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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치료 칼럼/영화치료 칼럼

블랙스완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1. 4. 24. 22:03

 

 

 

블랙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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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단순하다.

완벽과 성공에 집착하는 발레리나 소녀의 '백조의 호수' 주연데뷔 성공, 그리고 주인공 발탁부터 본 공연까지의 심리적 갈등과 분열..


스토리로만 보면 참 단순하다.

 그러나 천재감독은 심리스릴러로 탄생시키기 위해 퀄리티 높은 카메라 앵글 기법과 음향, CG, 훌륭한 연출로써 멋지게 잘 그려내었다.

 거기다 주인공나탈리 포트만은 캐릭터에 자신을 온전히 투사하여 날 곤두선 예민하고 복잡 미묘한 심경들을 소름끼치게 잘 표현해 주었다. 영화제의 상이란 상은 다 쓸어서 안겨주고 싶을 정도로.


영화의 엔딩씬은 최고의 절정 경험(Peak Experience)을 한 주인공 니나의 "나는 완벽해"라는 대사로 끝을 맺고, 보는 관객들도 그제서야 강렬한 강도와 속도, 긴장으로 혹사당한 감정들을 매트 위로 던져서 쉴 수 있었으리라.


오락적 기능으로서 영화를 보는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웰메이드 공포스릴러물’로서 괜찮았을 것 같다.

그렇지만 영화를 심리학의 렌즈로써 요리저리 비틀어 보는 영화치료사에게 블랙스완은 "alleh" 를 부르게 하는 신나는 영화였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심리학 메스로 해부당한 영화 속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1. 니나는 어떤 사람인가?


 '니나'는 여리디 여린 열두살 소녀 같은 백조처럼 순수한 캐릭터다.

단장은 4년 전부터 봐와서 그녀가 백조 오데뜨의 역할은 잘하리라 믿지만 사악한 흑조인 오닐의 역할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그녀는 너무나 순응적인 어린이 자아(Adapt Child)로 가득 차 있고 이성적이며 본능을 지나치게 억압하여 단장의 말을 빌자면 '통나무 같아서 안고 싶지 않은' 성적 매력이 없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단장은 가진 재능에 비해 지나치게 본능을 억압하는 그녀가 안타까워 위험한 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2. 니나의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

 

 니나의 엄마는 3류 발레리나로 지내다가 발레리나로는 제법 늦은 나이인 28살에 니나를 임신해 발레를 그만둔다.

그리고는 혼자 힘으로 다른 관계나 활동은 끊고 그림을 그리면서 딸에게 올인한다.

그녀는 침울하고 어둡다.

수시로 딸의 눈치를 살핀다.

별다른 외적 활동을 하는 것은 없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외할머니와 통화하는 씬도 없다.

 외부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채 은둔적으로 생활한다.

외동딸이 열두살에서 성장을 멈추길 바라는 듯 매 시간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며 과보호를 하면서 스물 살이 훌쩍 넘은 그녀 방을 온통 핑크색 천지에 한방 가득 곰인형들로 채우면서 그렇게 제 인생은 지우개로 다 지우고 오롯이 딸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니나는 자기 전에 큰 몽둥이를 방문에 걸어놓고 잔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일까?

그것은 분열된 자아의 영향일 수도 있고 엄마의 집착으로부터의 탈출일 수도 있다.

엄마는 희생적이고 모든 것을 다 주는 것 같지만, 그녀의 정신건강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3류 수준이었다는 것을 감추려 하고 세월이 한참 지났지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는 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꿈을 포기했다는 듯 압박을 한다.

또 아침식사에도 자몽 반알만 먹는 딸에게 엄청난 칼로리 덩어리인 케익을 사오고 많은 양을 딸에게 먹으라고 강요한다.

딸이 거부를 하자 그녀는 거부당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못 참으며 극단적으로 케익을 버리겠다고 협박한다.

단 한 장면이었지만 엄마의 미성숙함과 평소에 딸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주고 딸은 자신의 본심과 다르게 엄마에게 맞추는 패턴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폐쇄된 대인관계와 자기주장을 표현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건강한 인성을 갖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3. 니나에게 흑조가 없는 이유는?


 니나에게 엄마가 모르는 사생활은 전혀 없으며 엄마가 짜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한다.

지하철로 출근하는 딸을 데려다 줄려고 까지 하니 말이다.

니나는 물론 환상이지만 그런 엄마에게서 해방되기 위해서 엄마가 보는 앞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성행위를 한다. 그러고는 외친다. ‘난 더이상 열두살 소녀가 아니고 사생활이 있어요’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들(엄마에 대한 반항, 순응적인 자아의 억압에서의 탈출, 자기 속의 흑조를 발견)로서 니나는 자유롭게 본능에 충실하기도 마음먹었다.

