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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타 사진/스타 사진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에 대해서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1. 3. 17. 10:30

 

 

 

 

 오드리 헵번

(1929년~1993년)

 

배경음악 - 티파니에서 아침을 OST 문 리버 (Moon River Audrey Hepburn) (1961)

 

 

남녀노소 모두가 사랑한 세기의 연인. 진정한 미(美)의 상징하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녀 배우를 넘어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 미국 영화 협회(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3위. 노년엔 유니세프 대사로 봉사활동에 힘쓴 인간의 모습을 한 아름다운 천사.

 

 

 

 

벨기에 출생으로 영국 국적의 미국에서 활동한 영화배우이며 명연기와 아름다운 외모로 명성을 떨쳤다.
미국 연예계에 12명밖에 없는 EGOT(에미(Emmy, TV), 그래미(Grammy, 음악/청각 매체), 아카데미(Accademy-Oscar, 영화), 토니(Tony, 무대공연)상을 모두 수상한 배우 중 한 명으로 언어는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또한 영화계 은퇴 후에는 아름다운 선행을 펼쳐 더욱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정식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 아버지인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이 훗날 성에 헵번(Hepburn)을 붙이면서 본인도 'Audrey Hepburn-Ruston'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오드리 헵번의 어린 시절)

 

벨기에 태생으로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 여남작 (Baroness Ella van Heemstra) 사이에서 태어나 벨기에와 영국, 네덜란드를 옮겨가며 지냈다.
아버지는 오드리를 낳은 후 가정을 버리고 방랑, 헵번이 영화배우로 성공한 이후에 아일랜드에 있는 요양원에서 다시 만난 게 전부라고 한다. 당시 나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매우 험악했기 때문에 오드리 헵번도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심히 고민했었다.
헵번은 10대 시절 영국에서 발레리나를 꿈꾸다 네덜란드로 보내졌는데, 로우틴 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 키가 너무 커서(170cm) 포기했다고 한다.

 

 

 

세계대전이 심화되자 나치 독일 치하의 그곳에서 나치 독일의 식민지 탄압으로 인해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여 몸무게가 39kg까지 빠질 정도로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어린 시절에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난민 생활을 했는데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산에서 튤립의 구근까지 캐먹어야 했고 전쟁터의 빈 집에서 남기고 간 소시지, 베이컨, 햄 등 식재료들까지 먹었어야 했다고 한다.
당연히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니 그 식재료도 상하거나 썩은 게 많았지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서 그거라도 먹다가 배탈이 나고 설사로 심한 고생을 해야 했다.
먹을 게 없어도 너무 없어서 온갖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영양실조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종전 이후 영국으로 돌아왔을 무렵 전쟁난민 지원모금을 위한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때의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인해 생긴 그윽한 다크서클과 마른 몸매가 그의 미모를 가장 강력하게 어필하는 상징이 됨과 동시에 현대 여성들이 꿈꾸는 여성성의 척도가 되었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의 스타덤)

 

오드리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고자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1952년,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뮤지컬 '지지' 초연에 캐스팅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헐리우드에서는 여배우하면 일단 글래머러스한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었고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피아 로렌으로 대표되는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절에, 호리호리하고 지적이며 고전적인 얼굴과 몸매로 등장하여 그 후에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배우가 되었다.

 

 

 

24세 때인 1953년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되어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다.
로마의 휴일은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남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 이야기 구성의 원조로<_이것 외에도 훗날에 만들어진 여러 영화나 방송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랑크 카프라 감독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였으나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는데, 스티븐슨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몬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쥴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 연극 배우로서 어느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 것이다.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영화를 본 그레고리 펙이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자,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면서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하고 그의 예상대로, 헵번이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오드리 햅번은 <사브리나>를 찍을 때는 전문 요리사 수준의 요리를 배웠고 <하오의 연정>을 찍을 때는 첼로 연주를 배워서 직접 첼로를 연주했다.

 

<파계>를 찍을 때는 실제로 수녀 수업을 받으면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병원에 실려갔을 정도로 매 역할마다 진지한 자세로 임하였다고 한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1954년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제27화 아카데미상 여우주연 후보에 오르는 등 인지도를 점점 높혀간다.
이 영화에서 헵번이 입었던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고 불리며 유명하다.
참고로 영화배우에게 특정 브랜드가 최초로 의상 협찬을 시작한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인데,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바로 그 유명한 지방시(Givenchy). 영화 '사브리나'에서는 지방시의 옷들을 입어서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격상시킨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인하여 매출이 급격히 늘어 큰이득을 보았고,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의상협찬을 아끼지 않았다.

