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산책
헤르만 헷세
가을비가 회색 숲에 흩뿌리고,
아침바람에 골짜기는 추워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툭툭 떨어져
입을 벌리고 촉촉히 젖어
갈색을 띄고 웃는다.
내 인생에도 가을이 찾아와
바람은 찢어져 나간 나뭇잎을 딩굴게 하고
가지마다 흔들어 댄다
열매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사랑을 꽃 피웠으나 그 열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 피웠으나 그 열매는 미움이었다.
바람은 나의 앙상한 가지를 쥐어 뜯는다.
나는 바람을 비웃고
폭풍을 견디어 본다.
나에게 있어서 열매란 무엇인가?
목표란 무엇이란 말인가!
피어나려 했었고, 그것이 나의 목표다.
그런데 나는 시들어 가고,
시드는 것이 목표이며, 그 외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는 목표는
순간적인 것이다.
신은 내 안에 살고, 내 안에서 죽고
내 가슴속에서 괴로워한다.
이것이 내 목표로 충분하다.
제대로 가는 길이든 헤매는 길이든,
만발한 꽃이든 열매이든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이름에 불과하다.
아침 바람에 골짜기가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
힘있게 환하게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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