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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2화) 나의 자서전- 첫 번째 여고 얄개 시절에서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08. 12. 3. 01:48

 

 (2화) 나의 자서전- 첫 번째 여고 얄개 시절에서

 

 

(처음으로 이성으로부터 첫 대시를 받은 날)

남자애처럼 왈가닥이고 말괄량이 나에게 이성으로 처음으로 말 걸어온 남학생이 있었다.

아마 중학교 몇 학년인지 기억은 없지만, 부산 송도 바닷가에서 친구와 둘이서 수영복을 입고 해변을 걷고 있었다.< 저.... 시...계가.... 몇....시 ...인요...>

우리를 한참 쫓아온 것 같았고 진땀 범벅으로 순진하게 생긴 얼굴로 답답할 만큼 말을 더듬고 있었고 온통 여드름으로 매워진 얼굴이 더욱더 새빨간 색으로 변해 있었다.

< 수영복 입은 사람이 무슨 시계를 차겠어! ㅋㅋㅋ>

그 애들이 내 말에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라 줄행랑을 치는 모습에 그들이 바보 같아서 웃었다.

이성으로 받아본 첫 한마디가 항상 기억에 남았고, 얼마나 아름답고 순진한 시절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잊히지지 않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생각 들지만, 그때는 참으로 시시하게 끝난 한 마디였다.

중학교 사춘기 시절에 나는 록 허드슨을 제일 좋아하는 멋진 배우였고, 늘 그런 남자를 이상형으로 생각했든 철없는 사춘기 시절에 온통 여드름 얼굴로 용기가 없어 말마저 더듬는 그런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실망했고 한마디로 무시한 그 남학생에게 이 나이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 합기도와 인연)

여고를 입학하고 내 친한 친구 중에 씩씩한 남자같이 생긴 친구가 있었는데 남들이 남자라고 착각할 외모에 여군인이 되고 싶었고 늘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했다.

학교 주변에서 합기도 호신술 학원 벽보를 보았지만, 그 친구는 같이 따라가 줄길 바랐지만, 그곳에 갈 용기는 없었다.

어느 봄날 항상 다니는 정문으로 나오지 않고 동문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주변에서 힘찬 기압 넣는 구령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곳이 합기도 호신술 벽보에 붙어 있는 학원이었다.

학교와 가까이 있는 줄 몰랐고, 친구의 권유로 친구 넷 명과 호기심으로 1층에 있는 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날따라 우리가 운이 좋아서 합기도 총재님을 그 자리에서 뵙게 되었고 여자도 호신술에 중요성을 듣게 되었고 직접 간단한 시범 몇 가지 가르쳐 주시고 한 번 해보라고 하셨다.

호기심에 그 자리에서 배운 몇 가지 호신술을 우리끼리 손목을 잡고 꺾어보았고, 꼼짝할 수 없는 점이 무척 신기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빨개진 손목을 보면서 함께 간 우리 다섯 명은 다음날로 모두 호신술을 배우기로 합의했고 합기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당시 합기도에는 여학생이 없는 시절이라 특별히 총재님과 총 본부장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다.

1년 이상 2년 가까이 무용도 중단하고 열심히 배웠고 우리 다섯 명은 한 명의 낙오자 없이 그 당시에는 아주 드문 여성 유단자가 되었다.

셋 명의 친구는 얌전한 친구들이지만, 남자 같은 내 친구와 나는 얌전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 그 친구는 남았고 그 후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사범으로 방송국 출전과 시범 활동으로 열심히 후배 양성했고 몇 년 후 사범과 결혼했으며 지금도 유명한 요가 선생님으로 활동 중이다.)

그곳에서는 남자 탈의실만 있었고 남학생들이 전부 나와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나의 말괄량이 성질로 오랫동안 기다리지 못했고 빨리 나오지 않으며 숫자 10번만 셌고 커튼을 활짝 열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속옷으로 내 소리에 식겁하고 군대보다 더 급하게 옷을 갈아입어야 했었다.

친구들은 합기도 학원에서 이성으로 누굴 좋아하느냐 했지만, 나는 남자에 관심을 두지 못했고 그들도 얌전하지 못한 나에게 감히 접근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 번씩 총재님과 귀빈들 앞에서 시범 경기를 할 적에는 상대를 호신술 낙법으로 넘겨야 하는데 평소에 나에게 불만이 많았던 그들은 절대 나를 봐주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할 수 없이 평소에 볼 수 없는 가증스러운 애교로 낙법 해야 했었다.