 

 

 

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그녀가 입었던 검정색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브랜드일 정도이다.
단 헵번은 협찬받은 옷은 모조리 촬영이 끝나면 반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 전쟁 영화 만큼은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전쟁 영화에는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내면서 그때 살던 곳이 바로 마켓 가든 작전으로 악명 높은 아른헴. 실제 자원하여 부상병 치료에 나섰고 전투에 휘말린 적도 있어서 당시의 처참한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남편인 멜 퍼러의 요청으로 헐리우드판 전쟁과 평화에 출연하긴 했지만 전투 장면에서는 출연하지 않는다.
여담으로 당시 16세의 간호사였던 헵번이 치료한 어느 영국군 부상병은 20여년 후에 <어두워질 때까지>에서 감독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오드리 헵번 스타일 탄생)

 

헵번이 선보인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 옷차림은 현대에도 꾸준히 재유행하거나 변형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여배우 중에서 스타일로 네이밍된 건 흔하지 않지만, 그녀의 이름을 딴, 헵번 스타일 이란 말이 실제로 존재한다.
헵번 스타일 은 단순히, 의상, 화장 등 뿐 아니라, 그녀의 영화 속에서의 행동도 포함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데뷔작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단발 헤어컷 역시 '헵번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로마의 휴일>에 나온 커피잔을 들 때 잔받침을 같이 든다는가 하는 등,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 나온 창가에 앉아 문리버를 부르는 영상.
어쩌면 별다를 게 없는 행동이지만, 그녀가 하는 건 뭔가 다르고 말로 표현하기는 극히 어렵지만, 직접 보면 이해가 쉽다.

 

 

 

 

당대 최고의 미인 여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현재까지도 영원한 미의 상징인 세기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녀의 사진이 세기의 휴대폰 광고에 쓰였을 정도이다.
국내 방송을 보면 종종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인테리어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은 그녀는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이른 아침에 검정색 선글라스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도넛을 먹는 모습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명장면으로 그녀에게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다.
물론 영화내에서 상류층의 남자들을 만나며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 홀리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건 덤. 다만 헵번은 홀리의 성격이나 생활이 자신의 실제 성격과 너무 달라서 이 영화를 찍기 싫어했다고 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헤어스타일과 검은색 드레스, 긴 장갑도 '헵번 드레스'라고 불리며 유명해졌을 만큼 영화 배우로 활동한 시기의 오드리 헵번은 한마디로 유행의 선두주자였다.
그래서 당대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각별히 사랑받은 배우이기도 했다.
사실 1950년대 이후 오드리 헵번이 대중문화에 워낙 영향을 끼친 부분이 많다 보니, 우리 일상 생활에도 알게 모르게 정말 영향을 많이 끼친 영화배우. 심지어 오덕계에서도 오드리 헵번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나 의상 등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오드리 헵번의 외모 컴플렉스)

 


하지만, 그녀는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는 오드리 헵번이지만 정작 헵번 본인은 외모 컴플렉스가 상당했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털어놓기를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이 각졌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90년대에 EBS에서 방송된 세계의 명배우 다큐멘터리에서 생전 오드리 헵번과 절친했던 친구가 밝힌 것이다.

 

 

 

 

 


"이런 얼굴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던 적도 있고 자신은 너무 말라서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헐리우드 여배우들 사이에서 '오드리 헵번은 거식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루머가 돌 정도였다고...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건강과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식단 관리와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그녀도 여느 사람들처럼 파스타나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디저트류는 절제하더라도 초콜릿은 예전 십대에 거의 죽기 적전에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을 먹고 간신히 아사를 모면했기 때문에 초콜릿은 평소에 적당히 먹어주는 걸로 자기 자신과 타협했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 뮤지컬)

 

사브리나 출연 직후 헵번은 영화계 인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인 '운디네(Ondine)'에 물의 요정 역으로 출연,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극 배우 출신으로서의 정체성과 단순히 예쁜 외모로만 뜬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1957년, 헵번은 전직 발레리나로서의 경험과 평소 특기였던 노래 실력을 살려서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에 출연하였다.
생전 헵번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 자신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 페이스'를 뽑았다고 한다.

