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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 - 진여론(眞如論)中1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09. 4. 23. 06:21

 

 

달마대사
 
진여론(眞如論)中1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부처는 사람들이 미혹 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드는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미혹되지 않았다면

 

누가 항상 그들 앞에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
물어 보겠는가?
그러므로 부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마음을 안다.

이 마음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마음은 해탈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이 마음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마음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변함없는 여래라고 불린다.

 

그것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신성한 자아이며, 불멸이며, 위대한 성자다.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지지만 그 본질은 변치 않는다.

 

부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또 경에 일렀으되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의 마음이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예배하게 하지 말라.
부처나 보살이 그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숭배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이 마음은 비어 있으며 어떤 형상도 담고 있지 않다.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마귀이며,

그것들은 수행의 길에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깨비에게 무엇하러 예배하겠는가?
그것에 예배하는 자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것에 예배하지 않는 자는 진실로 아는 자이다.

 

그대의 생각에 이끌려서 그것을 예배하는 것은

마귀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부처의 본래 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말을 명심하라.

 

평상심에서 벗어나서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마음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마음에 어디 그런 것들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속에 비쳐지는 귀신이나 마귀나 거룩한 성자의 형상이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숭배 하지도 말라.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형상들은 환상일 뿐이니 그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미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인격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대가 누군지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을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그대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한 순간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라.
그대가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다.

 

그것은 지금 그대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동일시가

완전히 흔들릴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
만약 그대가 알 수 없다면 그때 그대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거기에 거짓이 생겨난다.
거기에 억지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미친 상황에서 멀리 도망칠 수 있다.
누구에게든지 물어 보라. 그가 누구인지 말이다.
그는 자신이 의사이거나 기술자 혹은 교수라고 말할 것이다.
혹은 자신은 기독교인이거나 힌두교도거나 불교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거짓된 동일시이다.
그대 자신 주위에 거짓의 얇은 보호막을 쳐 놓은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가 미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대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 생각에 수천 가지의 동일시를 만들어낸다.
그대는 누구의 남편이거나 누구의 아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그대 모습이 아니다.

그대가 날 때부터 남편으로 태어났는가?

 

날 때부터 의사나 기술자였는가?

그것들은 그대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그대의 공허함을 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공허감이 그대 속에 있다면,

그대는 미쳐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거짓된 동일시를 더욱 두텁게 만든다.
하나의 동일시 위에다 다른 것을 쌓고 또 쌓는다.
그들은 정치적인 모임에 가입하고, 종교의 구성원이 되며,
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의 일원이 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만들어 갖다 붙인다. 그대가 미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지지만 자신(여래)의 본질은 변치 않는다.부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진여본성(무심)을 떠나지 않는것과 같다.


사람은 완전히 벌거벗은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그대 자신을 덮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옷을 벗어버린 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삶을 산다.
진정한 자기 모습보다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껍데기를 더 좋아한다.
그대 자신을 그저 지켜 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미혹되었다.'는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 깊은 말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삶이 불행하고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이유이다.
달마가 사람들이 어둠 속에 빠져서 점점 더 깊은 미혹 속에서

방황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시각에서 한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없기에 갈수록 거짓된 동일시의 층을

두텁게 만든다.

 

그들의 사랑도 거짓이며, 그들의 인간관계도 거짓이다.

그들의 삶 전체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이 자기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한다.

 

하는 일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물어본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안다.

거기에는 선택의 문제가 없다.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

그대의 본성에서는 오직 옳고 바른 것만이 나온다.

 

장미 넝쿨에서는 장미꽃만이 피어난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과거에 나는 라이푸르(Raipur)에서 몇 달씩 머무르곤 했다.

 

다시 내방 건너편에서 늙은 수학 교수 한 사람이 살았다.
나는 창문을 통해 그를 쳐다보곤 했다.

 

그는 창가에 아름다운 꽃들을 갖다 놓고서는 매일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가자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화분의 꽃들은 지는 법이 없었다. 항상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그의 창가에 가까이 가서 그 꽃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꽃은 진짜가 아니었다.

진짜처럼 만들어진 조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 꽃이 생화인 줄로만 알았다.

