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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내 생각과 내 짧은 글

복지의 써니 시절을 생각해 본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1. 5. 30. 09:57

 

 

  영화 써니를 보고 나의 써니 시절을 생각했다.

 

최근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에 오면 국내 영화와 자막이 있는 영화를 실컷 볼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해진 짧은 방문 기간동안에 바쁜 일정으로 '써니' 영화 한 편만 겨우 보았다.

써니 영화를 보면서 그 시절 풋풋한 시절이 아련히 떠올랐다.

여고시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써니 영화는 학창시절의 추억과 우정을 그려낸 요즘 대세로 자리 잡은 복고풍의 모든 대세가 담겨 있었다.

영화 속에 삽입한 다양한 팝송은 내 여고 시절 올드팝 음악마저 아련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더구나 최근 블로그에서 올드팝과 자서전을 쓰고 있는 나로서 이 영화는 더욱더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왔다.

 

 

 

 

써니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 시절 추억을 함께한 친구들과 같이 보았으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 자서전에 없는 또다른 추억을 더듬어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그 시절 여고 등하교 시 항상 7~ 9명 친구와 몰려다니면서 킬킬 까드륵~ 거리가 좁을 만큼, 늘 시끄럽게 다녔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나와 질긴 인연으로 여고 2~ 3학년 두 해를 맡으셨다.

어느 날인가 남학교에서 누가 가져왔는지 설문조사(아케이드)가 돌아다녔다.

애들이 서로 돌러 가면 재미있는 글과 그림으로 채우며 수업시간에 몰래 돌리다가 선생님에게 들킨 사건이 있었다.

선생님은 누가 남학교에서 가지고 온 것이냐고 출처를 다그쳤고 애들은 서로 책임 회피를 하다가 끝내 학급 전체 기압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을 학급 친구들이 벌 받는 것이 안타까워 내가 무슨 정의 용사인 양 해결사가 되겠다고 용감하게 나섰고 들킨 친구와 함께 교무실에서 내가 모르는 경로라서 말을 몇 번 번복하다가 더욱 화가 나신 선생님은 교무실에 우리를 오랫동안 세워 두셨다.

친구가 연기로 현기증으로 힘들어 쓰러지는 척하였고 양호실로 실려가는 분주한 틈을 통해서 문제의 아케이드는 순식간에 교무실 창밖으로 던져 대기한 다른 친구가 문제의 증거물을 없애 버리는 바람에 결국 우리 선생님만 교장 선생님에게 추궁을 당했다.

그 친구는 흔히 요즘 말하는 예쁘고 연약한 공주 과에 속하는 친구라 심심하면 잘 쓰러지는 척하는 친구다.

더운 여름날 지루한 아침 조회 운동장에서도 교장 선생님께서 조금만 연설이 길어도 쓰러지는 척 연기를 아주 잘해 운동장 나무 그늘에 특별히 앉아 있어 부러웠다.

나도 그 친구가 항상 부러워 그런 연기를 하고 싶어도 아무도 튼튼한 나를 믿지 않기에 할 수가 없다.

오죽 안 믿었으면 급성 맹장염 수술하는 날에도 배가 아파 조퇴하고 싶다고 했으나 우리 선생님은 꽤병으로 간주하고 방과 후에 청소까지도 몽땅 시킨 일도 있었고 집에 와 그 날 정말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

물론 늘 건강해 보인 것과 그간 못 믿게 한 얄개의 내 자업자득이겠지만...

 

그 친구는 우리 반에서 가장 체육을 못 하는 친구로서 좌우 방향을 통 구분을 못 하는 친구이다.

체육시간이면 친구 때문에 항상 좌우 줄이 맨 날 엉켜 우리 반이 고생 많았는데 그런 친구가 왜 대학을 체육과를 택했는지?

그 후 대학교수님이 되신 체육 선생님은 친구와 대학에서 또 만나 좌우 방향을 가르친다고 고생하셨다.

