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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이민 정착 성공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09. 2. 12. 12:24

 

                                        (저자가 직접 찍은 무지개가 뜬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캐나다 이민 정착 성공기

 

 

911사태가 벌어졌던 그 해, 유난히도 시리던 추운 그 겨울. 현지 생활에 대해 알려줄 친인척이 한 명도 없던 캐나다. 그 안에서 나의 미래도 짐작하기 어려워 지만 독한 마음을 먹고 나는 잘 다니던 직장도 접고, 가족, 친구들과 무거운 이별을 한 뒤 훌쩍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같이 미래를 약속한 사랑을 택하고 유럽인 남편과 같이 제3국에서 함께 새로운 삶을 터전을 꾸미고자 한 결심이었다.

인터넷으로 구한 방 주소 하나와 공항에 픽업 올 한인 한 명의 전화번호를 들고, 토론토 피어슨 공항 바로 거기에서 내 이민생활은 시작되었다.

12월 초, 유난히 길고 춥던 2001년 그해 겨울바람은 한국에서 입던 얇은 외투의 옷깃을 날쌔게 뚫었다.

저축해 가져온 돈은 달랑 300만 원 정도. 버스비를 아끼겠다고 한인 슈퍼에 갔다가 장바구니를 손에 들고 1시간가량 서글프지만, 마음은 그래도 씩씩하게 걸어서 집에 온 날도 많았다.

가져온 돈은 물론 금세 바닥이 났고 일단 관광객 신분으로 입국했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최고 특급 호텔에서 최상의 VIP들만 상대하던 호텔리어였던 나였지만 자존심을 일단 접고 시급 5불 50센트짜리 한인 식당에서 웨이트리스일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을 생각했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영주권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긴 세월. 힘든 웨이트리스 일이라 육체적 노동에 가끔 낯설고 억울한 대접에 속상해 울며 집에 온 날도 여럿 있었다.

 어느 날은 눈이 너무 퉁퉁 붓도록 울어서 도저히 일을 못하겠다고 주인에게 전화를 해야 한 날도 많이 있었다.

그래도 이건 그저 이민 정착에 일부분 과정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다독이며 달랬고, 기다림 끝에 드디어 영주권을 손에 쥐었다.

SIN카드가 집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한국에서 일하던 체인의 호텔에 당장 이력서를 냈고, 운 좋게 인터뷰를 통과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캐나다 직장에 어찌 쉽고 빨리 일을 시작하게 됐지만 역시 한국에서와 같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는 없었다.

내가 얻은 자리는 낮은 평직원 정식 사원도 아닌 파트타이머. 언제든 일이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남들처럼 낮에 근무할 수도 없는 야근 직. 그래도 즐겁게, 행운이라 스스로 생각하며 다시 유니폼을 입고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같이 입사한 나이 어린 캐내디언 동료는 경력도 없었지만 정식직원으로 풀타임 일을 했고, 내가 출근할 무렵 퇴근을 했다.

그 중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동료가 있다.

같이 시작했지만 내가 가진 경력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니면 아무래도 자신보다 영어가 짧은 내 모습이 그저 우스워 보였는지, 틈만 나면 상사와 나를 이간질 하고 인사를 건네도 아주 못 본 척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던 그.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을 했다.

동요하지 말자. 성숙하게 참아야 한다. 참는 게 이기는 것이다. 진실은 언젠가는 알려진다.
사실이었다. 일 년 반 뒤, 같은 호텔 내에 사람들이 선망하던 Sales & Events 부서에서 한 자리가 났고, 그 남자 도도한 백인 동료를 경쟁에서 밀치고 나는 당당하게 Event Coordinator라는 직함을 따냈다.

 설레임과 함께 마냥 신나게 일하던 1년 뒤, 그다음 한 해는 같이 일하던 상사 Event Manager들의 일을 도와가며 적극 연회기획 업무를 배워나갔다.

 보조자의 역할이었지만 내 일처럼 남달리 열심히 일했고, Event Manager들이 휴가를 가며 일을 맡길 때마다 기회라 생각하고 무조건 일을 흔쾌히 떠맡아 처리했다.

 그들의 고객들은 내 고객들이 되었고, 고객만족 설문조사지에 내 이름과 나의 도움으로 연회가 성공리에 마쳤다며 고마워하는 사연들이 종종 올랐다.

그러던 중 Edmonton에 같은 호텔의 체인이 새로 하나 생겼고, 거기에 이사직으로 승진해 가던 매니저 한 명이 내게 제안을 했다.

 Event Manager로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그렇게 처음 호텔 내에서 사람들이 얼굴도 잘 모르던 야근직 파트타이머로 일하던 나는 입사한 지 만 3년 반 만에 연회기획을 하는 Manager가 되었다.

처음 한국을 떠나 왔을 때의 안개 낀 미래에 대한 느낌을 아직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언제까지가 흐린 날이고 언제부터 밝은 햇살이 비칠지 아무도 기상예보를 해줄 수 없던 그때. 그리고 가끔 다시 한국에 갈까 생각마저 들던 시련의 여러 날. 그러나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 힘든 경험일수록 내가 앞으로 살 많은 날에 더욱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백인 사회에서 백인을 누르고 개인 장사, 개인경영도 아닌 오직 치열한 백인 조직사회에서 한국인으로 세계적인 최고 큰 특급호텔에서 VIP Manager 된 것은 개인적으로 긍정 심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혹시, 이 글을 접하는 이민 정착에 희망을 품은 이에게 나의 이야기가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정말 기쁘게 생각하고 이 글을 보낸다.

                                                                    


(나의 지인 이야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