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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개론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2. 5. 4. 18:08

 

 

건축학 개론

(2012)

 

 

  아날로그적인 사람이 디지털족으로 살아가기란 숨 가쁘고 버겁고 이따금씩 허하다.

「건축학개론」은 이러한 갈증의 사막에 단비처럼 촉촉이 적셔주는 반가운 영화였다.

15년 만에 첫사랑이 불쑥 나타나 그 세월의 억겹을 뚫고 마치 어제의 연장선처럼 자연스럽게 시간을 이어간다. 외모는 세월이 흘러 쉽게 알아볼 수 없지만 친밀하게 말을 건네는 승민의 첫사랑 서연, 영화는 이 둘의 과거 -운명처럼 마주치고 친해지고 가슴앓이하며 이별하는-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진다.

 

 

그들의 첫 번째 집, “빈 집”

 

 이 영화에서는 여러 집이 나온다.

그 중에서 둘의 사랑이 시작된 빈 집이 첫 번째 집이다.

아직은 어색한 사이인 두 사람은 ‘건축학개론’ 숙제를 하기 위해 동네를 돌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신비로운 담쟁이넝쿨 집에 들어선다.

주저하는 승민에게 보란 듯이 성큼 들어서서 집주인마냥 구는 서연은 이미 승민을 자신의 ‘마음 집’에 초대한 것으로 보인다.

잘 알지는 못하나 편하고 미더운 사람인 승민에게 호감을 느꼈기에 용기있게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혼자 찾아가 빈 집을 정리하고 마른 화분에 물도 주면서 서연은 둘 만의 아지트로 가꾸어 나간다.

여느 커플처럼 분식점이나 카페가 아닌 둘만의 방해받지 않는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마른 화분의 생명을 소생시키며 둘을 하나로 응집해 줄 수 있는- 공간에서 소꿉놀이의 엄마아빠놀이 하듯이 승민과 함께 할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것이 서연이 또렷하게 의도한 바가 아닐지언정.

 

 

   

 

 

그들의 두 번째 집, 꿈의집 설계와 건축모형 “기억의 습작들”

 

둘은 빈 집을 통해 점점 친밀해지고 리포트를 핑계 삼아 기차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서연은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을 밝힌다.

이런 날엔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승민에게 “너도 친구잖아. 둘이서 파티하자”고 소박한 생일파티로 초대한다.

못 마시는 막걸리도 함께 마시며 꿈꾸는 집을 그린 낙서를 건네며 꼭 지어줘야 한다고 강요한다.

여자의 심리로 말하면 이건 엄연한 작업이다.

리포트 핑계로 하필 생일날에 꼭 맞추어서 단둘이 기차여행을 하고 공짜로 집 지어달라고 땡깡부리고 못 마시는 술 마셔가며 잠자는 척 어깨에 기대어서 첫 키스를 기다리는 건 우회적인 고백이며 밀도 높은 프로포즈인 것이다.

그런데도 직접화법을 안 쓰면 모르는 우리의 승민은 서연의 고백을 도통 해독하지 못한다.

자기감정에 취해서 연애고수 친구 조언을 들으며 못 피우는 담배도 피우고 못 마시는 술에 취해가며 사랑앓이를 호소한다.

결국 고백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서연의 설계도(?)를 보면서 몇날며칠 고생해서 처녀작인 건축모형을 완성시킨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나중에 이런 예쁜 집에서 아이 낳고 잘 살자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알코올의 힘까지 빌려가면서 온갖 미사여구들로 말 짓기를 하다가 결국 가장 순수하고 날 것의 표현을 하기로 결정한다.

"널 좋아해" 그 말 짓기가 스스로도 흐뭇하여 서연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리지만 압구정선배와 함께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도망쳐 버린다.

 

  기억의 습작, 처음에는 왜 하필 타이틀곡이 기억의 습작일까 의아했다.

다른 좋은 노래도 충분히 많은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이 제목이 딱이다 싶었다.

 일단 전람회의 첫 음반 타이틀곡이라는 점에서 갓 대학생이 된 이들의 순수하고 풋풋함을 표현할 수 있고, 또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영화의 카피처럼 첫사랑은 기억의 습작이지 않는가.

그리고 이 둘의 기억의 습작은 많다.

처음 둘을 만나게 해 준 건축학개론 수업, 둘의 아지트인 빈 집, 옥상에서 함께 들은 이 노래, 서연이가 준 CD와 CD플레이어, 기차여행, 꿈의 집을 그린 낙서와 처녀작인 건축모형.. 가슴 설레는 기억이 많은 그 시절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갔으므로 모두가 다 기억의 습작인 것들이다.