친구는 지금도 좌우 방향 통 구분을 못 해서 아직 흔한 운전 면허증이 없다,

 

어느 날 우리 학교에 새로운 선생님께서 전근 오셨는데 생김새가 너무 억울하게 생겨? 북한에서 방금 내려온 수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교내에 돌아다니는 모습이 수상해 보여 반공정신이 투철한 그때 그 시절에 수상한 사람을 보거나 신고하면 사례금을 준다는 포스트가 아주 많았던 시절이라 그 시절에는 난 파출소  신고를 좋아해서 신고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사례금 대신 우리 선생님에게 아주 혼쭐났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전방에서 추위로 고생하시는 군인 아저씨께 단체 위문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실명을 쓰지 않는 편지라 장난기가 발동해서 뚱딴지같은 글을 적어 냈는데 편지 내용을 일일이 점검하신 선생님께서 다음 날 아침 조회에서 누가 이런 편지를 썼느냐고 소리 내 낭독을 하셨다.

 ( 국군 아저씨 추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시베리아 추위에 비하면 우리나라 추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지요)

애들은 킬킬거렸고 선생님의 따가운 눈초리는 순간 나에게 향했다.

내가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발뺌을 한 기억도 난다.

 

못살던 그 시절 가난한 가정이 많아서 육성회비를 밀린 반 친구들도 많았다.

선생님께서 방가 후 육성회비를 못 낸 아이들은 책가방을 교단에 두고 다시 집에 가 학비를 가지고 오게 하셨다.

집에 간다고 당장 가져올 수 없는 상태라 반 친구 처지가 불쌍해 선생님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선생님께서 그냥 집에 가라고 했다며 헛소리를 하여 순식간에 교단에 있던 책가방들이 모두 사라지고 교실 문을 잠그고 나와 버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선생님께서 갑자기 몽땅 사라진 책가방 행방과 교실 문이 잠겨 있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느냐고 추궁해 다음 날 선생님을 피해 만화에서 나오는 '톰과 제리' 관계처럼 피해 도망 다녔다.

 

 

 

 

여름날에 점심시간이 끝나고 잠이 엄청 쏟아지는 지루한 수업시간에 여기저기서 책상 위에 교과서를 망으로 펴놓고 잠 던 아이들도 있었고 손거울을 책 속에 끼어두고 머리핀과 유리테이프로 쌍꺼풀을 만드는 친구도 있었다.

옆 짝이 건너편 학급 친구가 전연 머리가 흔들리지 않은 체 쪽잠을 자면서 콧방울이 터지는 모습을 보라며 킬킬거렸다.

순간 참지 못하고 조용한 수업 시간에 박장대소로 웃고 말았다.

성격이 몹시 급하고 무서운 다혈질인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고 화가 나신 선생님은 칠판 분필을 나에게 던지면서 당장 교단 앞으로 나오게 하셨다.

교단에서 출석부로 내 머리 때릴 것 같은 순간에 옆 짝이 방귀를 뀌는 바람에 참지 못하고 웃어 죄송하다고 했더니 무서운 선생님도 내 말에 어쩔 수 없이 피식 웃는 바람에 위기를 넘긴 기억도 난다.

 

아침 교문 앞에서 합기도 유단자이며 웅변대회에서 항상 상을 받을 정도로 껄껄한 남자 음성을 가진 내 친구는 단발머리도 귀 윗부분까지 몽땅 자르고 고구마 같은 긴 얼굴로 규율부장을 착실히 맡고 있었는데 우리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 규율 선생님께서 귀밑으로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자로 재고 규율에 벗어나면 가위로 자르는 소동에 그 친구 도움으로 도망 다녔던 시절과 친구들과 뭉쳐 등교하다 보니 지각을 할 적에도 그 친구 도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도 새롭다.

