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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빈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들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10. 3. 26. 08:54

      

 

역대 빈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들

 

 

 

1) 클레멘스 크라우스, Clemens Krauss (1893년 3월 31일~1954년 5월)

1941년 지휘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1893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 살바토르 대공, 어머니는 여배우 클레멘틴 크라우스이고 조부는 외교관이기도 하다. 이러한 화려한 가정 환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상류층의 부유함 속에서 부족할 것 없이 성장해 나갔다. 10살이 되던 무렵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빈 소년합창단에 입단해 음악 전반에 대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리곤 빈 음악원에 입학해 그레데너와 라인호르트, 그리고 호이베르거 등으로부터 지휘법 및 음악 전반을 배우기도 했다.


1912년에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브륀 국립 오페라 극장의 합창 지휘자로 지휘 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곤 이듬해인 1913년부터 1914년까지 리가의 독일 극장의 지휘자로 일하며 착실하게 이름을 다져갔다. 계속해서 그는 뉘른베르크, 슈테텐, 그라츠 등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일하며 꾸준히 인기를 얻었고, 1922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어 명실공히 지휘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걷기에 이른다. 그는 이 명 악단의 지휘봉을 잡음과 동시에 빈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24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임명되었고, 5년후에는 다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으로 돌아가 1934년까지 맹활약을 보여주었다. 이 와중에 그는 뉴욕 필하모닉과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같은 명 악단을 지휘하며 지휘자로서의 폭넓은 가능성을 검증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34년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이 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고, 1937년에는 뮌헨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역시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1939년 유서깊은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의 원장으로서 부임해 여러 가지 플랜을 통해 빛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1945년 이후부터 세 번째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 복귀하여 음악감독과 빈 필하모니의 지휘자를 겸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2) 빌리 보스코프스키, Wili Boskovsky (1909년 6월 16일~ 1991년 4월 20일)

1955년~ 79년 지휘

 

오스트리아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1909년 6월 16일,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럽 톱 클래스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그리고 오랜 동안 명문 빈 필하모니의 콘서트마스터로 있는 한편 지휘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빈 본토박이였다.그리고 그가 빈 필하모니를 지휘했던 <뉴 이어 콘서트(신년 음악회)>는 너무나도 유명했다.

보스코프스키는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빈 국립음악원에서 모라베츠에게 바이올린을 사사했다.

 

당시 음악원장이었던 프란츠 슈미트의 작품 연주에서 그의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크라이슬러 상을 받기도 하였다.1932년 빈 국립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에 입단하였으며 다음해 빈 필하모니로 옮겼다.그와 동시에 독주자로서 당시 빈 필하모니를 지휘했던 푸르트뱅글러,브루노 발터 등과 협연했다.1935년에 모교의 바이올린과(科)의 교직을 맡았다.

 

1939년 브루노 발터의 추천으로 빈 필하모니의 콘서트 마스터로 취임하여,1970년까지 그 자리에서 활동했다.

1947년에는 빈 8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영역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필하모니의 동료들과 보스코프스키 4중주단을 조직하였는데,1948년 이를 확대하여 빈 8중주단을 결성한 것이다. 그밖에 빈 필하모니의 멤버에 의한 3중주단,현악 4중주단을 통솔한 업적은 매우 크다.

 

빈 필하모니 4중주단은 바릴리 현악 4중주단의 후신인데,바릴리가 병고로 활동을 못하게 되자 보스코프스키가 제 1바이올린을 맡으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1961년 제1바이올린 자리를 안톤 피츠에게 이임하였다.1955년부터는 클레멘스 크라우스의 후임으로서 빈 필하모니의 명물인 <뉴 이어 콘서트>의 지휘자가 되었고,1979년까지 지휘대에서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지휘한 요한 슈트라우스 식의 지휘를 하여 인기를 차지했다. 1969년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2세의 뒤를 이어,빈 요한 슈트라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3) 로린 마젤, Lorin Varencove Maazel (1930년~ 현존)

 1980년~86년,94년,96년,99년, 2005년 지휘

 

로린 마젤은 1930년 3월 6일 프랑스의 파리 근교의 뉘이에서 유대계 러시아인인 아버지와 헝가리와 러시아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린 마젤이 아주 어릴때 부모가 미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그역시 피츠버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로린 마젤은 어릴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이미 4살 때 놀라운 절대음감을 소유했고, 암보력도 뛰어났다. 그와 동시에 바이올린과 피아노 등을 배웠는데, 놀라운 속도로 그 악기들을 익혀갔다. 하지만 어린 로린 마젤을 더욱 흥분시킨 것은 지휘자의 세계였다.


