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사람들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드는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누가 항상 그들 앞에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 물어 보겠는가?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마음을 안다.
이 마음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그것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신성한 자아이며, 불멸이며, 위대한 성자다.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지지만 그 본질은 변치 않는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의 마음이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예배하게 하지 말라.
부처나 보살이 그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숭배할 필요가 없다.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마귀이며,
그것들은 수행의 길에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에 예배하지 않는 자는 진실로 아는 자이다.
그대의 생각에 이끌려서 그것을 예배하는 것은
마귀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평상심에서 벗어나서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마음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러므로 마음속에 비쳐지는 귀신이나 마귀나 거룩한 성자의 형상이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숭배 하지도 말라.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미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 순간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라.
그것은 지금 그대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동일시가
완전히 흔들릴 것이다.
누구에게든지 물어 보라. 그가 누구인지 말이다.
그대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 생각에 수천 가지의 동일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그대 모습이 아니다.
그대가 날 때부터 남편으로 태어났는가?
날 때부터 의사나 기술자였는가?
그것들은 그대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그런 공허감이 그대 속에 있다면,
그대는 미쳐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만들어 갖다 붙인다. 그대가 미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지지만 자신(여래)의 본질은 변치 않는다.부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진여본성(무심)을 떠나지 않는것과 같다.
사람은 완전히 벌거벗은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그대 자신을 덮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옷을 벗어버린 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바로 그것이 삶이 불행하고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이유이다.
달마가 사람들이 어둠 속에 빠져서 점점 더 깊은 미혹 속에서
방황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시각에서 한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없기에 갈수록 거짓된 동일시의 층을
두텁게 만든다.
그들의 사랑도 거짓이며, 그들의 인간관계도 거짓이다.
그들의 삶 전체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이 자기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한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안다.
거기에는 선택의 문제가 없다.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
그대의 본성에서는 오직 옳고 바른 것만이 나온다.
장미 넝쿨에서는 장미꽃만이 피어난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과거에 나는 라이푸르(Raipur)에서 몇 달씩 머무르곤 했다.
그는 창가에 아름다운 꽃들을 갖다 놓고서는 매일 화분에 물을 주었다.
나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꽃은 진짜가 아니었다.
진짜처럼 만들어진 조화였던 것이다.
그가 매일 거기에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그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 꽃들은 물을 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대가 만들어낸 동일시는 바로 이 조화와 같다.
그것은 그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부처란 말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깨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 차이가 있다면 그대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대는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거기에 부처가 있는지를 모른다. 깨달음은 바로 그대 삶의 근원임에도..
달마는 말하고 있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짜 장미꽃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항상 헝겊으로 만들어진 조화 속에 둘러싸여 일생을 보낸다.
그 조화는 죽은 것이다. 거기서 어떤 향기도 맡을 수 없다.
진짜 꽃만이 시들 수 있다.
그것은 아침에 존재계로 나와서 비와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태양과 함께 즐거워하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가 버린다.
우리는 미지에서 나와서 미지로 간다. 우리는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천 번 왔다. 앞으로도 수천 번 여기로 올 것이다.
그것들은 오래되면 낡아서 결국에는 사라진다.
미지에서 앎으로 그리고 앎에서 미지 속으로 옮겨다니는 이 윤회는 영원히 계속된다.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말이다.
자신의 존재를 안 꽃은 삶으로 다시 나올 필요가 없다.
그대는 우주와 하나가 될 것이다. 거기에는 되돌아가는 일이 다시없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무심을 안다.
바다를 향해 강이 흘러가는 것이 여여이며 진여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석가모니 부처에게 욕을 하고 꾸짖었다.
그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셨습니까?"
부처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진여이다. 그것은 그의 행동의 방식이다.
내가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은 나의 진여이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그를 흔들 수 없다. 그의 내면은 깊은 바다 속처럼 항상 잔잔하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번은 내가 숲을 지나가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내 위로 떨어졌다.
그 나뭇가지가 나를 다치게 했으므로 내가 그 나뭇가지를 때려 주어야 하겠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나뭇가지는 나를 헤치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사고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욕한다면 그것도 나뭇가지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의 본성이다.
그는 그의 본성을 따른 것이고 나는 내 본성을 따른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성과 조화를 이룰 때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평정을 누리게 된다.
부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석가모니 부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마하비라 역시 석가모니 부처와 다른 개성을 갖고 잇다.
자신의 개성을 따라서 행동한다.
이런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다.
불교도들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존재계에서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다른 봉우리들과 그 모습이 다르다.
그는 자신으로서 완전한 것이다.
그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그러나 모든 초에서 나오는 불꽃은 같은 것이다.
무심은 모든 깨달은 자에게서 나오는 촛불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여본성에 따라산다.
'공부 방 > 불교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서 중에서 - 달라이라마 (0) | 2009.06.25 |
---|---|
금강경이란? (0) | 2009.05.31 |
부처님을 낳은 마야부인 (0) | 2009.05.14 |
재산이 없어도 줄 수 있는 7가지 (0) | 2009.04.16 |
달마의 가르침 - 열매 9가지 (0) | 2009.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