 

그리고 항상 책가방에 무겁고 묵직한 굵은 배터리를 라디오에 붙여 고무 줄 칭칭 감아서 가지고 오는 친구가 있었다.

가정이 복잡하고 불운한 가족 관계로 늘 친구 없이 조용히 음악만 듣고 있었던 정말 얼굴도 예쁘고 늘씬한 친구였는데 자기 인생도 불행할 것이라 비관한 그 친구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

 

 

그리고 또 뭐가 생각나지…?

 

아~ 졸업식 날도 지각하는 바람에 강단 교단 위에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께서 쭉 앉아 계시어 강당 앞으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졸업생은 앞줄이고 재학생은 뒤 줄이라 졸업생이 일어날 적에 재학생 자리에서 우리가 모두 우뚝 일어서는 바람에 슬그머니 다시 앉게 되었고, 재학생이 일어나 송별노래를 할 적에는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재학생의 송별노래를 졸업생 우리도 함께 일어나 불러 우리 선생님의 따가운 눈초리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교실에서도 졸업장을 내 실수로 남의 것과 바꾸어 챙기는 바람에 졸업장 사건으로 한바탕 뒤집어졌다.

졸업식을 마치고 우리 선생님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렸는데 선생님께서 나에게 당부하셨다. 

앞으로 길에서 만나도 선생님을 절대 아는 체하지 말라시며

 

 

 

그때 그 시절에 우리 어머니도 똑같은 말씀으로 그래셨다.

꼭 너 같은 애를 낳아봐야지 이 어미 심정을 알 것이라고 그랬었다.

 

 

세월이 흘려 내 아이들 엄마가 되었을 때 어느 날 친정에서 시장 가신 어머니께서 무거운 짐을 받으러 나오라는 급한 전화를 받고 누워 뒹군 폭탄머리, 낡은 헐렁한 어머니의 몸뻬 바지로 급하게 나왔는데 친정이 번화가 주변이라 건너편 길에서 그 사이 많이 늙으신 우리 선생님께서 걸어가시는 모습을 발견하고 너무나 반가워 당장 뛰어가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번화가에서 그런 내 모습은 길거리에서 행상하는 아주 못사는 것으로 오해하실까 봐 끝내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다음 날 깨끗한 차림으로 선생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학교에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퇴임하셨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리 선생님께서 앞으로 길에서 만나도 내가 선생님을 절대 아는 체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그 후 나 역시도 내 분야의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그만두었으나, 20대 초반이었던 제자들은 이제는 아이 엄마가 되었고 학부모가 되었고 그래도 스승의 날이면 빠짐없이 제자들이 모여서 큰 꽃바구니를 안고 찾아와 맛있는 음식 대접을 받으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내니 나 같은 제자가 없어 천만다행스럽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운이 좋아 나를 닮은 애가 없이, 모범생으로 잘 커 주었다.

블로그가 있는 줄 모르는 내 자식과 제자들 앞에서는 말 잘 듣고 모범 학생으로 커 온 냥 포장해 살고 있다.

우리 벗님들만, 모르는 체 해 주시면 된다. ㅎㅎ

 

 

그동안 매일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추억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어느 날 흘러나오는 추억의 올드팝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자서전을 쓰는 인연이 되었는데 또다시 써니 영화를 보니 색바랜 누른 앨범을 다시 보듯이 지나간 추억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단순한 진리 덕분에 요즘 인생을 두 배로 다시 사는 느낌이다. 

다가오는 미래도 또한 지나고 보면 또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세월이 너무 빨라서 인생이 아주 짧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지만, 

내 안의 긍정적인 힘으로 오늘도 내 삶을 소중하게 사랑하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이 시절 중고등학교를 함께한 아주 친한  세 친구, 암으로 하늘나라에 간 너희에게 아름다웠던 이 추억을 하늘나라로 띄운다.)

 

 

                            - 2011년 5월 30일 대구에서 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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