불과 8살때부터 그는 아이다호 대학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당시 그가 지휘한 것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이 공연에 이어 그는 1년후 뉴욕 세계 박람회에 출연하여 역시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지휘계의 신동의 출현’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한편 음악 뿐만 아니라 일반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지녔던 그는 피츠버그 대학에 들어가 어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는 한편 블라디미르 바칼레이니코프로부터 바이올린과 지휘법 등을 배우며 음악과 철학 모두에 있어 그 깊이를 더하기에 이른다. 몇 년후 그는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지휘대에 섰고, 1953년에는 이태리의 로마에서도 지휘를 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1960년에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음악제에서 ‘로엔그린’을 지휘해 평론가들 및 바그네리안들로부터 호평을 얻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등장해 ‘니벨룽겐의 반지’ 등과 같은 전4부작을 무리없이 지휘했다.


1965년에 로린 마젤은 드디어 지휘자로서 한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음악 총감독에 취임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도 겸임해 명실공히 유럽 및 독일에서 알아주는 지휘자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1970년부턴 런던의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보조 지휘자로 등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이 악단은 거장 오토 클렘페러가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년후에는 미국으로 가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더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립관현악단의 상임 객원 지휘자(1976년) 및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1982년) 등으로 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1908년 4월 5일~1989년 7월 16일)

1987년 지휘

 

어릴때부터 피아노에 소질을 보인 그는 1914년에 처음으로 공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다가 당대의 지휘자인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권유에 따라 지휘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보다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1927년 비인 음악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2년후엔 울름 시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가 지휘자로 데뷔할 때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피델리오’였다.

 

그가 서서히 지휘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35년경이었다. 당사 그는 아헨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7세의 일이며 독일 음악계 사상 유례가 없는 젊은 나이였다. 그리곤 29세가 되는 1937년에 비인 국립 오페라 극장을 지휘해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니를 처음 연주한 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9년에는 독일 그라모폰과 최초로 계약을 맺고 음반 활동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1941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국가 지휘자 ‘슈타츠카펠마이스터’의 칭호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1946년에는 빈 악우협회(樂友協會)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취임했으며, 1950년에는 EMI가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를 목적으로 조직한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카라얀은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해 ‘니벨룽겐의 가락지’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등을 지휘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미 이때부터 카라얀은 독일 및 유럽을 대표하는 지휘자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던 것이다. 1956년에 베를린 필하모니의 종신 예술감독이 된 것만 봐도 당시의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예술감독 및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예술감독 등 굵직한 타이틀들을 모두 독식하다시피하며 새로운 시대를 리드할 대 지휘자의 출현을 알렸다.


1960년대 후반에는 베를린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재단’을 발족시켰고, 이듬해에는 파리 관현악단의 예술감독에 취임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1984년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한 바 있다.

 

 

5)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1933년 8월 26일 ~현존)

88년,91년지휘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이태리의 지휘자이고 이태리 오페라의 명소인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이었음에도, 푸치니에 의해 대표되는 베르디 이후의, 일반적으로 베리스모 오페라라고 불리는 오페라를 조심성 있게 피해 왔다. 반면 프로코피에프나 스트라빈스키 등의 작품은 매우 적극적으로 지휘해 왔다. 그의 지휘는 이태리 출신의 지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열정적이거나 카리스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이지적이며 노래하듯 아름답고 명확한 것을 선호한다. 특정 작품의 양식적인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것은 그의 장기랄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뛰어난 광채를 발하고 있는 명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1933년 6월 26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는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에서 지휘와 피아노, 작곡 등을 공부하고 이어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서 지휘법을 익혔다. 그의 재기는 꽤 일찍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58년의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쿠세비츠키 상(賞)을 받은 것이 그 대표적이다. 이 상으로 그는 촉망받는 젊은 지휘자 중의 하나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60년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지휘함으로써 지휘자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장식했다. 몇 년후인 1963년에는 런던에서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자 콩쿨에서 우승해 그의 실력을 다시한번 보여주었다

 

1989년 아바도는 대 지휘자 카라얀의 사망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제5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베를린 필이라는 막강한 악단의 광채를 컨트롤하지 못해 애를 먹어 보이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특유의 스타일로 이 대 악단의 또다른 면을 부각시키는 명연을 펼쳐보였다. 그중에서도 베토벤의 교행곡 전집 녹음은 베를린필하모닉과 이룬 거대한 업적이랄 수 있다. 

