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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0. 5. 24. 11:46

마지막 외출

 

 

나이 든 노부부에게는 아들이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는 돈 30만 원을 찾는 그 날,
함께 시장도 보면서 칼국수 한 그릇에 행복을 나눠 담곤 했답니다.

 

오늘 마주하는 아침은 기대되는 날이기에 거리에 널려있는 햇살을 밟고 걸으며

“임자…. 오늘이 그날인 거 맞지?”

“아, 네.. 아들한테 생활비 오늘날이 맞는구먼요 “

 

듬성듬성 나 있는 머리카락에 동백기름으로 한껏 뽐을 낸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는 지팡이가 먼저 걸어간 길을 따라 은행에 도착한 노부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 붉어진 얼굴만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가 넘 일찍 왔나 벼.. “

“일찍 기는요.. 은행 문 이제 닫을 시간이구먼요.

 

은행 앞에 쪼그리고 앉은 노부부는 365일 현금 인출기에 서로 번갈아 가며 찍어보지만 아들이 보낸 돈은 끝내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마음과 닮아 있는 휘어진 길을 따라 햇살이 그을려 빨랫줄에 널려있는 생선 같은 모습으로 집으로 온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내미는 상을 뒤로하고 막걸리잔에 구부러진 지난날을 되새겨 보고 앉았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번 한 번만 좀 도와주세요 “

“너 그렇게 가져간 돈이 벌써 여섯 번째인 건 아냐? 그리고 너 때문에 이제 전세금 걸린 거 이것밖에 없는데 뭘 어찌 또 해달란 말이냐? 차라리 이 아빌 팔 때가 있으면 다 팔아서 써라 “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주인집에 말을 해 월세로 돌리고선 아들 손에 돈을 주러 온 노부부에게

“아버지, 엄마..
내가 매달 삼십만 원씩 보내줄 테니 월세 십만 원 주고 나머진 두 분 생활비에 보태 쓰세요 “

“그래... 그래..
우리 걱정하지 말고 하는 일이나 열심히 해서 너나 잘살면 우린 아무 욕심이 없다 “


그렇게 떠나간 아들이 겨우 세 번 붙이고는 저버린 약속을 밑천 삼아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아버지는 허가받은 혈육에서 그냥 서로를 잘 아는 남으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있을 때, 비틀어진 문을 열고 울면서 들어서는 며느리..

 

“이 밤에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 “

우산을 받쳐 든 사람처럼 흘러내리는 눈물부터 퍼부어 놓던 며느리는

“아버님…. 어머님 저 이혼할래요”

“아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게 먼 소리냐 어미야?”


갯바위에 붙어 있는 미역 줄기 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 며느리의 뜬금없는 소리에,


“어미야! 에비가 뭔 일을 또 저질렀냐..?”

“혹시 또 돈 해주셨어요?”

 

어머니는 그 말에 시선을 방바닥으로 내리깔더니 공허한 눈동자로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노름방에 처박혔는지 집에 들오질 않아요. 아이들 공책 사줄 돈도 없는 집에서 벌어와도 시원찮은 판에…. 흐흑흑 “

 

그렇게 며느리가 돌아간 뒤 지친 저녁을 보내고 달려온 새벽이 올 때까지 노부부는 말을 잃은 채 방바닥만 쳐다보고 앉았습니다.

 

“영감..
우리 이 집을 빼서 며느리 줘서 손자들이라도 잘 크게 해주고 변두리로 가면 한 칸짜리 쪽방이 있답디다 “


말없이 듣고 있던 할아버지는 색 바랜 누런 점퍼를 걸치고는 무 안스 레 비추고 있는 달빛을 굳어져 버린 문을 열고 어디론가 나가버리더 뭣하나 잡히는 거라고는 없는 거리를 걸어 파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릅니다.

.

.

.

같은 시간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자식 키울 때 손때 묻은 가구들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챙겨놓고 있었고요.


회색빛 하늘에 멍울 같은 구름이 듬성듬성 그려놓은 하늘을 보고 있는 노부부는 별 하나에 들어 있는 지난날 그리움들을 펼쳐보고 있습니다.

 

닭장 같은 쪽방에서는 바라볼 수 없는 하늘이기에 집에서 바라보는 마지막 하늘이 아니길 빌면서...


