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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24화)나의 자서전 - 셋 번째 운명적인 사랑 부분에서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09. 1. 29. 17:19

 

(24화)나의 자서전 - 셋 번째 운명적인 사랑 부분에서



여름은, 내 인생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많았던 것 같았다.

여고 3학년 여름에 첫사랑을 알게 되면서부터 말괄량이 얄개에서 처음으로 가슴 속까지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첫사랑을 느껴보았다.

그리고 다음해 여고 졸업하는 해 첫 여름을 맞이하면서 두 번째 운명적인 만남으로 사랑이 그에게 옮겨 갔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대구에서 내려온 그와 부산 인근 섬으로 가고자 통통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불어 와서 내가 입은 옷이 검은색 정장 속 흰 티셔츠에 바람이 한가득 불어와 내 배를 불룩하게 만들었다.

평소에 소리내어 잘 웃지 않는 그가 갑자기 나의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내 웃었다.

자갈치 시장 있었든 생선 복어 (경상도 사투리 복지 )와 현재 너무나 흡사하게 닮은꼴이라며 웃음보가 터졌었다. 

그 계기로 복 받고 지혜롭게 살라는 뜻으로, 그의 애칭으로 복지가 되었다.

그도 같은 검은색 옷에 흰 티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큰 고래를 비교하였고, 모양새가 닮았다는 뜻으로 그 후부터 애칭으로 복지새끼와 고래 아빠가 되었다.

 

도착한 인근 섬에는 때마침 옛날 전통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고 그 광경을 호기심으로 신기하게 볼 수 있었고 남의 잔칫집에 낯선 그의 이름으로 결혼식 축의금도 드리고 그 덕분에 맛있는 잔치 국수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추억을 통통배에 함께 싣고 자갈치 부두에서 부산역으로 향했다.

 

부산역에서 아쉬움으로 헤어지는 그가 갑작스럽게 다음 부산에 올 때는 우리 집에 방문해서 부모님과 가족에게 정식적으로 인사드리고 사귀고 싶다고 했었다.

이제 그를 알아가는 불확실한 상태의 호기심 철부지 어린 마음뿐이라 그를 우리 가족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아직은 이른 것이라 당황이 되고 부담스러웠다.

평소의 우리 집은 가족 간에 있었든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잘 털어놓는 가족 분위기지만, 준비 없는 마음으로 그를 가족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망설이다가 어느덧 그가 내려오기로 한 약속 전날이 되었고 고민 끝에 우리 집에서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고 시집간 이종사촌 친척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언니 의견은 내가 아직 어린 나이로 남자 보는 눈이 없으니 잠시 사궈도 어른들이 꼭 한번 보고 판단해야 한다며 무척 걱정하면서 집으로 데리고 올 것을 충고해 주었다.

내 갈등은 잠시 혼란스럽고 마음의 결정이 정하기도 전에 친척 언니는 이미 우리 가족들에게 말했다.


다음날이 되었고 그는 깔끔한 정장 옷으로 선물을 안고 우리 집에 방문을 하였다.

우리 가족들은 철부지 내가 별 볼 일 없는 남자일 것이라고 단정했다가 그를 보고 다들 화들짝 놀라 하셨다.

큰 키와 남달리 매우 잘 생긴 외모에 점잖은 바른 예절로 공손히 절을 올리는 모습에 우리 어머니께서 첫눈에 벌써 만족하시고 바짝 당겨 앉았다.

그리고 그의 가족 관계와 그 외 꼼꼼히 물어보시기 시작하였고, 나 역시 그때까지 몰랐던 그의 가족 사항을 처음 듣게 되었다.

부모님은 일본 교포이며, 현재 일본 오사카에서 거주하시면서 사업하시고, 결혼하신 형님과 단둘밖에 없는 형제 중의 막내이며, 군대 제대하고 고시 공부하는 중이며, 현재 대구에서 형님과 살고 있다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어머님의 따님이 보통 고집쟁이가 아니라서 그동안 키우신다고 고생 많으셨다고 생각 듭니다. 여태 예쁘게 키워 주셨는데 제가 데리고 갈 동안 지금처럼 부탁하겠습니다. >

우리 가족과 나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에 어안이 벙벙해서 놀랐고 멍해졌었다.

