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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치료 칼럼/영화치료 칼럼

친절한 금자씨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4. 5. 4. 07:10

 

 

 

친절한 금자씨

(Sympathy For Lady Vengeance)

 

장르: 스릴러, 드라마
주연: 이영애(금자), 최민식(백 선생)
감독: 박찬욱
개봉: 2005.07.29

 

내가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생각들

감독의 상식의 궤도를 이탈하는 플롯 때문이었을까
우리 내면에 잘 숨겨놓은 감정을 예의 없이 까발린 불편함 때문이었을까

영화를 보고 난 후 혼란스러웠고 시험치고 난 후 답을 몰라서 웅성거리고 불안해 하듯 의도된 불편함 속에 사로잡힘이 부담스러웠다.


 

금자는 천사이며 동시에 마녀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흰 옷을 입고 얼굴에 빛이 나며 구원받기 위해 기도와 간증을 열심히 하고 동료들을 위해서 발벗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는 천사다.  

 

 

감방의 공동의 악인 마녀를 3년간 계획적으로 죽인 후 마녀의 자리를 물러 받은 금자는 피를 상징하는 붉은 눈화장에 어둠의 검은색 옷을 입고
체계적으로 복수상대에게 다가가 복수의 총을 쏜다.

진범을 잡지 못해 3명의 아이가 더 살해된 것에 대해 형사에게 소리친다 진범을 잡았더라면 더이상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고
마치 학교참관수업처럼 아이를 가슴에 묻은 부모들을 교실에 모아서 절대 악의 존재인 백선생에 대해 유괴영상과 함께 프리젠테이션을 한다.
요트를 사기 위해 아이들을 계획적으로 죽인 악의 상징을 어떻게 처단할 것인지에 대해 금자씨는 친절하게 물어본다.

함께가 아닌 따로 처단하자는 것을 화장실 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어차피 화장실은 각자 들어가서 혼자 볼일 보는 것 아니냐고 절대 악을 공동으로 처단하고 난 후
늦은 밤 함께 원테이블에 앉은 부모들을 보면서 왜 나는 집단상담 장면이 연상되었을까

자식이 먼저 죽은 것, 그것도 유괴범에 의해 죽어갔다면 부모들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질까
그 날 이후 단 하루도 편히 쉬고 웃을 수 있었을까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이미 영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최고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그 외상을 힘겹게 이겨내려는 찰나에 친절한 금자씨는 그들을 불러내었고 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그 영상과 자세한 설명으로
다시 각인시킨 후 살인이라는 또다른 치명적인 외상을 은밀하게 함께 나누어 지게 한다.

 

 

이 영화속의 공동악인 상징인 백선생은 반사회성 성격장애자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생명의 존엄성으로 대해주지 못할 지언정 요트 구입의 대상물로 이용하고 죄책감없이 반복 살인을 저지른다.
배고프면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듯 그에게는 식욕이나 성욕이 배설행위나 다를바 없는 수퍼에고가 없는 이드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인 사회악, 절대악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절대악의 존재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자이기 때문에 묶어서 며칠 낮밤을 공포에 떨게 하고 법의 틀에서 벗어나
여러명의 희생자들에게 차례차례 처참하고 무참히 죽이는 단체살인이 허용되어도 되는 것인가

친절한 금자씨의 양면성처럼 희생된 부모들도 동일한 양면성을 표출하는 것이 아닌가
목사의 선행뒤에 파파라치의 악행이 숨어있고 성가대의 찬양 전에 아무렇게나 바닥에 팽겨쳐버리는 종이컵처럼
사람들의 위선과 양면성을 이 영화는 생략없이 약간의 예의도 없이 그리고 있고 보는 이들에게 직면하고 있는 듯 하다.
누구나 화장실을 가고 은밀히 볼 일을 보는 것에 비유하여.

이 영화에서 20대 이하의 어린이와 청소년은 모두 착한 존재다.
21세 이상의 어른들은 모두 악하고 위선적인 존재다.

 

 

 

악해져가는 금자씨도 딸의 얼굴과 목소리, 표정, 편지 앞에서는 어느 어머니와 같다.
목숨 걸고 납치하려는 괴한들에게 딸을 지키고 자는 딸을 자리를 마련하여 편하게 눕히고 살인을 작정하고는 딸을 그 공간으로 부터 분리시키는 모습들...
자신을 버린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는 딸에게 미안해라고 4번 말하는 모습

1세 된 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 들어갔듯 14세 된 딸 앞에서는 악해진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13년 감옥에서 복역한 금자에게 깨끗이 살라고 내민 목사의 흰두부를 내쳐버린 금자지만
내가 엄마 대신 그 사람에게 용서를 빌겠다는 순수한 말 앞에서는 딸이 내민 흰 케익을 오열하며 머리를 파묻어 버린다.

어떤 악한 자도 자식앞에서는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
칭찬 받지 못하더라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될수만 있다면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악한 자는 있어도 악한 어머니는 없는 건 그 이유가 아닐까

19살된 호기심많은 어린 소녀가 실수를 했고
20세가 갓 지나자 말자 어머니가 되었고
모성을 깨닫기도 전에 누명으로 13년이란 인생의 젊음을 송두리채 빼앗긴 사람이라면 금자가 아닌 누구라도
복수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녀가 원래 친절한 성품이든 불친절한 성품인가 하는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가지 관점, 천가지 생각과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나의 관점과 생각도 그 천가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상담과 심리의 시각에서 영화를 보는 즐거운 경험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

 

 

           -  글 제공: 영화치료 칼럼리스트  김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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