 

 

 

 

 

 세 번째 집, 그녀가 혼자 사는 집 “갑돌이와 갑순이 신드롬”

 

  무엇이 서연을 그토록 사랑했던 승민이 한순간에 도망가게 한 것일까? 그 부분이 궁금했다.

더 이상 서연이 순결하지 않다는 것?, 지조를 버린 서연에 대한 배신감?, 아니면 우리가 아닌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 인한 물러남이었을까? 글쎄, 추측컨대 그건 아마도 열등감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짝퉁 티셔츠를 입고 차도 없고 빽 있는 아빠도 없고 등등.. ‘없는 것 투성이’나 그 압구정선배는 승민이 없는 모든 걸 가진 듯 보였고 게다가 서연의 마음까지도 가졌으니 그 열등감에 도망쳤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확인도 없이 도망갈 구실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승민이 정말로 서연을 사랑했다면 부축해가는 그녀 앞에 혜성처럼 나타나든지 닫혀진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는 게 맞지 않았을까?

그리고 서연의 선택을 존중했다면 그 후라도 찾아가 고백하는 것이 정말 사랑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날 밤 서연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것에 한 표 던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연은 선배가 아닌 승민을 사랑하고 있었고, 승민 앞에서는 잘 마시던 술을 그 선배 앞에서는 분명히 술을 못 마신다고 거부했다.

여자가 단둘이 남자랑 술을 마신다는 건 마음을 연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리고 만취했지만 선배가 다가왔을 때 분명히 두 번이나 거부하고 밀쳐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그건 일방적인 성폭력이다.

 어쨌든 승민은 자신을 애처럽게 여기고 스스로를 보호하기를 선택했고 만나기로 약속한 첫 눈이 오는 날 하루종일 슬퍼서 온 몸으로 울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늦은 밤 승민은 그 빈 집을 찾아갔을 것이고 서연이 남긴 선물을 가져와서 그렇게 미련하게 지금껏 서연의 CD플레이어와 CD를 간직한 것이다.

 서연이 짝사랑한다던 선배가 아닌 사실은 승민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훈남에 조건 좋은 선배는 그냥 여고시절 총각선생님이나 연예인 누구를 좋아하듯이 동경하거나 혹은 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선배와는 둘 만의 스토리와 역사가 없다.

함께 한 시간과 함께 나눈 생각, 추억, 감성들이 있을 때 이야기가 생기고 역사가 만들어져 그 결과 사랑이 꽃을 피운다.

그러나 승민은 선배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 적'을 만들고 있었고 그 적이 결국 상처받고 뒤돌아서게 만든다.

 

  어릴 때 들었던 "갑돌이와 갑순이' 노래는 이유 없이 기분 나빴다.

일단 안타깝고 슬펐고 그 둘이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

결국 오해로 둘 다 사랑을 포기하고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평생을 살아간다는 내용인데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정면으로 부딪혀보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끙끙거리다 포기해버리는 바보 같은 이야기에 화가 났다.

그러나 너무너무 옛날이야기라 그럴 수 있으려니 넘겨지지 않는 알약 덩어리같은 걸 애써 꿀꺽 삼켰었다.

결국 갑돌이 승민은 갑순이 서연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사랑한 것이리라.. 결론을 내린다.

 

 

 

 

네 번째 집, 그가 살았던 오래된 집

 

 승민은 계속 건축공부를 해서 직업의식 투철한 건축가가 된다.

그러나 승민의 집은 서울 언저리에 작은 시장 근처 삼십년 된 낡은 집이다.

 이제 결혼을 하고 먼 나라로 유학을 가야하는 그에게 늙은 홀어머니를 혼자 두고 가는 건 참 무거운 선택이다.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게 아파트로 이사 가라는 아들의 권유에 늙은 모친은 “여기서 30년을 살았는데 어딜 가냐”고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 던진 한마디. “집은 그냥 집일 뿐이다.” 고객들의 집을 혼신을 다해 아름답고 멋진 작품으로 지어 그들의 새로운 역사의 공간으로 창조하려고 하는 건축가 외아들의 엄마, 그 엄마의 철학은 참으로 소박하다.

집은 그냥 집일 뿐, 꾸밀 필요도 없고 더 편할 필요도 없는 그냥 당신의 노쇄한 육신을 가리기만 하면 충분한 낡아빠진 아들의 티셔츠 천 쪼가리 같은 그냥 그런 공간일 뿐인 것이다.

