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열다섯 번째 옥탑방에서 생긴 이야기
동네 병원 이비인후과 의사가 감기로 편도가 부었을 뿐이라 하셨고, 더 큰 중견 병원 의사도 이비인후과 의사와 동일한 진료로 별것 아닐 거라는 진단에 우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왔을 뿐인데 예상과 다른 것에 그 충격이 매우 컸었다.
대형 병원이나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하라는 말에 미덥지 못한 넋이 나간 목소리로 되씹어 묻었다.
< 목감기로 편도가 조금 부었을 뿐이라고 그러셨는데, 암이라고 하셨나요?>
의사는 큰 병원이나 대학병원 빨리 가시어 확인하라는 말만 하면서 검사 의견 추천서를 나에게 내밀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라 완전히 얼이 빠져 우리 다시 대학병원에 갔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을 때는 더 큰 긴장감이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암이며 편도 암으로 결론이 나왔다.
그 충격에 사색이 되어 우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의사가 그런다.
편도 암은 비교적 드문 암이라며 편도는 입과 목의 경계에 의한 림프 조직인데 남성에게 더 많이 발생한다며 평소 음주, 흡연자에게 잘 발생하는 것이라며 남편이 평소에 음주나 흡연에 관해서 물었다.
난 의사에게 남편은 흡연 자체는 일체 하지 않으며 술도 좋아하지 않아 어쩌다 친척 간에 명절이나 모임에서나 한두 잔 할 정도라고 했었다.
남편 주변 유전적 요인이 있는지 물었고 난 시어머니께서 자궁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의사는 뇌출혈과 암은 급강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아마도 그 당시 만약에 두 가지가 동시에 생겼다면 뇌출혈은 바로 쓰러져 알 수 있으나, 암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점차 종양이 커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면역체계 약화로 암의 전이 확률도 더 높지만, 당장 더 큰 문제점은 전이된 세포는 보이는데 처음 발생한 모종 종양 세포는 모든 검사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으니, 전이 세포라도 시급하니 서둘러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즉, 어미 모종 종양은 그대로 둔 채 전이된 새끼 종양만 제거한다니 매우 찝찝한 좌절감도 들었지만, 선택 여지가 없는 상태에 그나마 이른 시일 내로 수술 날짜가 잡혔다.
이런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1도 생각 못 한 상태라서 우리의 이전 계획은 캐나다 딸 집에서 좀 쉬고 올 것이라 살던 아파트도 남에게 전세를 놓고, 이삿짐 보따리는 딸의 친구 친정집 옥탑방에다 이미 맡겨 둔 상태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모든 일들이 뒤헝클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적 혼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캐나다행 비행기는 취소하고 임시 거주는 이삿짐 보따리가 있는 매우 후텁지근한 옥탑방에서 피난민처럼 매우 불편하게 살면서 수술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둘째 딸이 인터넷 검색에서 서울 큰 병원 이비인후과 전문의 A 박사님이 편도 암 수술 분야에서 국내 최고 전문의이니 한 번 더 서울에서 검사를 받아 보자고 권유해 환자 가족의 마음에서 혹시나 하는 간절한 마음이라 서울 큰 병원 A 박사님에게 진료와 모든 검사를 긴장하며 받았으나 역시나 결과는 편도 암으로 나왔으며 여기에서도 첫 모종 악성 종양은 전연 보이지 않고 전이된 종양만 보인다는 검사 결과에 또다시 좌절감을 실감하였다.
가족 의견은 이왕이면 A 박사님에게 수술받기를 원했지만, 상담 담당 간호사는 A 박사님은 이미 꽉 찬 예약 수술 대기 환자로 몇 달 뒤에나 수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우린 그 말에 막막해 서울 A 박사님에게 수술을 포기하고 상담실에서 나오는데 상담 담당 간호사가 한 줄기 빛과 같은 가능성 말을 우리에게 던졌다.
< A 박사님께서 곧 미국 세미나 학회로 스케줄이 며칠간 비워진 날이 있는데 혹시나 미국행 일정이 취소된다면, 연락을 드리게요>
<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럼 꼭 부탁드리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상담 담당 간호사 말에 1%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초조하게 매일 전화기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
A 박사님께서 미국 세미나 학회에 가시는 것이 취소되었다며 비워진 공백 날에 수술이 가능하다고 그런다.
정말 고마웠고, 남편은 서둘러 입원해 모든 검사를 받은 후, 드디어 수술대에 오르는 날에 수술실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쪼그리고 있는 나를 본 A 박사님께서 그러셨다.
<우리 병원 최신 최고 기계에도 모종 종양이 절대 보이지 않는 상태일지라도 그날 수술에 따라서 모종이 발견되는 날도 있었으니, 혹시 종교가 있다면 우리 병원 지하 건물로 내려가시면 천주교. 기독교, 불교 기도실이 있으니, 보호자님의 기도와 저 역시도 전이 종양뿐만 아니라 모종 종양까지 오늘 수술에서 모두 찾아내도록 서로 열심히 잘 해봅시다>
A 박사님의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격려 말씀에 정말 고마웠다.