그가 매일 거기에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그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 꽃들은 물을 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내가 계속 물을 주기에 그 꽃들이 살아 있는 줄로 압니다."
그대가 만들어낸 동일시는 바로 이 조화와 같다.
그것은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그것은 그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불행으로부터 그대의 삶을 해탈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대의 지루한 삶을 환희의 세계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불멸로 그대를 데려다 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부처란 말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깨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두가 부처다.
그대 역시 부처다.

 

거기 차이가 있다면 그대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대는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거기에 부처가 있는지를 모른다. 깨달음은 바로 그대 삶의 근원임에도..

 


달마는 말하고 있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내면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 때에만
지금까지 미혹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다.

 

진짜 장미꽃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항상 헝겊으로 만들어진 조화 속에 둘러싸여 일생을 보낸다.

그 조화는 죽은 것이다. 거기서 어떤 향기도 맡을 수 없다.

 

그것들은 자라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진짜 꽃만이 시들 수 있다.

 

그것은 아침에 존재계로 나와서 비와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태양과 함께 즐거워하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가 버린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서 나와서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인간의 삶도 이와 꼭 같다.
우리는 미지에서 나와서 미지로 간다. 우리는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천 번 왔다. 앞으로도 수천 번 여기로 올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본질은 불멸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죽는다.
우리의 겉모양, 즉 우리의 집, 우리의 육체, 우리의 마음은 모두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오래되면 낡아서 결국에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은 영원하다.
달마는 이 말을 '무심'이라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도 역시 같은 말을 썼다.
그것은 마음을 초월한 불생불멸이다.

 

미지에서 앎으로 그리고 앎에서 미지 속으로 옮겨다니는 이 윤회는 영원히 계속된다.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말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은 마지막 삶이 될 것이다.
그때 그 꽃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안 꽃은 삶으로 다시 나올 필요가 없다.
삶이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과 과정을 다 마치고 이제 모든 미혹을 초월할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앎의 세계에서 불생불멸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대는 우주와 하나가 될 것이다. 거기에는 되돌아가는 일이 다시없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무심을 안다.
이 무심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무심은 해탈로 불린다.

 

바다를 향해 강이 흘러가는 것이 여여이며 진여이다.

불의 본성이 뜨거운 것처럼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진여 속에서 흔들림이 없다.

 

어떤 사람이 와서 석가모니 부처에게 욕을 하고 꾸짖었다.

그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 제자들이 그에게 와서 물었다.
"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셨습니까?"

 

부처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진여이다. 그것은 그의 행동의 방식이다.

 

내가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은 나의 진여이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고상한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의 진여가 나타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여여란 말은 그 뜻이 매우 심오하다.
여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를 흔들 수 없다. 그의 내면은 깊은 바다 속처럼 항상 잔잔하다.
여래란 순간 순간을 여여 속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그 말은 다른 어떤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번은 내가 숲을 지나가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내 위로 떨어졌다.

 

그 나뭇가지가 나를 다치게 했으므로 내가 그 나뭇가지를 때려 주어야 하겠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나뭇가지는 나를 헤치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사고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욕한다면 그것도 나뭇가지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나는 단지 거기에 있었고 그는 화가 났을 뿐이다.
만약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본성이다.

그는 그의 본성을 따른 것이고 나는 내 본성을 따른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성과 조화를 이룰 때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평정을 누리게 된다.

 

부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든 부처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석가모니 부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마하비라 역시 석가모니 부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마하비라 역시 석가모니 부처와 다른 개성을 갖고 잇다.
크리슈나도 마찬가지이고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인 달마 역시

자신의 개성을 따라서 행동한다.

 

이런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다.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행동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불교도들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시대가 변해도 모든 부처는 똑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계에서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고유함을 갖고 있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신만의 개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히말라야의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것은 다른 봉우리들과 그 모습이 다르다.

그는 자신으로서 완전한 것이다.

마치 촛불을 보면서 그 초의 모양에 집착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다.

 

초는 여러 가지 모양을 갖고 있다.

그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그러나 모든 초에서 나오는 불꽃은 같은 것이다.

 

촛불을 보는 자는 더 이상 초에 집착하지 않는다.
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촛불에서 나오는 빛이 중요한 것이다.

 

무심은 모든 깨달은 자에게서 나오는 촛불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여본성에 따라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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