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이야기/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서전)
(96화) 열다섯 번째 옥탑방에서 생긴 이야기
복지 -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2025. 2. 22. 19:19
(96화) 열다섯 번째 옥탑방에서 생긴 이야기
동네 병원 이비인후과 의사가 감기로 편도가 부었을 뿐이라 하셨고, 더 큰 중견 병원 의사도 이비인후과 의사와 동일한 진료로 별것 아닐 거라는 진단에 우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왔을 뿐인데 예상과 다른 것에 그 충격이 매우 컸었다.
대형 병원이나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하라는 말에 미덥지 못한 넋이 나간 목소리로 되씹어 묻었다.
< 목감기로 편도가 조금 부었을 뿐이라고 그러셨는데, 암이라고 하셨나요?>
의사는 큰 병원이나 대학병원 빨리 가시어 확인하라는 말만 하면서 검사 의견 추천서를 나에게 내밀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라 완전히 얼이 빠져 우리 다시 대학병원에 갔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을 때는 더 큰 긴장감이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암이며 편도 암으로 결론이 나왔다.
그 충격에 사색이 되어 우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의사가 그런다.
편도 암은 비교적 드문 암이라며 편도는 입과 목의 경계에 의한 림프 조직인데 남성에게 더 많이 발생한다며 평소 음주, 흡연자에게 잘 발생하는 것이라며 남편이 평소에 음주나 흡연에 관해서 물었다.
난 의사에게 남편은 흡연 자체는 일체 하지 않으며 술도 좋아하지 않아 어쩌다 친척 간에 명절이나 모임에서나 한두 잔 할 정도라고 했었다.
남편 주변 유전적 요인이 있는지 물었고 난 시어머니께서 자궁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의사는 뇌출혈과 암은 급강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아마도 그 당시 만약에 두 가지가 동시에 생겼다면 뇌출혈은 바로 쓰러져 알 수 있으나, 암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점차 종양이 커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면역체계 약화로 암의 전이 확률도 더 높지만, 당장 더 큰 문제점은 전이된 세포는 보이는데 처음 발생한 모종 종양 세포는 모든 검사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으니, 전이 세포라도 시급하니 서둘러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즉, 어미 모종 종양은 그대로 둔 채 전이된 새끼 종양만 제거한다니 매우 찝찝한 좌절감도 들었지만, 선택 여지가 없는 상태에 그나마 이른 시일 내로 수술 날짜가 잡혔다.
이런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1도 생각 못 한 상태라서 우리의 이전 계획은 캐나다 딸 집에서 좀 쉬고 올 것이라 살던 아파트도 남에게 전세를 놓고, 이삿짐 보따리는 딸의 친구 친정집 옥탑방에다 이미 맡겨 둔 상태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모든 일들이 뒤헝클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적 혼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캐나다행 비행기는 취소하고 임시 거주는 이삿짐 보따리가 있는 매우 후텁지근한 옥탑방에서 피난민처럼 매우 불편하게 살면서 수술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둘째 딸이 인터넷 검색에서 서울 큰 병원 이비인후과 전문의 A 박사님이 편도 암 수술 분야에서 국내 최고 전문의이니 한 번 더 서울에서 검사를 받아 보자고 권유해 환자 가족의 마음에서 혹시나 하는 간절한 마음이라 서울 큰 병원 A 박사님에게 진료와 모든 검사를 긴장하며 받았으나 역시나 결과는 편도 암으로 나왔으며 여기에서도 첫 모종 악성 종양은 전연 보이지 않고 전이된 종양만 보인다는 검사 결과에 또다시 좌절감을 실감하였다.
가족 의견은 이왕이면 A 박사님에게 수술받기를 원했지만, 상담 담당 간호사는 A 박사님은 이미 꽉 찬 예약 수술 대기 환자로 몇 달 뒤에나 수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우린 그 말에 막막해 서울 A 박사님에게 수술을 포기하고 상담실에서 나오는데 상담 담당 간호사가 한 줄기 빛과 같은 가능성 말을 우리에게 던졌다.
< A 박사님께서 곧 미국 세미나 학회로 스케줄이 며칠간 비워진 날이 있는데 혹시나 미국행 일정이 취소된다면, 연락을 드리게요>
<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럼 꼭 부탁드리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상담 담당 간호사 말에 1%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초조하게 매일 전화기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
A 박사님께서 미국 세미나 학회에 가시는 것이 취소되었다며 비워진 공백 날에 수술이 가능하다고 그런다.
정말 고마웠고, 남편은 서둘러 입원해 모든 검사를 받은 후, 드디어 수술대에 오르는 날에 수술실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쪼그리고 있는 나를 본 A 박사님께서 그러셨다.
<우리 병원 최신 최고 기계에도 모종 종양이 절대 보이지 않는 상태일지라도 그날 수술에 따라서 모종이 발견되는 날도 있었으니, 혹시 종교가 있다면 우리 병원 지하 건물로 내려가시면 천주교. 기독교, 불교 기도실이 있으니, 보호자님의 기도와 저 역시도 전이 종양뿐만 아니라 모종 종양까지 오늘 수술에서 모두 찾아내도록 서로 열심히 잘 해봅시다>
A 박사님의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격려 말씀에 정말 고마웠다.