 

 

 

6) 카를로스 클라이버, Carlos Kleiber(1930 -2004)

89년, 92년지휘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이름은 카를이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었던 그의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1935년 나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사임하고 가족들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적 취득과 함께 카를로스로 개명했다. 20세 되던 해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한 그는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취리히의 공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2년 후 견습지휘자가 되어 음악으로 돌아왔고 다시 2년 후 지휘자로 데뷔, 아버지 에리히가 사망한 56년 라인 도이치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일취월장했다. 1964년 취리히 오페라극장, 66년 뷔르템베르크 오페라극장, 68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등, 차차 유럽음악 중심부를 향해 수렴해 들어갔다. 70년대 들어서 그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바이로이트 음악제, 코벤트가든 오페라극장 등에서 지휘대에 설 때마다 찬사를 한몸에 받으며 완전히 아버지의 이름이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었다.

80년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고 82년에 빈 국립오페라 극장과 한시적인 계약을 맺기도 한 그는 89년과 92년에 빈 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해 앞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냐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었다. 그리고 89년 카라얀 타계 당시 베를린 필 입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정작 클라이버 자신은 전혀 대중적인 인기나 레코딩엔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점이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라고 했을 만큼 레코딩을 싫어하는 클라이버. 하지만 그의 음반은 성공작이 대부분이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베토벤 교향곡 4번 (오르페오), 빈 필과 함께한 5번(DG), 7번(DG), 브람스 교향곡 4번(DG) 등이 그가 지금까지 남긴 교향곡 음반 중 높은 평가를 받는 것들이다.
오페라로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한 베버의 ‘자유의 사수’ (DG)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서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DG),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등이 있다.

 

 

7) 주빈 메타,Zubin Mehta (1936년 4월 29일 인도~현존)

90년, 95년, 98년, 2007년 지휘

 

주빈 메타는 1936년 4월 29일 인도의 봄베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메리 메타는 봄베이 교향악단의 지휘자였는데, 이 때문에 아들인 주빈 메타가 지휘자로 성장하는데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7살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이후 1954년 빈 국립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해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체계적인 지휘법 전반을 익혔다. 그러던 중 영국의 리버풀에서 개최된 국제 지휘자 콩쿨에 출전해 우승하면서 일약 젊은 나이에 주목받는 지휘자가 되었다.


1960년 캐나다의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이력은 젊은 나이부터 화려하게 펼쳐졌다. 27세의 나이에는 LA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이 악단과 함께 박력있는 추진력과 낭만적인 감성 모두가 조화를 이루는 연주를 들려주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외에도 그는 잘츠부르크 음악제(1962년), 이스라엘 필하모니의 음악고문(1968년) 등 여러 자리를 두루 거치며 경력을 쌓아갔다. 이후 15년동안 재임했던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떠나고 1978년 8월에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또다른 연주를 펼치기도 했다. 이후 빈필하모닉을 이끌며 역시 특유의 감성으로 좋은 연주를 들려준 바 있다

 

 

 

 

8)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1941년~현존)93년, 97년, 2000년, 2004년 지휘

 

리카르도 무티는 1941년 7월 28일,이탈리아 나폴리(Naples, Italy)에서 의사이며 대단한 음악애호가였던 아버지와 아마추어 가수였던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태어났다.

나폴리의 산 피에트로 마젤라 음악원(Conservatory of San Pietro a Majella)에서 나폴리 피아노 악파의 마지막 거장인 빈센쪼 비탈레(Vincenzo Vitale)의 문하에서 피아노를 공부하였으며,우수한 성적으로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이어 밀라노의 '쥬세페 베르디' 음악원(Conservatory “Giuseppe Verdi”)에서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의 작곡가 브루노 베티넬리(Bruno Bettinelli, 1913-2004)에게 작곡을,안토니노 보토(Antonino Votto, 1986-1985)로부터 지휘법을 배웠고,1964년 작곡과 지휘에서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지휘자중 한 사람으로서 '이탈리아의 자존심'으로 불리워지고 있다.1996년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 내한하여 열렬한 호응을 받으며 매진 사례를 기록했고,무려 3번의 앙코르를 받으며 한국의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이후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 리카르도 무티의 조합은 대한민국의 클래식 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공연으로 손꼽혀왔다.