바람으로 아픔을 닦아내며 산비탈을 걸어 내려온 노부부는 쪽방을 얻고 남은 돈으로 조그만 손수레를 사서는
잃어가는 슬픔을 안고 온거리를 배회하며 하루하루 박스를 줍고 있습니다.

 

“영감…. 저 건널목 백화점 앞으로 가봅시다. 거긴 빈 상자가 많이 나올 것 같아요.. “

백화점 앞으로 걸어온 노부부의 눈에 버려진 상자들이 수북한 걸 보며 황금을 발견한 듯 서둘러 리어카를
세워놓고 바람도 길을 멈춘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펼쳐진 상자들을 접어놓고 있을 때 번지르르한 옷차림에 손가락마다 쇼핑백을 잔뜩 걸고서 화려한 웃음소리와 함께 백화점 문을 열고 나오는 아들 내외와 손자의 모습과 마주칠까
손수레 뒤편에서 썰물에 드러난 조개처럼 숨을 죽이고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허탈한 속내를 먼저 내보이고 싶지 않은 할아버지는 때늦은 밥 대신 막걸리잔에 해묵은 눈물을 채워놓고 한술 밥으로 행복했던 지난날들을 곱씹어 보고 있을 때,

어디서 달려온 아침처럼 허물어진 쪽방 문을 열고 코를 막으며 들어서는 사람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였기에 노부부의 입가는 벌써 미소 되어 내려앉았습니다.

 

“애야…. 네가 어인 일이여 이 해어진 옷은 다 뭐구?““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가 돈이 없어 나 급식도 못 먹고 점심도 굶어.. “

 

울먹이는 손자를 긴 애달픔으로 달래 고선 폐지를 주워 모은 돈 십여만 원 남짓을 주머니에 넣어 보내고 돌아서 오는 할아버지의 아픔을 베고 누운 노란 달이 뿌려준 자릴 더듬어 멀어져 가는 손자가 산동네 골목길을 잘 내려갔나 싶어 어둠을 가르며 두 눈에 힘을 줘보고 있을 때,

 

거리에 도착한 손자를 데리고 가는 며느리의 모습에 속눈썹에 걸려있던 눈물은 다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영감! 손주는 언덕 밑에까지 잘 데려다주었어?”

“그려 잘 갔으니 안심하고 자”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는 달빛을 따라 집 밖을 나와 앉은 할아버지의 노쇠해진 어깨 위에 마음 한 칸 숨기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봅니다.

 


흙물, 풀물 들어도 자식 키울 때가 최고라는 말을 한숨과 눈물이란 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알 같은 속을 감추면서....

 

“영감…. 다 잊으세요. 자식은 부모의 눈물을 먹고 자란다잖아요. 그냥 우리 저 세상 가는 날까지 자식한테 신세 안 지고

몸 건강하게 살다 가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 생각하자고요 “

“새끼에게 살을 다 뜯겨 저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우렁이 같은 신세와 다를게 뭐 있남..”

 

자식 앞에 부모의 인생은 땔감보다 못한 것 같다며 모자람을 채운 것만으로 얻어가는 인생이라는 듯
부모라는 이름 끝에 매달린 슬픔은 눈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진 세월을 함께 이겨내며 버텨온 부부라는 시간 앞에 점점 지난날의 기억들을 잃어가는 아내와 자신의
무뎌져 가는 육체는 말하기도 전에 굽은 하루 앞에 남아있을 핑계가 없다는 듯 꽃 아래 봄날에 죽기로 말 없는 약속을 하고 있었습니다.


민들레 꽃씨가 바람 되어 날려가던 어느 봄날,
아침 일찍 들린 전당포에서 금이빨을 맡기고 받은 돈을 하얀 봉투에 넣고는 영정 사진을 찍으러...


할머니의 머리도 감기고 얼굴에 분까지 발라주며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선 나란히 외출합니다.

평생에 한 번 오는 청춘이 아름답듯 부부 인생에 한 번 오는 이별도 아름다워야 한다며...
스치는 바람 속에서 이별을 전한 노부부의 모습을 더 이상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노란 달빛을 밑천 삼아 밤새 꾹꾹 눌러쓴 편지에는


“혹, 우리 부부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어도 자식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과 봉투에 들어 있는 돈은 장례비에 써 달라는..

 

- 생각하는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