 익숙하고 편한 꾸미고 말고 할 필요가 없는 공간, 그게 그냥 집인 것이다.

오래된 이웃들과 가까이서 자주 만나고 남은 여생을 나눌 수 있는 마음 편한 공간, 그러면 집으로서 절대 필요충분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 어미의 확고한 철학 앞에 승민도 그냥 입을 다문다.

 

 

 

 

다섯 번째 집, 그녀의 미래 “제주도 집”

 

  승민은 그 옛날의 약속처럼 정말로 서연의 집을 짓게 된다.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까다로운 서연의 구미와 기호에 맞게 여러 번 수정을 거듭하면서 서연이 원하는 집을 지어준다.

승민의 집을 짓는 자세는 참 숭고하다.

왜 그 집을 지으려 하는 지 그 집에서 어떤 꿈을 꾸기를 원하는 지 그녀의 마음에 먼저 다가가려는 태도는 그의 집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집을 위한 집”이 아닌 집의 주체인 "사람"에게 최대한 맞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훌륭하다.

그래서 서연의 욕구와 바람에 현실적인 건축의 계산을 조율해가면서 조금씩조금씩 만들어 간다.

승민의 이런 고객을 대하는 태도는 상담자가 내담자를 이해하려 하고 상담을 진행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를 이해하려 하고 끊임없이 그의 욕구와 바람에 귀를 기울이며 중간 중간 확인해가며 조율해 나가며 완성하는 과정, 그 속에 주인이 결국 고객이 되도록 하는 과정이 승민은 참 좋은 집을 짓는 사람, 좋은 상담자같다는 존경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지은 집에는 이야기가 있고 중요한 그녀의 역사가 간직되어 있다.

비록 두 사람의 "마음 집"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담아 완성한 집"을 지음으로써 그들의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였다.

15년 전 그들의 소꼽놀이에서 마른 화분에 물을 주고 꽃을 가꾸려고 한 것처럼 지붕위에 잔디를 깔고 꽃을 키울 수 있는 공간과 남은 삶이 길지 않은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들려주고 싶은 서연의 진심을 살펴 피아노 방을 만들고 서연과 아버지의 추억들- 키를 잰 벽돌벽, 연못을 만들어 주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마음, 어린 서연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살려서 소망의 공간을 재현하였다.

산타클로스처럼 승민은 여러가지 마음이 담긴 소망을 선물로 주고 미련을 버리고 미래로 떠난 것이다.

그런 승민의 마음을 잘 알기에 그가 떠났으나 서연은 편안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훨씬 가벼우진 마음으로 새롭게 인생을 리셑하리라 기대해 본다.

 

  

 

 

새롭게 만난 그들은 왜 다시 하나가 되지 못했나?

 

  홀연히 15년 만에 연기처럼 나타나서는 그 때의 일을 하나하나 물어보며 궁금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승민과의 모든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서연, 그런 그녀를 대하면서 승민도 과거의 그로 돌아간다.

나중에 집 지어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라고 소리치는 서연, 15년 전에 승민이 만들어 준 건축모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도대체 왜 나타났냐,네 속셈이 뭐냐’고 다그치는 그에게 ‘넌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그리고 ‘궁금해서’라고 서연은 답하고 그 둘은 안타깝고도 가슴 시린 입맞춤을 한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돌싱이 된 서연과 아직은 결혼하지 않은 승민이 다시금 현재의 사랑을 시작할 거라고 기대했으나 참 현실적으로 그들은 진짜 이별을 한다.

승민에게는 어리나 그만을 바라보는 또 다른 그녀가 있다.

순간 아쉬웠지만 또 한순간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우리들의 함께 한 시간과 그 시간에 대한 책임감도 소중하지만 현재의 역사를 함께 써내려간 두 사람의 시간에도 책임을 져야하고 옆의 사람을 챙기는 것도 그 이상으로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트라우마다.

 

  원하지 않았으나 이미 일어나버린 일들도 트라우마지만 미완성된 것도 트라우마다. 차라리 일어난 일은 힘들지만 훌훌 털어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하고 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도저히 손 써볼 수도 없는 트라우마다.

이별을 선언한 승민은 힘들어도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라 그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원인도 영문도 모른 채 계속 걷고자 한 길이 끊겨져버린 서연이 더 큰 트라우마인 것이다.