번스타인,카라얀이 사라진 이후,21세기를 이끌고 있는 거장 리카르도 무티는 2002년 뉴욕필이 제의한 상임지휘자의 자리를 자신을 키워주었고,또한 무티 자신이 많은 애착을 갖고 있는 라 스칼라 필하모닉을 떠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지휘자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빈필 신년음악회의 지휘봉을 지난 1993년과 1997년,2000년,그리고 2004년까지 무려 네 번이나 잡으며 '빈 필의 소리는 누가 지휘하든 똑같다'는 명제를 무색케 하며 명실상부한 최고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또한 리카르도 무티는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을 객원지휘하였지만 그는 무엇을 어디에서 공연해야 할지,자기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정리해 갖고 있었다. 즉,베를린 필과는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이르는 독일 작곡가의 연주곡목을 지휘하였고,비인 필과는 모짜르트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그가 모든 오케스트라 중에서 가장 다기다예한 오케스트라라고 믿고 있는 런던 필하모니와는 자기의 모든 오페라 공연을 레코드로 출반하기도 하였다. 그는 언젠가는 베르디 오페라의 모든 작품을 레코드로 녹음하기를 원하고 있으며,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대에 자기자신의 사운드를 오케스트라에 각인 시켜 놓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9) 오자와 세이지, Ozawa Seiji (1935년 9월 1일 ~현존)

2002년 지휘

 

일본 태생의 지휘자.

세이지 오자와는 1935년 9월 1일,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의 선양(瀋陽, Shenyang)에서 태어났다.부친은 치과의사였으며,세이지 오자와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자인 어머니를 통해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고,7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944년 오자와의 가족은 도쿄(東京)로 이주하였고,그는 피아니스트 노보루 토요마츠(Noboru Toyomasu)로부터 피아노를 사사했으며 바흐의 작품들을 심도있게 공부하였다.

 

1950년 세이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럭비경기중 손가락을 다쳐서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

1951년 일본의 명문 도호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였고,당시 그의 선생님이었던 히데오 사이토(Hideo Saito)의 권유로 피아노 연주에서 지휘로 음악적인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1973년 세이지 오자와는 보스턴 교향악단의 음악감독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2002년 사임하기까지 29년 동안 동 악단을 이끌었다. 그가 보스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재직한 29년이라는 긴 세월은 쿠세비츠키가 1924-1949년까지 25년을 재임한 기록을 깨뜨린 것으로서 세이지 오자와는 2002년 사임한 뒤,보스턴 교향악단으로부터 계관지휘자의 칭호를 수여 받았다.


그는 1976년 보스턴 교향악단과 함께한 PBS 티비의 시리즈 “Evening at Symphony”로 첫번째 에미상을 수상하였다.1994년에는 보스턴 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취임 20주년을 기념하여 탱글우드 콘서트 홀에 그의 이름을 딴 "Seiji Ozawa Hall"이 문을 열었는데,1,180석 규모로 음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같은해 그는 “Dvorak in Prague: A Celebration” 이란 프로그램으로 두번째 에미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 세이지 오자와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고,이외에도 베를린 필하모닉,비엔나 필하모닉을 정기적으로 지휘하였다.이외에도 뉴 재팬 필하모닉,런던 교향악단,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밀라노의 라 스칼라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도 지휘하였다.

 

 

 

 

10)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Nikolaus Harnoncourt (1929년 12월 6일

2001년, 2003년지휘

 

독일 태생의 비올연주자.첼리스트이자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1929년12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쪽은 포르투갈계 룩셈부르크의 로트링백작 가문의 후손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작이었고,어머니 쪽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실 가문이었다. 어머니의 고조 할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대공작 요한이었고,그녀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이다.

 

 1980년 잘츠부르크 모짜르트 주간을 통해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Concertgebouw Orkest Amsterdam)"와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지휘자로써 첫무대를 가졌다.1985년 그라츠에 '스튀리아르테 페스티발'(Festival styriarte)이 만들어졌는데,이것은 그라츠 출신인 아르농쿠르를 그라츠시로 데려오기위한 일환이었다. 현재까지 이 페스티발은 그가 추구하는 작업의 기본토대로서 계속 개최되고 있다. 개최년에 아르농쿠르는 콘센투스 무지쿠스와 함께 두개의 바흐 수난곡을 연주하였다.