A 박사님께서 수술실에 들어가셨고, 난 기도실에서 A 박사님의 오랜 수술 경험에서 숨어있는 악성 모종을 꼭 찾게끔 도와달라고 혼신을 다해 기도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휴대전화 벨이 울렸고 수술이 막 끝나고 곧 회복실로 옮겨 갈 것이라는 전화에 황급히 수술실 문 앞으로 뛰어 올라왔었다.
수술실 문이 드디어 열리면서 A 박사님은 나에게 벙끗 웃으시면 오늘 운이 좋아 다행히 모종 종양까지 다 찾아내어 제거하였으니 잘된 수술이라고 하셨다.
<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너무 감사해 여러 차례 인사하였고 A 박사님이 가신 후, 전이와 모종 악성 종양까지 제거된 말씀에 안심과 위안으로 온 힘이 빠지면서 수술실 앞 의자에 푹석 주저앉았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서울 석촌 호수 주변의 요양병원에 다시 한동안 입원하였고, 이어서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서 수술한 큰 병원 주변에 임시 거주지 방을 찾아 헤맸다.
병원 주변에는 암 환자들이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위해서 장기간 거주자 위한 임대하는 집들이 많았고, 우리도 그런 곳에 임시 입주해 병원을 오가며 항암과 병행 방사선 치료를 오랫동안 받았다.
수술 전 남편의 키는 176cm, 체중이 78kg였으나 오랜 항암 방사선 치료가 끝난 후에 대구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키도 약간 줄면서 몸무게는 엄청나게 줄어서 남들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그만큼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가 힘들어 고생 많았으나 그래도 운이 좋아 유명하신 A 박사님에게 빠르게 수술받을 수도 있었고 남편이 살아 있음에 그때 정말 신에게 감사하였다.
(그때 내가 암 완쾌에 노력한 것이 다른 암 환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서 참고로 적어본다)
1, 수술과 항암 후에 암 환자 기력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좋다는 한약 보약, 약국 영양제는 일절 먹지 않았다.
(예를 들어 ; 같은 병원 암 병실의 지인은 몸보신 회복하느라 엄청나게 비싼 산삼을 구해서 먹었으나, 처음은 힘이 나고 좋다고 하더니 결국 바로 돌아가셨다. 왜 그런지 한의사, 암 전문의 등등 여러분의 생각도 들어본 내 나름대로 판단은 환자보다는 암 덩어리가 먼저 산삼 약효 기력을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2. 암이 좋아하는 육고기· 우유, 치즈 등등 유제품은 일체 자제하고 암이 싫어하는 생식 채식, 잡곡, 바다 오염이 낮은 작은 생선 등으로 건강한 음식 위주로 먹었다.
3. 항암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고 암 면역에 좋다는 말벌의 '프로폴리스'를 물에다 한 방울 타서 꾸준히 음용하였다.
4. 스트레스를 줄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매일 야산 주변을 산책하면서 운동과 더불어 근력을 키웠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몇 년 후에 남편은 암에서 완전히 완치 판명을 받았다)
이야기를 다시 그때 당시로 돌아가서 동네 병원 이비인후과 의사가 감기로 편도가 부었을 뿐이라 하셨지만, 캐나다에는 우리가 의료보험이 없으니 한 번 더 정밀 검사한 것이 암이 발견되어 서울의 A 박사님으로 잘 된 수술을 받아 살아있음에 정말로 감사했었다.
어느 날 남편의 오래된 친구가 병문안 와서 그들이 나누는 지난날의 증권투자 이야기를 밖에서 듣자니 어이가 없어 기가찼다.
예전 남편의 사업체 공장이 민사소송에 휘말려 마음고생이 심하게 시달리고 있을 당시에 우리나라 증권 시장이 아주 좋은 호황 시기와 맞물러 오늘 온 남편 친구는 증권 투자 큰 재미 자랑에 남편도 증권투자 호기심이 생겼는지 그 친구 따라 증권회사 첫발을 놓은 것이 불행의 초반이 되었다.
( 요즘은 모든 것이 인터넷 세상이지만, 옛날 그 당시에는 고객들이 직접 증권회사 매장에 앉아서 현판의 시세 변동 상황을 보면서 거래하는 마지막 시절쯤이었다)
남편이 생전 처음 증권 투자한 것이 크게 대박이 나면서 그 매력에 빠져 괜한 힘든 사업하는 것보다도 더구나 공장 민사소송 문제로 무척 마음고생할 적이니 사업보다 증권투자가 훨씬 좋다고 느껴져 사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직 증권 투자에 올인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부부일지라도 난 그가 얼마만큼 자금을 가지고 증권 투자에 돈을 퍼부었는지 정확하게 몰랐던 시절에 남편은 그 매장 안에서 최고의 VIP 고객이 될 만큼 증권투자에 빠져서 우리 모든 재산은 하나씩 차츰 사라지고 그 후로 결국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것으로 우리 가족은 갈 곳이 없어 길바닥에 내려앉을 정도로 겨우 단칸 월세방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몹시 고생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모두 까맣게 잊어 버리고 좋았던 시절의 VIP 고객 타령이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거들먹거리는 것에 은근히 화가 났었다.