 성을 느낀 다는 것, 누구나 사춘기의 시작은 성호르몬의 활발한 운동 덕분에 성욕을 느끼면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니나는 사랑받고 수용받기 위해 또 지금껏 희생한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서 12살 소녀에서 성장이 멈추어야만 했다. 그래서 여전히 엄마 말 잘 듣고 혼자서 못하기 때문에 엄마가 일일이 도와줘야 하는 어린 딸로 남기 위해서는 성장을 거부해야만 했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계속 거부했고 심약한 ‘아이같은 어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별 문제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거부한 흑조를 스스로 끄집어내야하니 말이다. 단단하게 묶어둔 철갑자물쇠를 풀어야 하고 뒤늦은 나이에 사춘기를 겪는 장면에서도 엄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성욕을 느끼는 것은 다 큰 어른이라도 죄책감이 생긴다. 묘하게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그 장면도 실제인지 니나가 만들어 낸 환상인 지 알 수는 없다.


 

 

 

4. 백조, 흑조를 열망하다.


 자신과 전혀 다른 여성 릴리.

그녀는 타고난 천재발레리나다.

 별로 노력을 하지 않지만 카리스마가 있고 자유함이 있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가능하다.

자몽 반개로 아침을 때우는 그녀와 달리 한 밤중에 빅사이즈의 햄버거를 자유롭게 먹는다.

술과 약물까지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에도 스스럼이 없다.

 모든 것을 규제하고 틀 속에서 갇혀사는 니나에게 릴리는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다.

 불에 뛰어 드는 불나방처럼 드렵지만 그녀에게 다가가고 그녀의 삶과 생활방식을 흉내낸다.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는 잠자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욕구는 절제한 채 연습, 연습, 또 연습해야 한다.

재능은 없지만 죽어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동경과 동시에 질투의 대상인 것이다.

게다가 단장의 인정, ‘저 사람처럼 표현하고 되어라’는 말은 니나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릴리와의 성적환상에서 '참 착해'라는 환청은 또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든다.

집 안에서도 그 환청은 들렸었는데, 아마도 그건 평생 그녀의 성장과정에서 옥죄어온 대사일 것이다.

엄마에게 늘 들었던 '참 착해'. 이러한 억압들의 티끌들이 오랜 세월동안 불어나서 분열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 고통이 자신의 오른 쪽 등에서 검은 털(흑조: 본능을 상징하는)이 돋는 환상을 보게 하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털을 뽑고 계속 생채기를 낸다.

 환상상태가 아닐 때는 마치 누군가에게 당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녀 자신의 환상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치 자신 속의 흑조를 필사적으로 억압하는 상징으로 보인다.

완벽한 흑조가 되고 싶어 몸부림치는 그녀는 사실은 자기 속의 흑조를 죽이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슬프다.   


 

 

5. 좋은 것의 합은 완벽인가?


 흑조를 완벽히 표현하길 원하는 니나는 그녀에게 없는 흑조를 소화하기 위해서 주변의 사람들의 장점들을 스크랩한다.

화려한 동경대상이었던 ‘베스’의 소집품들을 몰래 훔쳐와서 숨긴다.

이런 행위들은 부적처럼 간직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행운이 내게도 올 것이라는 희망과 위안을 안겨준다.

그래서 지금도 아들을 꼭 낳아야만 하는 며느리는 아들 잘 낳은 다른 여성의 속옷을 얻어서 품에 안고 다니고, 짝사랑하는 사람의 소지품을 몰래 훔쳐지니기도 하고, 동경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가져와서 똑같이 성형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베스의 물건들을 미신처럼 품고 지니며 또한 릴리의 모습들을 흉내내며 따라하면서 그녀는 점점 완벽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며 반대의 모습에 집착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은 거품처럼 잃어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인데, 한 면에만 집착하는 것은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해야만 한다는 집착으로 인해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김태희의 눈, 이효리의 코, 한가인의 이마, 한예슬의 턱을 모아서 성형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 될 수 있을까. 조화가 없다면 괴물이 탄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영화의 제목을 계속 읽으며 그 의미를 찾는 것은 영화감독이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데, 왜 감독은 한 무용수가 두 가지 상반된 배역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에서 모티브를 찾았으면 인간의 양면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백조’와 ‘흑조’로 제목을 부치지 않고 ‘흑조’라고만 했을까.

흑조(블랙스완)는 18C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에서 흑고니가 처음 발생되어서 생긴 용어이며, 예외적이고 발생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일이 실제 발생한 사건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악의 상징인 흑조,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탐하면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차피 영화치료에는 정답이 없으니 내가 생각하는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서 열띤 토론을 해보는 것도 유쾌한 담론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글 제공: 영화치료 칼럼리스트  김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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