대련 훈련을 할 때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도복을 잡으며 되려 남자애들이 얼굴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몰라서 쩔쩔매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심장이 약한 것으로 보였다.)

학원에서는 여자애들만 실명을 쓰지 않았고 꽃 이름으로 대처했는데, 평소 성격이 거칠고 까칠하다고 해서 가시가 많은 장미로 나에게 불렸다.

어쨌든 그 당시에 남들은 꿈많고 얌전한 여고 시절에 나는 합기도 유단자가 되고 난 후 더욱더 기세가 등등했었고 남자를 시시한 존재로 보게 되었고 겁도 없었다.

 

( 버스 속에서 얄개 사건)

나는 학교와 거리가 머지않아 버스 통학을 하지 않지만, 먼 거리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이 복잡한 버스 속에서 요즘의 성추행 나쁜 남자들 만나는 날이며 뒤에서 딱 붙어 이상한 짓으로 어느 날에는 교복이 엉망이 될 때도 있다면 울면서 하소연할 적이 많았다. 

어느 날 하교할 때 친구네 집으로 같이 가게 되었고 복잡한 버스를 타게 되었다.

옆에 있는 친구가 울상이 되었고 뒤에서 남자 승객이 붙어서 성추행의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눈빛으로 말했었다.

나는 친구와 자리를 바꾸었고 평소에 바느질을 잘 하지 않는 왈가닥 성격 덕분에 허리에 채워진 단추가 없었고 대신 아주 큰 대형 옷핀을 항상 꼽고 있었다.

그 옷핀을 일자로 쫙 벌리고 뾰족한 침을 내 엉덩이 뒤에 엽기적으로 갖다대고 있었다.

<으악~>

그 남자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면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도망쳐 내렸고 나는 허리에다 옷핀을 다시 꼽고 가볍게 손바닥을 털었다.

 

(영화관에서 얄개 사건1)

옷핀 사건을 적다 보니 옷핀과 연관되는 기억이 있었다.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는데 내 옆 친구가 또 울상으로 내 옆구리를 꾹꾹 질렸다.

왜 그러냐고 그러니 옆에 앉은 아저씨가 허벅지를 더듬는다고 그랬다.

역시 그 친구와 자리를 바꾸어 앉았고 또다시 옆구리 대형 옷핀으로 일자로 벌려서 뾰족한 침으로 내 허벅지 위에 엽기적으로 올려놓았다.

< 으악~ >

조용한 극장 안에서 그 아저씨 또한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갔었다.

나는 허리에다 당당하게 옷핀을 다시 꼽고 가볍게 손바닥을 털었다.

요즘은 성추행 사건으로 연관되고 큰일이 날 소리지만, 옛날 그 당시만 해도 바보처럼 당하고 있으니,.

어쨌든 다른 친구들은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겁 없이 했기에 친구들의 해결사가 되었다.

 

( 영화관에서 얄개 사건 2)

영화관 생각으로 연관되는 사건이 있었다. 

친구들은 용돈이 생기며 학교 주변에서 군것질하지만 나는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돈을 모으면 첫 번째는 좋아하는 팝송 레코드판을 모은 것이 취미였고, 두 번째 취미는 영화감상이었기에 그 당시 유명한 영화는 거의 본 것 같았다. ( 집이 부산 번화가 극장가 주변이라 영화 정보가 제일 빨랐다.)

그날은 명화라서 많은 관람객으로 극장 안이 가득 차 자리가 없었고 다음 횟수 사람들마저 들어와 복잡했었다.

< 옆자리에 누구 있습니까?>

<아뇨.>

< 고맙습니다.>

 

.

 

.

 

.

영화 상영이 끝나고 밝은 불이 들어왔고 서로 옆을 보게 되었는데 조금전에 옆좌석에 앉은 사람은 우리 학교 무서운 호랑이 규율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학교 단체 관람을 위해 미리 관람하시려고 온 것이고 그 많은 관람석에서 하필 이며 재수 없게?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서로 눈이 마주쳤고 심장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처벌로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되었고, 이것도 추억의 기념이라고 화장실 앞에서 빗자루를 들고 멋지게 포즈잡고 사진 찍다가 청소를 잘하고 있는지 검사 나온 규율반 선생님께 그 자태로 적발되었다.화장실 청소는 다시 연기되고 말았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잊을 수 없는 여고 2학년 얄개 시절 한 부분에서 기억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