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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어머니를 닮고 싶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0. 2. 17. 21:44

 

 

 

 

 

 

 

친정어머니를 닮고 싶다

 

 

 

설날 저녁때쯤 부산 친정에 도착했었다.

 

언제나 살갑게 반겨주시는 어머니의 첫 말씀은 '내 새끼야'라고 부르시면 안아주시고 내 손등에다 입맞춤을 해주신다.

 

나 역시 자식에게 속마음은 있어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친정어머니는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며느리에게도 고마운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며느리가 물 한잔을 갖다 드려도 항상 물을 갖다 줘서 고맙다는 말씀 잊지 않으신다.

 

결코, 며느리에게 그런 말씀하기 쉽지 않지만, 말을 표현하시니까 고부 관계도 좋을 수 밖에 없다.

 

어머니의 십 분의 일이라도 이다음에 나도 며느리를 본다면 친정어머니를 닮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친정어머니는 아주 먼 산골에서 옛날 그 시절 4녀 1남 중에 환영받지 못하는 셋째 딸로 태어나셨고 학교 교육도 전연 못 받으시고 평생 편찮으신 아버지 병시중을 하시면 못살던 그 시절 엄청난 고생 고생으로 우리 5남매를 키우신 분이다.

 

평생 편찮은 아버지를 모시면서 더구나 아버지 집안까지 물씬 양변으로 얼마나 잘하고 도와서면 집안 족보에 열녀로 등재되었다.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업보이라고 늘 말씀하시고 힘든 고난을 좋은 일을 많이 하셨야 업보를 닦는 길이라며 부처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고자 노력하셨다.

 

한글도 자식에게 배우시고 그렇게 배운 글로써 불경 책이 모서리가 전부 닳아 없어질 만큼 책을 놓지 않으시고 어려운 불경 책을 안 보시고도  웬만하며 모두 외우다시피 되셨다.

 

 

 

어머니는 불쌍하신 분을 그냥 보고 가시지 않는 분이다.

 

내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어느 날 집에 들어서니 나쁜 냄새가 집안 전체를 심하게 풍겼다.

 

몸이 불편한 나이 드신  거지 장애인이 추운 겨울날 오줌을 싸 떠는 것을 보시고 우리 집에 모시고 와 아버지 옷과 따뜻한 밥상을 챙겨주시고 있었다.

 

또한, 어머니의 삶의 철학은 누구든지 우리 집에 오시는 분에게 빈 입으로 보내지 말라는 말씀을 늘 하셨고 옛날 우편집배원이 편지를 갖다 주어도 걸어 다니면 배고프다며 밥상을 챙겨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동네 할머니의 고추장을 담아주신다면 매운 고추를 우리 집 방안에다 풀어놓고 나에게 다듬는 것을 도우라고 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어릴 적에는 너무 싫어 쓸데없는 짓을 제발 그만두라고 짜증을 낸 기억도 난다.

 

 

 

동짓날이면 남들은 가벼운 초와 향, 그리고 돈을 들고 가지만, 우리 어머니는 절에 못 가시는 분의 100집을 다니면서 쌀을 모아 대신 정성을 들고 가시는 분이다.

 

 

 

옛날 힘든 시절 겨울날 국민학교(초등)에 갔다 오니 어머니가 무거운 김치 국밥을 주시면서 집 주변 거지들에게 갖다 주고 오라고 하셨다.

 

무겁고 싫으니 오빠에게 시키라며 떼를 쓰면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끝내 울면서 엄마 손에 이끌려 들고 갔었다.

 

그 시간이면 어머니가 주시는 국밥을 먹기 위해 모여드는 거지에게 내가 국밥을 나누어 주는 모습을 초등 학급 친구에게 들켜서 다음날 학급 친구들에게 거지와 한패라고 엄청나게 창피스러운 놀림과 왕따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봉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 같았지만, 맏딸인 나는 어머니를 닮지 못했고 첫째 여동생이 어머니를 닮았다.

 

불교 공부뿐만 아니라, 병든 분들을 찾아가 자원 봉사활동을 하는 동생을 보면 존경심이 생길 정도다.

 

어릴 적부터 맏딸인 나는 철이 없어 동생들보다 힘든 집안일은 아예 도울 생각도 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고집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으로 그때는 어머니를 힘들게 하였고, 철이 없는 언니 때문에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철이 든 여동생들만 피해를 주었다.

 

자매간에도 내가 많은 혜택을 받고 커 오니 동생들이 어머니에게 불만이 많았다.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 " 어머니가 말씀하시며 여동생들이 콩쥐와 팥쥐를 비유하면 불만스러운 말투로 반문했다.

