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좋은 음악이 날마다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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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 부산진역의 역전 지게꾼 동상 조형물을 보면서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았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1. 1. 27. 12:52

 

 

 

 

 

복지 - 2021년 1월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오늘 날씨는 어떨까? 그런 궁금증이 먼저 든다.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외출할 일도 별로 없지만, 겨울 날씨가 흐린 날이 매우 많아서 별 기대하지 않고 창문 커튼을 올렸는데 오늘은 모처럼 맑고 깨끗하면서 아침 해가 뜨는 것에 반가움으로 휴대폰으로 한 장을 찍어 보았다.

그리고 캐나다는 한국 시간대와 반대인지라 밤새 한국 뉴스도 궁금하기도 하고 내 블로그도 열어보느라 컴을 컸는데, 먼저 캐나다 한국일보에 기재된 어느 할아버지의 6.25사변 시절 피난길 사진이 눈에 들어와 읽어 보았다.

 

 

 

 

할아버지는 70년이 지났어도 그때의 무서운 참상이 늘 괴롭히고 있단다.
그 당시 나이 14세 때는 평양에서 살았는데 1950년 초겨울 인민군은 국군과 유엔군에 밀려 압록강까지 후퇴했지만 “100만 중공군이 쳐내려온다”는 소문에 10리 밖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를 위해 저장한 폭탄들을 모두 폭파하는 소리가 집까지 들려왔단다.
2~3주 후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며 생각하시어 보따리를 간단히 챙겨 피난길에 택했는데 그것이 부모님과 생이별 마지막이 되셨단다.

 

 

 

 

피난길에서 처음 보는 시체들과 비행기 폭격에 사람들이 몰살하는 장면을 보면서 겨우 기차 꼭대기에 올랐는데 겨울 영하 10도에서 얼음처럼 꽁꽁 얼었고, 지붕 꼭대기에 올라앉은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새끼줄로 식구들의 허리를 줄줄이 묶었으나 새끼줄로 묶어도 사람들이 줄이 풀려 떨어져 죽는 것도 보면서 겨우 서울에 도착해 해방촌 언덕배기 하꼬방에서 한 일주일쯤 지나니 전세가 불리해져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한다는 소문에 다시 서울을 떠나 남쪽 부산으로 떠나야만 했었단다.

 

 

 

 

1950년 12월 중순에 다시 짐 보따리를 꾸려서 한강을 건너서 영등포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한강 철교는 모두 끊어졌고 한강을 건너는 통로는 미군들이 설치한 부교가 유일했단다.

 

 

 

 

 

그 당시 부산에 운집한 피난민 인구가 100만 명이 넘어서 산비탈, 하천 다리 밑과 남의 집 마당을 막론해 살았단다.

공부는 이북에서 중학교 1학년만 다니고 피난하면서 3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 영어는 알파벳도 모르겠고 수학, 물리, 화학 등은 무슨 말인지 전쟁통에 나이에 맞게 제 학년에 들어간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학생들끼리도 두세 살 차이는 보통이었다.


그때 며칠만 헤어져 있으면 부모님과 가족을 다시 만난다고 믿고 떠나온 세월이 70년의 영원한 이별이 돼버렸고 지금의 연세에도 이북에 계신 부모님 얼굴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떠올라 목이 메서 눈물을 자주 흘리신다는 글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몹시 먹먹해졌다. 

 

 

 

 

난 부산 사람이라 어릴 적부터 내 주변에서 이런 분들의 삶도 많이 보아서 그런지 이런 기사가 더욱더 마음에 와닿았다.

지금도 부산에 가면 그 당시 한국전쟁으로 모여든 50~60년대 피난민 애환 특색을 살려놓은 40계단 문화관광 거리에는 독특한 동상 조형물들이 곳곳에 있다.

부산진역에도 피난민들이 생계를 위해 지게를 메고 역전에 몰려들어 손님들의 큰 짐을 운반해주고 생계를 이었는데 그래서 ‘역전 지게꾼’이라 불렀다.

 

이 지게꾼 동상에서 내 나이 어린 6살 때 매우 고마운 어느 지게꾼분이 떠오른다.