오직 우리 어머니는 그의 가족 사항이 마음에 드시는지, 미동 없이 그의 말을 열심히 듣고 계셨다.

 

우리 집 방문 후, 나에게는 안부 없이 우리 어머니에게만 안부 편지를 보냈었고 내용도 그동안 나를 키워주어서, 고맙다는 거듭 인사말과 앞으로 나와 만날 때는 우리 집에 먼저 인사드리고, 만날 것이며, 우리 집 한가족 구성원 되도록 최선의 노력하겠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다.

편지를 받으신 어머니는 글씨마저 좋다시며, 그를 매우 만족하셨고 철부지 딸을 보시는 눈빛조차도 달라지고 있었다.

 

가을이 되었다.

그는 약속대로 우리 집을 먼저 방문하고 가족들에게 인사드리고 그리고 가족의 허락을 받고 나를 데리고 나왔으며 그런 면에서 우리 어머니는 나보다 그를 더욱더 신뢰하시고 좋아하셨다.

그는 처음 우리가 싸웠든, 신문사 신입사원 환영회 해변에서 그날 내가 못되게 굴었고 실랑이를 벌었든 바닷가로 다시 한번 가보자며 그곳으로 향했었다.

철 지난, 어촌의 해변은 하늘이 끝없이 파랗게 펼쳐져 있었고 조용하고 잔잔한 파도만이 한가롭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싸웠든 추억들이 어제처럼 떠올랐다.

우리가 달라진 것은 그날은 그가 낯설고 생소했지만, 지금은 가족의 허락과 편안함으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MP 3 없는 옛날 그 당시에, 내 애장품인 야외용 손 전축을 흰 항공 가방에 넣고 왔었고 노을진 해변에서 낭만이 감도는 음악이 흘렸고 쑥스러워하는 그를 일으켜서 베사메뮤쵸 포크 댄스를 가르쳐주었고, 그는 어정쩡하게 어설픈 모양으로 따라 추었다.

아무도 없는 해변은 우리의 넓은 놀이터이며 무도장이 되어주었다.

파도가 밀려오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빠르게 쓰고 난 후, 다음 파도에 지워주면, 다음 파도가 오기 전에 그 답변을 빨리 써주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 그때 그 고집쟁이 정말 맞아?)

( 맞죠. )

( 오늘은 다른 복지 같아. )

( 내 마음 내일이면, 또 달라져요. )

( 지금이 좋아 달라지지 마. )

( 변덕쟁이라서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어요. )

그는 행복해 하였고 그때 내 말버릇을 고쳐 주겠노라고 기습 키스한, 바위에서 나란히 앉아, 그는 내 짧은 쇼 커트 머리를 손바닥으로 흔들면서 그날을 회상하고 웃었다.

그의 보수적인 성격은 지금까지 사궈 보았던, 여자들은 당연히 긴 생머리에 여성스럽고 예의가 바르고, 얌전한 여자였지만, 너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투와 네 행동은 용납이 되지 않았는데, 까칠한 성격을 갖진 너를 좋아하고, 사랑할 것이라는 것이 상상도 할 수 없었다며 내 귀에 속삭이듯이 말을 했었다.

< 내가 기대했던 나의 이상형과 정 반대의 너는 남자애처럼 머리카락도 짧고, 말투도 엉망이고, 고집만 센 이런 애를 좋아하게 되였는지,. 앞으로 내 운명도 걱정스럽구나! >

<그러니. 한 번 더 신중하게 잘 생각하시라니까요.>

< 하늘에서 내려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자! >

그가 운명이라고 했었고 그의 눈빛에는 뭔가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운명이란 각본을 한 번 더 되새겨 보았다.