남편 성격은 지나칠 만큼 모든 일에 세밀해서 정확하지 않은 불확실한 것에는 절대 건들 보지도 않았든 사람이 너무나도 달라졌고, 오직 증권투자에 집착과 미련을 결코 단념하지 못한 채 되려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고자 어려운 시험인 증권 투자 상담사 시험을 도전해 합격하면서 우리나라 대기업 증권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증권 투자 상담사란 오를 때는 고객들에게 칭찬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우리나라 경제 어떤 변수 상황에 따라서 증시가 밑바닥으로 떨어져 깡통 계좌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에는 고객으로부터 엄청난 질타와 비난을 퍼붓는 엄청난 스트레스 압박인지 건강이 나빠져 결국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에게나 장단점도 있기 마련이니 그래도 지금까지 남편과 함께 살아오면서 좋았던 추억 장점도 많았기에 내 마음을 다독거려 달래기도 하였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는 "젊은 날에 잘해야지, 젊은 날에 노름, 바람피우고, 술주정, 아내에게 폭력이나 했다면 늙고 힘없을 때는 아내. 자식에게 구박받고 내쫓긴다는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았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돌이켜 보면 그의 인생 최고 목표인 고시 공부 포기하면서 이어서 나와 약혼을 반대하는 시부모님과 불화로 네 멋대로 결혼한다며 단 한 푼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부모님 도움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무원 시험을 선택해 그래서 우리는 2평 정도 되는 시골집에서 여행 가방과 헌 냄비와 한 끼의 쌀로 시작해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의 자서전에서 미리 언급된 여러 가지 무척 어려움도 많았으나 억척스럽게 살면서 서울에서 첫 집도 마련했었다.
그 후 시부모님 의견대로 공무원 생활을 접고 대구로 내려와 서울에서 집을 판 자금으로 사업이 잘되어 그 옛날 벽난로가 있는 고급 큰 주택에서 살면서 우리 집에서 거주하는 아주머니까지 둘 만큼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다
그는 성실한 가장으로 좋은 아빠가 되길 항상 노력했으며 나에게만 유독 지나칠 만큼 통제시키느라 내 마음 고생도 많았으나, 그래도 따뜻한 사람이라 내 생일 이벤트 선물들과 더구나 친정집 맏사위로 참 잘한 것에 인정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증권 투자 실패로 가족들이 길거리에 내팽개쳐질 때도, 뇌출혈로 쓰러질 때도, 현재 암까지 수술한 현재 상황에서도 그를 살리고자 노력하게 된 것이 그때의 모든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요즘 암 수술은 국민 의료보험이 잘 되어서 암 환자 비용 부담이 적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런 혜택이 없었던 시절이니 모든 것이 100% 본인 부담 시절이었다.
그동안은 작은 아파트 전세를 놓은 돈으로 남편의 수술비와 요양병원, 서울에서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 방세 값 등등 지금까지 겨우 견디고 왔으나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현재 남편의 상태는 뇌출혈, 암 수술받은 직후이니 난 24시간 남편 곁에 있어야 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캐나다 딸 집으로 떠나고 싶어도 암 수술 이후에는 자주 서울로 올라가 의사와 면담 및 검사를 해야 하니 그 상태로 훌쩍 캐나다로 떠날 수도 없는 상태이었다.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주 좁고 무릎 정도 낮은 난간으로 붙잡을 때가 없으니 한 번씩 남편이 휘청거리니 위험천만이라 안전한 1층 이사를 옮기고자 월세방을 알아보니 우리 형편에 월세 부담은 너무 높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 집 경제 상황은 부동산 사무실을 문 닫고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푼 수입 없이 이전의 빚과 현재까지 지출로 빚만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초조한 상황에서 피난민 보따리 옆에 끼고 옥탑방에 사는 이 현실이 한 번씩 절망감이 밀려오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끼어든 불행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언제나 어둡고 암울한 터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신념과 믿음이 있었다.
" 아침이 오기 직전 새벽이 가장 어둡게 보여도 새벽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아무리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도 봄이 오기 마련이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지금 상황이 비록 가장 어둡고, 가장 추워도 눈부신 아침 햇살과 꽃피는 봄날은 다시 찾아올 것이니 기죽지 말고, 복지답게 씩씩하게 참고 힘내보자!"
정말 우리네 인생살이도 자연의 섭리처럼 그런 것 같았다.
희망의 새벽빛과 따뜻한 봄날 햇살이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다음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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