또한 페스티발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던 공연들에는 슈베르트의 정신 드라마 <라짜루스(Lazarus)>,슈만의 오라토리오 <낙원과 요정 페리(Das Paradies und die Peri)>, 베르디 <레퀴엠(Requiem)>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87년 아르농쿠르는 "빈 콘센투스 무지쿠스"에서 첼로를 마지막으로 연주하였다

 

니코라우스 아르농쿠르(Nikolaus Harnoncourt)는 서양음악 연주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음악가이다.
그는 ‘당대연주’(원전연주,고음악 연주) 라는 역사주의 연주양식을 개척한 이 시대의 진정한 거장이다.
아르농쿠르는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현대에 되살려냈고,바흐 르네상스를 주도했으며 그리고 모짜르트 해석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현재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살아있는 모짜르트로 칭송받고 있다.

 

 

 

11) 마리스 얀손스, Mariss Jansons (1943년~ 현존)

2006년지휘

 

라트비아 태생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는 1943년 1월 14일,라트비아의 리가(Rig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리가음악원을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에서 예프게니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를 보좌하면서 지휘자를 지낸 아르비드 얀손스(Arvid Jansons, 1914 -    )이다.

유태계였던 어머니 이라이다(Iraida Jansons)는 성악가로 활동하였는데,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리가 게토(ghetto, 유태인 집단거주지역)에서 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라트비아 리가로 숨어 들어 마리스 얀손스를 길렀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아버지 아르비드 얀손스는 1946년에 전(全) 소련 청년 지휘자 콩쿠르에서 2등을 차지하였고,1952년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56년 마리스 얀손스는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 공부를 계속하라는 부친의 기대와는 달리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했다.1969년 빈 음악원에서 아바도,주빈 메타 등이 사사한 명 교수 한스 슈바로프스키(Hans Swarowsky) 밑에서 지휘를 사사하였고, 이어 잘츠부르크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에게도 지휘법을 배웠다.

 

1979년부터 오슬로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해 온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는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그는 레코딩,콘서트,투어,수 많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출연으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그는 무명의 오슬로 필하모닉을 이끌고 차이코프스키 등을 녹음하면서 새로운 러시아 지휘자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로린 마젤의 후임으로 피츠버그 심포니를 맡은데 이어 곧 리카르도 샤이를 이어 로열 콘서트헤보우의 포디엄에 올랐다. 또한 현재 로열 콘서트헤보우의 상임지휘자는 물론 바이에른 교향악단의 수석자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 녹음은 정열과 중용,화려함과 차분함 등 모든 것을 갖춘 빼어난 레코딩으로 평가받고 있다

 

 

 

12) 조르주 프레트르, Georges Pretre (1924년 월 24일~)

2008년 2010년 지휘

 

조르쥬 프레트르는 1924년 8월 24일 프랑스 와제(Waziers)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음악에 뜻을 둔 그는 8세 때 출생지의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트럼펫을 배웠고,11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트럼펫과 작곡을 배웠다.

그후 작곡가가 되려고도 하였으나,1942년 어느 날 랄로의 오페라 <이스의 왕>을 상연하는 것을 보고

분연히 지휘자가될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앙드레 클뤼탕스에게 지휘를 사사하면서 착실히 그 기초를 닦았다.조르쥬 프레트르의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출발은 1946년 마르세유 오페라 극장에서 랄로의 <이스의 왕>을 지휘하면서부터다. 그것에 이어지는 10년간은 주로 프랑스의 지방 오페라극장에서 지휘자로 지내면서 레퍼토리의 수련을 쌓아 갔다.그중에서도 툴루즈와 리옹에서의 지휘는 호평을 밭았다.