 

" 손가락도 깨물기 나름이다! "

 

 

 

형제 중에 나만 빼고 작은 오빠도 편찮으신 아버지 생전에 효자로 소문나서 부산시 효자상 표창까지 받았다.

 

큰 오빠도 장남으로 동생들을 사랑하고 잘하시는 분이지만, 우리 큰 올케 언니 같은 분도 없다.

 

어머니는 요즘 고령으로 거동도 불편하시고 몸도 편찮으시다.

 

오늘도 어머니와 큰 올케언니와 대화에서 가슴이 뭉클했었다.

 

"어머니 목욕을 시켜보면 옛 전에는 등이 넓으셔는 데 요즘은 등이 반쪽이 되신 것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

 

"너희 언니가 내가 몇 번 죽을 고비 때마다 정성으로 나를 살렸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심각한 상태로 병원에 실려가셨고 입원하신 적이 많으셨다.

 

그때마다 큰 올케언니 며느리 정성으로 호전되었고 어머니도 혼수상태에서도 우리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큰 올케언니를 찾는 분이 우리 어머니이다.

 

우리가 아무리 잘해 드려도 항상 큰 언니가 없으면 안 되는 분이다.

 

전생에 부부 인연으로 만나다가 다시 고부로 만난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어머니는 큰 올케언니를 의존하시고 서로 애틋한 정으로 사신다.

 

'옛말에 그 집이 잘되려면 큰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된다.' 하시면서 우리에게 큰 올케언니를 본보기로 보고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신다.

 

물론 작은 올케언니도 착하고 잘하지만, ( 내 제일 친한 친구가 우리 작은 오빠와 결혼해 작은 올케 언니가 되었다.) 큰 며느리 올케언니를 따라갈 수가 없다.

 

 

 

어머니 철학은 고부간은 절대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남남이 만난 인연은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잘못을 가족과 남들 앞에 비판하면 절대 융화가 될 수 없다 하셨고, 여태까지 어머니는 딸에게도 두 올케 언니 흉을 보신 것을 들은 적이 없고 올케언니 잘한 착한 점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니 우리도 올케 언니를 따를 수밖에 없고 오빠들도 아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 같다.

 

착한 두 올케언니 덕분으로 오빠들도 우애가 깊어 형제간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시고 함께 술도 자주 드시고 노래방도 함께 가시며 사이가 무척 좋으시다.

 

두 분의 오빠들은 여동생들도 잘 챙겨주시고 많은 사랑으로 아껴주시는 분이다.

 

모두가 며느리인 두 올케언니 덕분이면 그래서 형제들이 우애가

토 탁해서

작은 사소한 일에도 축하 일이 생기면 그 핑계로 형제끼리 모이는 것을 좋아하고 안 보면 보고 싶어하며 두 올케 언니마저도 시누이들과 모이면 오순도순 이야기로 밤샘하고 한다.

 

화목한 자식, 며느리에게 큰 대우받는 어머니,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손자들까지 덩달아 할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친정어머니 생신이면 요즘 시대에 보기 더 물게 4대가 한자리에 모여 축하해 주고 노래방에 가고 하는 모습을 남들이 부러워한다.

 

 

 

평생 편찮으신 아버지의 아내로 또한, 집안의 며느리로, 며느리에게 대하는 시어머니 마음, 가난했지만, 당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돕고 베풀어 온 모든 것은 어머니께서 이루어 놓은 공덕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학교 공부는 배운 것은 없었으나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 교육을 보여 주셨고 돈으로 재산 남겨주실 것은 없지만, 형제간에 우애와 화목으로 뭉치게 하셨다.

 

모든 것이 어머니가 만드신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설날이면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을 한다.

 

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도 진정 착한 심성으로 살아간다면 복은 따라오는 것을 어머니를 보면 알 수 있다.

 

나 역시 친정어머니의 복 많으신 모습을 부러워할 뿐이지 복을 저축한 것은 없다.

 

그리고 조금만 힘든 삶을 만나도 고통스러워 한다.

 

그런 딸에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 산다는 것은 매운 양파 곁 데기 같아서 한 겹씩 벗겨가며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 것이다. "

 

"양파가 요리 과정은 매운맛으로 눈물이 날 수 있지만, 그 매운맛 때문에 나중에 맛있는 요리가 되는 것이다. "

 

 

 

오늘도 실천은 하지 못하고 말로만 친정어머니를 닮고 싶어한다.

 

 

 

- 2010년 2월 16일 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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