 

 

 

 

1964년, 오드리 헵번은 두번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한다.
단, <화니 페이스>와 달리, 오드리 헵번의 노래 장면은 다른 가수의 더빙이었다.
본래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는 뮤지컬 초연 배우들을 그대로 기용하여 제작할 예정이었는데 영화사에서 초연 당시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루스의 낮은 인지도를 못마땅해 하면서 이미 영화 <화니 페이스>에서 뮤지컬 넘버들을 훌륭하게 소화한바 있었던 오드리 헵번으로 여주인공역을 바꾸었다.
하지만 헵번은 크랭크 인이 될때까지 뮤지컬 넘버들을 익힐만한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했고 감독 또한 오드리 헵번의 노래실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등에서 노래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의 더빙으로 영화에 수록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오드리 헵번은 줄리 앤드루스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출연이 불발되고 출연한 메리 포핀스에 밀려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치는 바람에 헵번은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이처럼 오드리 헵번이 영화상에서 맡은 배역 자체는 다양했지만 데뷔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대부분의 영화상에서 헵번이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의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사나 대중들이 오드리 헵번에게 바랐던 게 저런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오드리 헵번은 이에 불만이 많았는지 연기생활 후반기에 찍은 샤레이드(1963)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미망인역을, 어두워질 때까지 (1967)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평생 15번의 배역을 맡은 햅번은 60년대 후반부터는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로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곁에(원제: Always)' 이 영화의 주연을 맏은 리처드 드레이퍼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레이퍼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
이 영화을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오드리 헵번의 사랑, 결혼, 이혼)

 

첫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이라는 연인이 있었으나 헵번이 유명해지면서 스케쥴이 바빠지자 헤어진다.
이후 미국 배우인 유부남 멜 퍼러 (Mel Ferrer)와 사귀게 되는데, 멜 퍼러는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헵번도 인정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지만, 헵번을 구워 삶았다.
결국 1954년 멜퍼러는 세번재 와이프를 버리고 오드리 헵번과 네번째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은 아무리봐도 헵번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탑여배우가 한물간 이혼남 배우랑 결혼하는 셈이었으니....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오드리 헵번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등 다른 거장들이 제안한 캐스팅을 거절하고 남편인 멜 퍼러가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 퍼러는 결혼 생활 와중에도 자신의 바람기와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헵번과 잦은 다툼을 했고 헵번이 첫번째 임신 중 언포기븐 촬영을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한 이후 잦은 유산을 하게 된다.
(퍼러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는 아들 하나밖에 없다.)
결혼 생활 말년에는 헵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결국 참다못한 헵번은 1968년 이혼한다.
이후로 헵번은 멜 퍼러를 피한 것은 물론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 퍼러는 헵번과 이혼 후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장수하다가 2008년 만90살로 사망했다.

그 후 1969년,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부터 "나는 오드리 햅번과 결혼식을 올릴꺼에요" 라고 말하며 오드리 헵번을 따라다니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와 재혼하였고 재혼시 나이가 만 39세 였는데도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 헵번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했던 안드레아 도티는 중년이 된 헵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오드리와 결혼 후 13년만에 또 이혼했다.
그래도 오드리는 도티와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도티와 이혼 후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되고 구호 활동시기에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를 만나서 1993년 사망할 때까지 동거한다.

 

 

 

평소 오드리 헵번은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밥을 해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치도 하지 않는 매우 검소한 성격이었다.
스위스로 이사를 갔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재규어에서 나온 예쁜 승용차도 가지고 싶어했지만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 보러 갈때 쓰지도 못한다고 끝내 안 샀다고 한다.
둘째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사람들이 "너희 엄마가 밥은 주냐, 책은 읽어주냐"고 물어봐서 다른 엄마들은 아무도 집에서 밥을 안 해 줘서 자기에게 묻는 줄 알았다고 한다.

 

 

 


(아름답게 늙는다는 말의 좋은 사례)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만년의 삶 대부분을 유니세프에 헌신했다.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본인도 전쟁 난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녀도 어린 시절의 처절한 경험은 그녀가 자선사업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공동체에서 일했다.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 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그런 활동에서 미소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하고 또한 아름답다.

오드리 햅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서 태어나 1993년 1월 20일 (향년 63세)로 스위스의 자택에서 맹장암(대장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남긴말) 



이 내용은 오드리 햅번이 숨을 거두기 일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때에 아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 오드리햅번 -

 

 

 

 


2014년 5월 4일 구글에서 오드리 헵번의 탄생 85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일 로고를 제작했고, 2017년 9월 27일 햅번의 생전 애장품들이 경매에 나왔다.

그 중 '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대본이 있었는데 헐리우드 대본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인 63만2천750 파운드(9억8천만원)에 낙찰되어 신기록을 세웠다.

이날 경매에서 팔린 햅번의 소장품들 총 판매액은 약 71억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