 

1955년 파리 오페라 코믹 극장에 등장한 뒤부터는 급속하게 그 지반을 굳혔으며,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를 지휘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것은 이 작품의 파리 초연에 해당하기도 했다. 그 후 1959년까지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과 계약하였고,1960년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도 객원지휘하면서  풀랑크의 작품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파리 오페라 극장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시카고의 오페라 극장을 시작으로 구미 각지에 오페라 지휘자로서 객원 연주하였고,동시에 콘서트 지휘도 활발히 하게 되었다. 1961년 토마스 비쳠 경의 초청으로 로열 필에서 첫 객원 지휘를 하였으며,이듬해 1962년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추천으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 초청되었다.1965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다. 현재도 세계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많은 지휘를 하고 있다.특별히 2008년 비엔나 신년음악회에서 프랑스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였다

 

 

 

 

13)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년 11월 15일~)

2009년 지휘

 

유대인이었던 바렌보임 일가는 1952년에 이스라엘에 이주하였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음악공부를 위해 10세 때 이스라엘 재단의 장학금으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 입학해 서구 문명 전반과 패턴을 익히며 대 피아니스트에로의 꿈을 하나한 실현시켜갔다. 그는 여기서 저 유명한 명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는 한편, 당대의 지휘자인 이고르 마르케비치로부턴 지휘법을 배웠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왕성했던 나머지 바렌보임은 실내악에까지 손을 대 첼리스트인 엔리코 마이나르디로부터 체임버 뮤직 관련 공부를 하며 전방위적인 연주자이자 아티스트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갔다. 이즈음 그는 거장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에게 인정 받아 솔리스트로서 기용되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4년 파리로 유학해 교수법의 일인자로 정평 높은 나디아 불랑제 휘하에 가 더욱 깊은 음악수업을 받았다. 1년후에는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해 카를로 체키의 밑에서 피아노와 지휘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1957년 1월 드디어 그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심포니 오브 디 에어’와의 협연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정식으로 미국 데뷔를 했다. 이날의 연주는 공연장을 찾은 음악 관계자 및 많은 사람들에게 차세대를 이끌 천재 피아니스트의 출현을 알리는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바렌보임은 막힘이 없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임에도 지휘자에 대한 욕구도 대단해 피아노와는 별개로 지휘봉을 잡는 쪽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처음으로 지휘를 시작한 것은 1962년경부터이다. 그리곤 1965년 오랫동안 친분을 다져온 영국 실내관현악단을 대동하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지휘하며 지휘자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약 10년 동안 객원 형태로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지휘자로서 고전파의 교향곡과 근대, 현대의 작품 등 가리지 않고 폭넓은 레파토리를 소화해 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로부터도 종종 객원 지휘를 위촉받기 시작했다. 1967년과 1968년의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런던 교향악단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71년 1월에는 뉴욕 필하모닉까지 지휘하며 피아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확고하게 그 위상을 굳히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그는 시카고 교향악단, LA 필하모니, 런던 필하모닉 등 여러 악단을 객원 지휘하며 지휘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바렌보임은 1967년 명 첼리스트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을 해 또한번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14) 프란츠 벨저-뫼스트,Franz Welser -Most

2011년 지휘 예정

 

1960년 도나우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 오스트리아 린츠 생인 프란츠 벨저 뫼스트는 이제 갓 불혹을 넘겼다. 20세에 카라얀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그는 18세에 당한 사고로 악기 연주를 포기해야 하는 고비를 겪기도 했다.

1985년 잘츠부르그 페스티벌에서 데뷔해 이듬해 스웨덴의 노르쾨핑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맡았다. 같은 해 스페인 지휘자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의 대타로 LPO와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면서 그의 동화 같은 커리어는 시작됐다. 그로부터 4년 뒤 벨저 뫼스트는 30세의 나이로 LPO의 상임 지휘자가 됐다. 1995년부터는 도흐나니 후임으로 취리히 오페라 수석 지휘자로 했으며 현재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다.

클리블랜드와의 올 가을 새로운 계획을 들어보면 벨저 뫼스트의 두 대륙에 걸칠 음악적 발판은 완벽해 보인다. 런던과 비교해 클리블랜드는 작업 조건도 월등히 좋다고 한다. 아마도 1990~96년 LPO 상임 지휘자로 겪었던 힘든 런던 시절 때문에 새 일터는 더 큰 장점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계획하는 프로그램은 현대음악과 빈 고전음악이 주 기둥이다. 현대음악에 강한 전통을 가진 이 오케스트라가 빈 고전음악의 순수 혈통인 이 지휘자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싶다.
어느 오케스트라든 빈 고전음악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매일 이빨을 닦듯이 빈 고전음악은 교육적 측면에서 오케스트라의 깨끗한 음향을 보장하는 열쇠입니다.라고 프란츠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