 

그 시절 우리나라 경제는 전쟁이 한참 지나도 매우 가난한 시절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시골에 사는 친인척 중에는 식량을 줄이느라 아들은 농사 짓는다며 집에 두었으나 딸은 도시에서 조금이라도 밥 먹을 형편이 되는 친척 집에다 집안일을 좀 도우면서 밥을 얻어먹고 살라며 보내곤 했었단다.

그래서 우리 집에도 친가 6촌 언니와 이종사촌 언니가 다 함께 우리 집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 친정어머니도 몹시 가난한 먼 산골에서 4녀 1남 중에 환영받지 못하는 셋째 딸로 태어나셨으니 학교 교육은커녕 시집오시는 날까지 백미 쌀은 아마도 한 말도 제대로 못 드신 것 같다면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친가. 시가 조카들을 맡았단다. 

 

어머니께서도 역시 먼 산골에서 사실 때는 부산으로만 시집오면 배고픔이 없을 줄 아셨단다.

하지만, 젊은 날부터 평생 편찮으신 우리 아버지 병시중에 무척이나 고생하시면서도 우리 5형제를 키워 시고 교육을 시키셨다.

그리고 친정어머니의 가난한 보릿고개에 진저리가 난다면 우리에게는 그다지 보리밥을 주시지 않았다.

어쨌거나 어머니 고생하실 때는 친인척들이 모르는 척하시다가 조금이라도 밥 먹고 산다는 소식에 시가, 친정에서 어머니에게 조카들을 맡아달라는 부탁으로 우리 집에서 친가 6촌 언니와 이종사촌 언니가 우리와 함께 살면서 학교 교육 해택도 주셨다. 

 
언니들은 그 당시 십 대들이고 나이도 같아 사돈지간이지만, 친구처럼 잘 지냈다. 

나와 나이 차이는 컸으나 언니가 없는 나는 언니들이 무조건 좋아서 어딜 가나 잘 따라다녔다. 

처음 조용한 동네에 살다가 시내 극장 번화가 부근으로 이사 오면서 두 언니는 호기심에 시내 구경하러 나가는데 아마도 나도 언니들 따라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때 아련히 생각나는 것은 추운 겨울날 용두산 공원에서 6살짜리 난 춥고 다리도 아프다고 했는지 두 언니가 어느 건물 앞에다 날 미군 담요를 깔아주고 여기 잠시 쉬고 있으면 곧, 돌아오겠다며 날 두고 간 것이다. 

난 기다려도 두 언니가 안 오니까 찾으러 나섰는데 방향 감각 없는 어린 나이라서 용두산 공원 계단에서 번화가 극장가 반대쪽  40계단으로 내려와 엉뚱한 거리로 나가버린 것이다.

즉, 예를 들면 서울 남산에서 강남 쪽으로 가야 할 것을 강북 쪽으로 하염없이 간 것이다.  
그래서 도착한 것이 우리 집과 완전 반대의 위의 지게꾼 동상이 있는 부산진역에 도착한 것이다.
6살짜리 어린애 걸음으로 그곳까지는 아주 먼 거리를 울면서 헤매고 다녔으면 누구에게 발견되었을 텐데...?
울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우리 어머니 교육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에는 경상도 말에서 '보리 문둥이'라는 말이 있는데 한국 전쟁 이후 생긴 말로서 피난민 영양실조 보릿고개와 불결한 생활환경에 자주 씻지 못해 앓는 피부병 질병으로 문둥이 두 낱말이 결합해서 생긴 말이며 어린애가 길 잃고 울고 다니면 그런 사람들이 잡아가면 없어진다면 무서운 경고를 잘 하셨다. 

하지만, 부산진역에 도착해 보니 어린 나는 우리 집을 도저히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았고, 누가 날 기차에 데워버리면 영원히 다른 지역으로 갈 것 같다는 불안감과 배도 몹시 고프고 물도 마시고 싶은 여러 가지 불안에 꾹 참았던 울음이 드디어 터진 것 같았다.

한국 전쟁이 훨씬 지나간 시절이라도 피난민 지게꾼들은 살림살이는 변한 것이 없어서 가족의 하루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역전 손님들 짐을 나르느라 대기하는 지게꾼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길 잃고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 어느 마음씨 좋은 지게꾼 아저씨가 내가 가지고 다녔던 미군 담요를 지게 널빤지 위에 깔아놓고 나를 태우고 우리 집을 찾아 나선 것이다.