15년이 지나 나타난 서연을 기억 못하는 승민에 비해 좀 더 트라우마가 큰 서연은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승민은 기억 못하는 사소한 말 한마디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서연의 말 “궁금해서...”. 궁금하다는 말은 그립다는 말이고 그립다는 말은 보고 싶다는 말이다.

 사모한다는 말이 마음에 두고 애틋하게 생각하며 그리워한다는 것이니 결국 서연은 승민이 궁금했고 그리웠고 생각하며 보고싶었다는 사모한다는 고백이다.

이 영화 속 둘을 보면서 사람은 참 표현을 안 하면 모를 수밖에 없는 제한적인 생물임을 절감했다.

15년이 지난 그녀가 진짜 듣고 싶었던 말은 그도 그녀를 좋아했다는 말 그 한마디였다.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어서 서연은 여러 질문을 한다.

 '그걸 몰랐느냐?'의 승민의 말에 그녀는 웃으며 “내가 바보냐, 그것도 모르게”하며 웃는다.

서연은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승민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을까? 승민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얼마나 절절하고 간절한 지 물론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써 표현되지 않으면 그건 거품같은, 연기처럼 형체는 있으나 만질 수 없는 기체 같은 사랑인 것이다.

표현하는 그 순간 비로소 두꺼비가 왕자로 변신하듯이 마법이 풀려져 손에 잡혀지는 고체같은 사랑으로 진화된다.  

 

 

심리적 아킬레스근과 분노

 

영화는 끝났으나 몇 가지 잔상이 남는다.

사람은 본디 의식이 안되는 게 정상이다.

 의식이 되는 건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징표다.

영화 첫머리에 “왜 제주도에 집을 지으려 하느냐” 승민의 질문에 서연은 심하게 발끈 한다.

단지 건축가에게는 의례적인 질문이건만 서연은 “그럴 거면 집을 짓지 마“라고 버럭 화를 낸다.

이혼녀임을 숨기고 지금 이혼소송 중인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숨기려하다 보니 별 것 아닌 상대의 말에도 발끈해지는 것이다.

상대방의 의도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는 데 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가면 이번에는 승민이 발끈한다.

유학가는 그에게 ”그럼 엄마는 어떻게 하냐?“고 묻는 말에 심하게 발끈 한다.

”그럼 어떡하라고, 내가 평생 엄마랑 살까“ 화를 벌컥 낸다. 당황한 서연은 ”아니. 그냥 궁금해서”라고 말 끝을 흐린다.

우리는 화를 낼 때 상대방이 버릇이 없거나 예의가 없어서 혹은 싸가지가 없어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내면의 아킬레스 근이 건들려졌기 때문에 아니 건들려지지 않더라도 건들려질 것 같은 두려움에 쉽게 울컥하고 화를 낸다.

그런 의미에서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온 몸이 아킬레스 근인 것이다.

 그의 삶이 얼마나 긴장 속에서 살아가며 그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 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심리적 아킬레스 근, 다른 말로 열등감과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이 들을 잘 달래주고 상처를 잘 싸매고 치유해 주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행복해지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지 못한다.

스스로 어르고 달래야 한다.

 

 

영화음악 "기억의 습작" 

 

  한 가지 더, 누구는 이 영화에서 타이틀 곡이 너무 강해서 파장이 커서 오히려 영화의 감동이 반감된 것 같다고 했다.

주와 종이 바뀐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추억이 깃든 사물이나 장소, 그리고 특히 음악은 숨어있는 기억의 시냅스를 툭툭 건드려 자주 추억과 맞닺을 수 있게 해 준다.

20살의 어린 서연이 첫사랑 승민에게 “기억의 습작”을 들으면서 “함께 들을래?”하며 이어폰 한 쪽을 내어 준 것은 서연이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공유하자고 자신의 마음으로 초대하는 뜻이고 내 마음의 일부를 선물한다는 뜻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 음악이 어딘선가 들릴 때면 서연과 승민은 서로를 기억해내고 또 그리워했을 것이다.

음악이 이 세상에 있고 그래서 이토록 쉽게 추억에 잠기고 만날 수 있게 해줘서 참 근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다시 보고 싶은 영화. 「건축학 개론」이런 아날로그적이고 슬로우 푸드같은 소박하고 따스한 영화가 뜻있는 감독들에 의해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숨어있던 내 감성세포들이 신나게 춤출 수 있게 해주길 소망한다.

이 영화는 우리들의 “기억의 습작”이다.

 -  글 제공: 영화치료 칼럼리스트  김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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