, 다음에도 또 다른 수학 문제로 모두 잘하고 있어 기초가 늘 부족하다보니 소외감은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차츰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예민하고 자존심이 많았던 사춘기 중학교 시절에 하루는 등교해보니 선생님께서 책상 위에 성적 차례로 적어놓고 앉게 하셨다.

내가 앉은 자리는 60명 한 반에서 아마도 뒤끝에는 몇 명만 있었다.

유난히 많은 친구에게 늘 리더로 살아온 나는 다른 반 친구들까지 복도 창문으로 넘겨 보면서 나를 보고 킬킬거렸다.

눈물이 쑥 빠져나올 만큼 내 자존심이 상해 정말 죽고 싶었다.

요즘 같은 시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영어와 수학은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었고,  암기 과목만으로 식음 폐 하면서 낮과 밤도 없이 책을 붙들고 살았다.

어머니께서 공부 안 한다고 늘 꾸중하시다가 지나치게 달라진 내 그 모습에 공부 못해도 괜찮으니 제발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해보았다.

다음 시험에서 앞에서 7~8명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책의 글자들이 하얗게 보이면서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명하는 줄 알았고, 우리 어머니께서 선생님에게 따졌고 나로 말미암아 다음날부터 폐지되었다.

물론 나도 다음날부터 옛날로 돌아갔고, 언제부터 또다시 어머니는 공부하지 않는다고 또 꾸중하셨다.

어쨌든, 난 공부 관심은 눈코만큼도 없었어도 학교 출석만큼은 개근상을 받을 만큼 열심히 다녔다.

그 이유는 학교란 공부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내 많은 친구와 만나서 수다를 떨 수 있는 내 아지트로 생각했었다.

난 평소에는 건강해서 잘 아프지는 않았으나 어쩌다가 아플 때는 하루라도 학교 갈 수 없을까 봐, 나 스스로 따뜻한 설탕물을 마시고 이불을 푹 덮어쓰고는 잠을 자야지 내일 아침 학교 갈 수 있었다.

 

(맹장염사건)

중학교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옆구리 통증으로 무척 아파져 왔었다.

선생님에게 옆구리가 아파서 조퇴하고 싶다고 했었다.

평소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장난기가 많은 얄개 시절이라 선생님은 꽤 병으로 간주하시고 보내주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옆구리 통증은 더욱 심했고 방가 후 다시 한 번 더 선생님에게 청소 당번은 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고 했지만, 나를 믿지 않았고 끝내 청소까지 마치고 집에 왔었다.

그날 밤에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받게 되었다.

그 당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한밤중에 병원 수술대 주변은 아주 조용했었다.

의사 선생님이 마취 주사를 놓으면서 겁내지 말고 눈 감고 10번까지만 숫자를 세고 나면 아프지 않고 내일 아침이 될 것이라 했었다.

남들은 10번 못 가고 마취가 된다고 했지만, 타고난 내 강한 체력은 10번이라 하셨기 때문에 더는 하지 않았지만 눈감고 있어도 정신만 말똥말똥했었다.

 내 귀에는 그들이 수술하는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왔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수술에 집중하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내가 시체처럼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 선생님 수술부위 최대한 작게 하세요.>

< 아이고 엄마야~ >

간호사들이 한밤중에 귀신을 본 것처럼 수술 도구를 떨어뜨리고 벌렁 나자빠졌었다.

다음날, 수술자리가 터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복도에 있는 화장실에 절대 가지 말고 침대에서 변기통에 볼일을 보라고 당부하셨지만, 곤히 잠든 우리 할머니를 깨우지 않으려고 거추장스러운 닝켈도 멋대로 뽑아버리고 화장실 가다가 복도에서 의사 선생님과 딱 부딪치게 되었다.

나는 복도에서 의사 선생님께 혼쭐나고, 한쪽 복도에서 담임 선생님이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받은 나에게 미안해 위문차 오셨다가 어머니께 어떻게 환자를 청소까지 다해서 보낼 수 있느냐고 혼쭐나고 있었다. 

퇴원하는 날 오빠가 어머니 대신 왔고 오빠에게 집으로 바로 가지 말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제발 꼭 보여달라고 쪼랬다.

구급차를 타고 집이 아닌 영화관 앞에서 내렸고 위험한 옆구리를 붙들고 영화를 보았다.

집에서는 환자가 올 것을 준비하고 이불까지 깔아놓고 기다렸지만, 환자가 오지 않으니 어머니는 병원에 연락해 보았고, 의사 선생님은 기사 아저씨에게 어떻게 되였느냐고 묻었다.

영화관 앞에 내려주었다고 하였고 나 때문에 기사 아저씨는 환자를 극장 앞에 내려주었다고 혼났고 우리 오빠도 나때문에 어머니에게 혼났다.

다음 실밥 빼려고 가서 의사 선생님은 나 때문에 놀란 일이 너무 많았다며 혼쭐났었다.

지금도 내 맹장염 수술 자국 보면 철없는 얄개 시절 추억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