애당초에 부산에서 대학 시험을 쳤다며, 물론 취업 신문을 보지 않을 수 있었고, 또한, 봄날 벚꽃 축전 때, 버스를 타지 않고, 신문사에서 주체한 관광 배를 타는 바람에, 신문사 사장님이 나의 뱃멀미를 도와준 인연 되였고, 어머니와 말다툼으로 그날 취업 광고 신문을 보게 되었다.

그도 그 당시 군대 제대하였고, 그 시점에 신문사 사장님의 도움 호출로 처음으로 부산에 내려왔었고 그리고 시험 출제와 시험 감독을 한 것이 지각한 수험생 즉, 시험감독과 수험생 관계가 우리의 인연으로 엮어주었다.

우리가 꼭, 만나야 하는 숙명이라며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고 그림 같은 아름다운 석양이 잔잔한 바다를 아름답게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빛은 우리 곁에 다가와 그와 내 얼굴 사이로 붉게 비추었다.

그 분위기에 그는 나에게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키스를 했었다.

감싸 안는 그에게 내가 질문을 던졌었다.

< 혹시 주머니에 공이 있어요? >

<엉,. 웬~ 공? 없는데? >

그가 바지의 주머니 속을 털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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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다시 내 얄개 여고시절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 집이 부산 번화가 극장가 중심 부근에 있다 보니, 여러 친구와 학교 등 하교 시에, 늘 바꿔는 극장 간판 프로를 보고 다녔었다.

그날의 사극영화 간판 중에 내시라는 글 문구가 있었다.

점심때에 간판 문구가 생각나 나는 친구에게 내시가 뭐냐고 묻었었다.

친구는 왕을 모시는 내관들이며, 남자 성기가 없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하였고 내시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그런 남자가 많다고 친구는 아는 척했었다.

요즘처럼 성교육이 없는 옛날 그 당시에는 친구들에게 묻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지금 생각하며 물론, 근거 없고 어처구니없는 엉터리 대답도 참으로 많았다.

내가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묻었고 친구는 남자의 앞 바지에 두툼하게 표시 나는 남자는 정상인이고, 두툼하지 않은 모든 남자는 성 장애인 고자로서 내시와 똑같으니 앞으로 누구를 사궈도 잘 살펴보아야 한다며 아는 체를 했었다.

< 아~ 그렇구나! >

점심때에 그런 호기심에 가득 차서 떠들고 있었고 곧이어 5교시 국어 선생님이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오셨다.

나와 내 친구는 동시에 책상 옆밑으로 고개 숙여서 선생님의 앞 바지를 살펴보았고 친구와 동시에 입을 틀어막고 소리 질렀다.

< 엌…흡… 고자야! >

그날 이후 국어 선생님의 별명은 고자가 되어버렸다.

다른 친구가 국어 선생님의 아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아마 보육원에서 데리고 왔을 것이라고 한 것이 그럴듯한 소문으로 순식간에 퍼졌고 멀쩡한 선생님을 고자로 소문나신, 선생님은 별명의 근원을 찾으려고 한 명씩 교무실로 불려서 압축 조사를 했었다.

< 그러니까… 나보고 고자… 소문낸 놈이 도대체 어느 놈인지 말해… >

<ㅋㅋㅋ…>

교무실에서 엿듣은 다른 선생님마저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는 바람에 화가 더욱 나신 선생님은 괘씸한 모욕감을 느끼시고 어느 놈이 고자라고 소문냈느냐고 난리를 치시면 꼭 찾고자 혈안이 되셨다.

선생님께서 한 명씩 친구들을 교무실로 불러놓고 친구마다 그랬단다.

<어느 놈이… 내가 고자라고… 그래서… 응?… 빨리 말 못해. 너는 누구에게 그 말 들었어?>

나에게 압축 조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곤경에 빠져서 선생님을 피해 한동안 도망 다닌다고 마음고생이 무척 많았든 얄개 시절도 있었다.


 

하여튼 그도 표시가 없는 것 같아서 고자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자의 본능으로 여자를 안으면, 발기된다는 것은 그때는 모르고 바지 주머니에 정말 공이 들어 있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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