A 박사님께서 수술실에 들어가셨고, 난 기도실에서 A 박사님의 오랜 수술 경험에서 숨어있는 악성 모종을 꼭 찾게끔 도와달라고 혼신을 다해 기도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휴대전화 벨이 울렸고 수술이 막 끝나고 곧 회복실로 옮겨 갈 것이라는 전화에 황급히 수술실 문 앞으로 뛰어 올라왔었다.
수술실 문이 드디어 열리면서 A 박사님은 나에게 벙끗 웃으시면 오늘 운이 좋아 다행히 모종 종양까지 다 찾아내어 제거하였으니 잘된 수술이라고 하셨다.
<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너무 감사해 여러 차례 인사하였고 A 박사님이 가신 후, 전이와 모종 악성 종양까지 제거된 말씀에 안심과 위안으로 온 힘이 빠지면서 수술실 앞 의자에 푹석 주저앉았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서울 석촌 호수 주변의 요양병원에 다시 한동안 입원하였고, 이어서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서 수술한 큰 병원 주변에 임시 거주지 방을 찾아 헤맸다.
병원 주변에는 암 환자들이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위해서 장기간 거주자 위한 임대하는 집들이 많았고, 우리도 그런 곳에 임시 입주해 병원을 오가며 항암과 병행 방사선 치료를 오랫동안 받았다.
수술 전 남편의 키는 176cm, 체중이 78kg였으나 오랜 항암 방사선 치료가 끝난 후에 대구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키도 약간 줄면서 몸무게는 엄청나게 줄어서 남들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그만큼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가 힘들어 고생 많았으나 그래도 운이 좋아 유명하신 A 박사님에게 빠르게 수술받을 수도 있었고 남편이 살아 있음에 그때 정말 신에게 감사하였다.
(그때 내가 암 완쾌에 노력한 것이 다른 암 환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서 참고로 적어본다)
1, 수술과 항암 후에 암 환자 기력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좋다는 한약 보약, 약국 영양제는 일절 먹지 않았다.
(예를 들어 ; 같은 병원 암 병실의 지인은 몸보신 회복하느라 엄청나게 비싼 산삼을 구해서 먹었으나, 처음은 힘이 나고 좋다고 하더니 결국 바로 돌아가셨다. 왜 그런지 한의사, 암 전문의 등등 여러분의 생각도 들어본 내 나름대로 판단은 환자보다는 암 덩어리가 먼저 산삼 약효 기력을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2. 암이 좋아하는 육고기· 우유, 치즈 등등 유제품은 일체 자제하고 암이 싫어하는 생식 채식, 잡곡, 바다 오염이 낮은 작은 생선 등으로 건강한 음식 위주로 먹었다.
3. 항암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고 암 면역에 좋다는 말벌의 '프로폴리스'를 물에다 한 방울 타서 꾸준히 음용하였다.
4. 스트레스를 줄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매일 야산 주변을 산책하면서 운동과 더불어 근력을 키웠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몇 년 후에 남편은 암에서 완전히 완치 판명을 받았다)
이야기를 다시 그때 당시로 돌아가서 동네 병원 이비인후과 의사가 감기로 편도가 부었을 뿐이라 하셨지만, 캐나다에는 우리가 의료보험이 없으니 한 번 더 정밀 검사한 것이 암이 발견되어 서울의 A 박사님으로 잘 된 수술을 받아 살아있음에 정말로 감사했었다.
어느 날 남편의 오래된 친구가 병문안 와서 그들이 나누는 지난날의 증권투자 이야기를 밖에서 듣자니 어이가 없어 기가찼다.
예전 남편의 사업체 공장이 민사소송에 휘말려 마음고생이 심하게 시달리고 있을 당시에 우리나라 증권 시장이 아주 좋은 호황 시기와 맞물러 오늘 온 남편 친구는 증권 투자 큰 재미 자랑에 남편도 증권투자 호기심이 생겼는지 그 친구 따라 증권회사 첫발을 놓은 것이 불행의 초반이 되었다.
( 요즘은 모든 것이 인터넷 세상이지만, 옛날 그 당시에는 고객들이 직접 증권회사 매장에 앉아서 현판의 시세 변동 상황을 보면서 거래하는 마지막 시절쯤이었다)
남편이 생전 처음 증권 투자한 것이 크게 대박이 나면서 그 매력에 빠져 괜한 힘든 사업하는 것보다도 더구나 공장 민사소송 문제로 무척 마음고생할 적이니 사업보다 증권투자가 훨씬 좋다고 느껴져 사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직 증권 투자에 올인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부부일지라도 난 그가 얼마만큼 자금을 가지고 증권 투자에 돈을 퍼부었는지 정확하게 몰랐던 시절에 남편은 그 매장 안에서 최고의 VIP 고객이 될 만큼 증권투자에 빠져서 우리 모든 재산은 하나씩 차츰 사라지고 그 후로 결국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것으로 우리 가족은 갈 곳이 없어 길바닥에 내려앉을 정도로 겨우 단칸 월세방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몹시 고생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모두 까맣게 잊어 버리고 좋았던 시절의 VIP 고객 타령이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거들먹거리는 것에 은근히 화가 났었다.