 
난 그때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우리 집 주소도 모르고 길도 몰랐으나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집 주변에 극장들이 많은 번화가라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우리 어머니가 말씀하신 문둥이 집에 혹시나 잡혀가는 것이 아닌지 매우 불안했었다.

마음씨 좋은 착한 지게꾼 아저씨는 다행이 집 주변까지 찾아주셨고, 그다음부터는 집 부근이 기억나서 다행이 어렵게 집에 도착하였으나, 온 가족들이 나를 찾아다녀느라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고마운 지게꾼 아저씨는 물 한 잔도 못 얻어 잡수고는 나와 담요를 내려놓고 그냥 가신 것이다.


가족들이 나를 잃어버린 줄 알다가 집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우리 어머니가 날 안고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고마운 지게꾼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물 한 잔 못 드린 것에 매우 애통해하시면서 그분이 아니었으면 잘못되어 완전히 잃어버렸을 것이라며 어디에 계시는지 필히 꼭 찾아야 한다면 그 후에도 시간 날 때마다 나에게 자주 물어보신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길을 잃어버린 일이 악몽 같았는지 그 말만 나오면 울어버려서 더는 묻지 않으신 것 같았다.


내가 좀 더 성장한 후에 그분을 생각해 보면 그분도 집안 가장으로 하루살이 일거리로 겨우 살았을 텐데 나 때문에 그날은 허탕하고 빈털터리로 들어갔을 텐데 어머니 말씀대로 그분을 그때 찾았다면 울 어머니 마음의 빚도 갚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분이라도 불쌍하신 분을 보시면 절대로 그냥 보고 가시지 분이 아니셨다.
그 시절에 내가 기억나는 일도 길거리에는 몸이 불편한 나이 드신 거지 장애인이 추운 겨울날 오줌을 싸 떠는 것을 보시고 우리 집에 모시고 와 아버지 옷과 따뜻한 밥상을 챙겨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옛날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갖다주어도, 혹은 소금 장사가 오셔도 다리 아프고 배고플 것이라면 밥상을 챙겨주시는 분이다.

또한, 옛날 못 살던 시절에 어머니께서 집 주변 거지들에게 점심때마다 김치 국밥을 끓이다가 주셨다.

그 일을 나에게도 시켰는데 그 일만은 정말 싫어서 떼를 쓰면 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끝내 엄마 손에 이끌려 들고 갔었는데 내가 거지들에게 국자로 국밥을 나누어 주는 모습을 초등 학급 친구에게 들켜서 다음날 학급 친구들에게 거지와 한패라고 엄청나게 놀림과 왕따를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몸이 불편한 동네 할머니에게는 고추장을 대신 담아주시는 분이고 동짓날이면 남들은 가벼운 초와 향, 그리고 돈을 들고 절에 가지만, 우리 어머니는 절에 못 가시는 분의 100집을 다니면서 쌀을 모아 대신 정성을 들고 가시는 그런 분이다.

우리 어머니 철학은  "죽으면 썩어 없을 몸이니 살아있을 때 부지런히 남을 도우면서 살아야지"

늘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이런 어머니께서 진작 은인 같은 고마운 지게꾼 그분에게 보답을 못 하셨고 또한, 그분도 날 집에다 무사히 데려다주시는 바람에 하루 벌이 못 하셨을 텐데, 더구나 물 한 잔 못 드려서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사신다고 하셨다.

그 시절에는 전쟁 피난민들은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부산에서 조그만 연고가 있어도 매우 좋았을 당시이며 또한 우리 어머니도 불쌍한 사람들과 은혜를 입으신 분을 절대로 지나치지 않았으니 서로 만났더라면 많은 도움을 주었을 텐데,

오늘 아침에 읽어본 캐나다 한국일보에 기재된 어느 할아버지의 6.25사변 시절 피난길 사진과 피난민 애환의 특색을 살려놓은 역전 지게꾼 동상을 보면서 아련히 떠오르는 6살짜리 내 어린 꼬마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 오늘의 일기로 적어보았다.

 

 

- 2021년 1월 캐나다에서 복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