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 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좋은 시 >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향기 - 윤보영 (0) | 2010.07.23 |
---|---|
만남과 이별 -조병화 (0) | 2010.02.23 |
인생이 무대에 올려진 연극이라면 (0) | 2009.12.16 |
세상에서 가장 기쁜 시 (0) | 2009.12.03 |
늦가을의 산책- 헤르만 헷세 (0) | 2009.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